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리뷰] 박민준-디테일, 보고 읽는 회화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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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에 잉크, 수채물감, 금박 51×42cm(액자크기) 2013

종이에 잉크, 수채물감, 금박 51×42cm(액자크기) 2013

신혜영│미술비평

“그림을 본다”는 것은 “글을 읽는다”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말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지-시각성과 텍스트-서사성이 자연스럽게 짝 을 이루게 된 것은 사실상 근대 이후의 일이다. 그 전까지는 호라티