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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비엔날레 2017 -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

작성자
monthlyart
작성일
2017-08-08 14:47
조회
50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
장나윤 | 미술사

지난 5월 13일, 제57회 베니스비엔날레가 기대와 관심 속에서 베일을 벗었다. 이탈리아 북동부의 수상 도시 베니스에서 격년 단위로 개최되는 베니스비엔날레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명실상부 세계 최대, 최고(最古)의 미술 축제로, 미술가들과 큐레이터들에게 꿈의 무대로 꼽히곤 한다. 이번 비엔날레의 진두 지휘를 맡은 크리스틴 마셀(Christine Macel)은 프랑스 퐁피두센터 국립현대미술관(Musee National d’Art Moderne?Centre Pompidou)의 수석 큐레이터로, 125년의 베니스비엔날레 역사상 네 번째 여성 총감독이다. 그러나 마셀이 주목을 받은 것은 단지 그가 여성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전시 개막에 앞서 발표된 이번 전시의 주제는 ‘비바 아르테 비바(Viva Arte Viva)’, 직역하면 ‘만세, 예술 만세’를 뜻한다. ‘예술가와 함께하는, 예술가에 의한, 그리고 예술가를 위한’ 비엔날레를 만들겠다는 마셀 감독의 선언은 자연히 그녀를 지난 2015년 총감독을 맡은 오쿠이 엔위저(Okwui Enwezor)와의 비교선상에 놓이게 했다. 엔위저 감독은 ‘모든 세계의 미래(All the World’s Future)’라는 주제 아래 정치적, 사회적 이슈들을 전면적으로 다루는 전시를 선보였으며, 이에 대한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시대가 당면한 문제들에 직접 개입하고 발언하는 것이야말로 동시대 예술가의 역할이라는 찬사가 이어졌지만, 반면 피켓을 들고 시위에 나서거나 단식 투쟁을 하는 것은(실제로 2015년 당시 우크라이나 국가관 참여 작가는 전시의 일부로 단식 투쟁을 했다) 예술가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비판도 잇따랐다. 이같은 오쿠이 식 비엔날레에 대한 비판을 의식이라도 한 듯, 마셀 감독은 이번 비엔날레를 통해 ‘혼란한 사회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예술의 진정한 역할’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어느 때보다도 불안한 최근의 국제정세를 이번 비엔날레가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를 두고 미술계의 관심이 뜨거웠던 만큼, 마셀 감독의 ‘예술 우선주의’라는 선택은 특히나 눈길을 끌었다. 13일에 예정된 일반 공개에 앞서 VIP와 언론을 대상으로 한 사전 공개가 이루어진 지난 5월 10일, 이처럼 세계 미술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드디어 비엔날레의 막이 올랐다.


독일관의 선전 그리고 한국관의 약진
베니스 비엔날레는 크게 국가관 전시와 본전시, 그리고 각종 연계 전시들로 구성된다. 국가관은 총감독이 선정한 그해의 주제에 맞추어 각 국가별로 기획자 및 작가를 선정하여 전시를 조직하며, 본전시는 총감독이 직접 기획한다. 전시관들은 본관과 총 29개의 국가관이 위치한 자르디니(Giardini) 지역 그리고 일부 국가관 전시 및 대규모 본전시가 열리는 아르세날레(Arsenale) 지역을 중심으로 베니스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배치되어 있다. 베니스는 작은 도시이지만, 비엔날레 기간에 열리는 수많은 연계 전시 및 기타 갤러리, 미술관 전시들까지 모두 돌아보려면 1주일 체류로도 시간이 빠듯하다. 과연 ‘세계 최대의 미술 축제’ 다운 규모다. 1995년 故김석철 건축가와 프랑코 만쿠조(Franco Mancuso)의 협업으로 지어진 한국관은 전통적 문화 강국들의 국가관이 위치한 자르디니 섬에 자리잡고 있다. 지난 2015년 재건축된 호주관을 제외하면 자르디니에 마지막으로 지어진 국가관으로, 이후 국가관 건립이 금지되어 자르디니에 입성하지 못한 많은 국가의 부러움을 샀다.
유력 미술 매체들은 VIP 오픈 직후 앞다투어 탑 5, 탑 10 국가관을 선정하여 발표했다. 그중 미국관, 영국관, 독일관, 프랑스관, 스위스관 등 일부 국가관은 여러 매체에 주요 전시로 소개되어 눈길을 끌었다. 관객을 압도하는 대형 설치작품을 선보인 미국의 마크 브래드퍼드(Mark Bradford)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미국관 건물 내부 원형홀의 벽면을 콜라주와 혼합 매체 설치를 활용하여 마치 폐허처럼 연출했다. 흑인이자 동성애자로서 인권 문제에 몰두해온 그가 자신과 같은 소수자에게 등을 돌린 오늘날의 미국을 대표해야만 하는 역설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이어졌다. 영국관이 기획한 필리다 바로(Phyllida Barlow)의 개인전 또한 많은 주목을 받았다. 바로는 지난 몇 년간 서펜타인 갤러리(Serpentine Gallery),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 등 영국의 주요 미술관들에서 소개되며 뒤늦게 미술계의 주목을 받게 된 73세의 원로 작가이다. 그는 다양한 재료를 쌓거나 뭉쳐서 만든 엉성한 형태의 대형 조각작품들을 설치했는데, 이 작품들은 층고가 높은 영국관 건물을 뚫고 나갈 듯한 불안한 형태로 관객을 압도하고, 그들의 동선을 방해한다. 전시 제목인 〈폴리(Folly)〉(바보스러움, 어리석음 등을 뜻한다)는 자연히 오늘날의 위태로운 영국 정치 상황을 연상하게 하지만, 전시장 어느 곳에서도 직접적인 정치적 메시지는 찾아볼 수 없다. 그 덕에 크리스틴 마셀 총감독이 선언한 ‘예술을 위한 예술(Art’s for art’s sake)’이라는 지향점에 부합하는 전시였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오프닝 주간 내내 가장 뜨거운 관심을 끈 것은 단연 독일관이다. 수잔느 페퍼(Susanne Pfeffer)의 큐레이팅으로 안네 임호프(Anne Imhof)의 ‘파우스트’를 선보인 독일관 앞에는 정해진 시간에만 관람할 수 있는 퍼포먼스 공연을 보기 위한 인파가 연일 몰려들었다.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다섯 시간여 동안 퍼포머들은 건물 전체에 설치된 유리 바닥 아래 좁은 공간을 넘나들며 휴대전화를 확인하거나, 노래하거나, 춤추는 것은 물론 자위 행위를 하는 등 다소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움직임들을 선보였다. 이를 유리 바닥 위에서 지켜보는 관객들은 불편함을 느끼지만, 그것이 은유하는 것은 결국 끊임없이 타인에게 노출되기를 자청하는 오늘날 우리의 삶, 그리고 그속에서 경험하는 개인적, 사회적 단위의 갈등이다. 독일관 외부에 설치된 철창과 그 안을 어슬렁거리는 도베르만 두 마리는 전시의 극적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데에 일조했다. 세계 유수의 미술 매체들이 개막과 동시에 독일관을 호평하는 기사를 타전했으며, 결국 독일관은 최고의 국가관에 수여하는 황금사자상의 영예를 차지했다.
이번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한국관의 약진이다. 이대형 감독의 총괄 아래 코디최, 이완 작가의 2인전으로 기획된 이번 전시의 제목은 <카운터발란스: 돌과 산(Counterbalance: The Stone and the Mountain)>이다. 코디최의 작품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생각하는 사람>으로, 미국에서 널리 사용되는 소화제인 형광분홍빛의 펩토비즈몰(Pepto-bismol) 3만 병과 두루마리 화장지를 섞어 만든 설치작품이다. 이민자로서, 그리고 한국의 급격한 세계화 및 서구화를 목격한 세대의 일원으로서 극단적인 문화 충돌에 대한 ‘소화 불량’ 상태를 인상적으로 형상화했다는 평을 받았다. 국내외 언론의 찬사를 받은 또 하나의 작품은 이완의 <고유시>로, 이는 작은 방의 벽면을 668개의 시계로 채운 설치작업이다. 이완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직업군에 속하는 이들에게 한 끼의 아침 식사에 들어가는 비용 및 그들의 노동 시간, 수입 등을 묻고, 소속 국가 GDP(국내총생산) 정보 등을 토대로 수식을 만들어 각각의 시계가 고유의 속도로 작동하도록 제작했다. 각기 다른 속도로 돌아가는 668개의 시계는 관객들로 하여금 소위 신자유주의로 요약되는, 오늘날 개인에게 강요되는 삶의 속도와 그 이면에 잊힌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 서로 다른 세대를 대변하는 코디최와 이완의 작품들을 통해 뻔하지 않은 변주를 선보인 한국관은 현대 한국 사회의 ‘오작동’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전통, 자연 그리고 인간성의 회복
마셀 총감독이 기획한 본전시는 ‘예술 우선주의’라는 기획 의도에 맞게 자연으로의 회귀, 전통의 보존, 인간성 회복 등에 주목하는 경향을 보였다. 강력하거나 노골적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들은 배제되었으며, 토착문화 혹은 수공예적 전통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두루 소개되었다. 알록달록한 색의 거대한 실뭉치들을 설치한 실라 힉스(Sheila Hicks), 조각과 회화의 경계에 위치하는 천 구조물을 벽면에 설치한 프란츠 에르하르트 발터(Franz Erhard Walther) 등이 좋은 예이다. 또한 원자력발전소 주변을 걸어다니며 촬영한 비디오와 관련 오브제들을 설치한 코키 타나카(Koki Tanaka)의 작품, 강물을 북처럼 두드리는 아프리카 청년들의 퍼포먼스를 촬영한 마르코스 아빌라 포레로(Marcos Avila Forero)의 작품처럼 비서구권 작가들의 작품이 대거 포함된 것 또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한국 작가로는 미국 사회의 소수 인종, 특히 아시아인의 경험에 집중하여 공식 역사 이면에 존재하는 약자들의 삶을 보여주는 김성환의 영상작업 <러브 비포 본드(Love before Bond)>, 깨진 도자기를 이어 붙여 설치미술을 제작해온 이수경의 신작 <번역된 도자기: 신기한 나라의 아홉용>이 포함되어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마셀의 전시가 원시성 및 이국성에 대한 왜곡된 시각에 갇혀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영국의 주요 일간지 텔레그래프(Telegraph)는 자르디니 본관에서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 작품의 일부로 워크숍을 진행한 수십 명의 이민자 및 난민 출신 참여자들의 모습이 식민주의 시대 박람회에 설치된 토착문화 체험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며 날카롭게 비판했다. 비서구권의 토착문화를 인간성 회복을 위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듯한 마셀의 기획 태도가 1989년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문제적 전시 <지구의 마술사들(Magiciens de la Terre)>의 잘못된 타자화의 방식을 답습한다는 지적도 뒤따랐다.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출신 작가들의 작품이 폭넓게 포함된 것은 고무적이지만, 이들이 서구 문명의 이성 중심적 세계관과 상반되는 비이성, 주술성, 자연성 등의 가치로 환원될 우려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 예술의 역할, 그 열린 결말의 질문에 대하여
이번 베니스비엔날레를 두고 오가는 엇갈린 평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오늘날 세계화에 대한 환상이 깨진 지는 이미 오래이며, 국제 질서는 자국 이익 우선주의, 극우 국수주의의 중심으로 재편되는 걱정스러운 양태를 보이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폭력성 또한 오늘날 필수적으로 재고되어야 할 사안이다. 국가관들을 중심으로 시의성이 민감하게 반영되는 비엔날레의 특성을 감안했을 때, 이 같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 이번 비엔날레가 평가되는 것은 따라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셀의 ‘예술 우선주의 비엔날레’가 얼마나 성공적인 시도였는지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열린 결말로 남아있다. 이는 무엇이 예술을 예술답게 하는가, 나아가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인간답게 하는가는 질문과도 닿아있다. 이러한 질문들은 이번 비엔날레가 우리에게 던지는 생각할 거리(food for thought)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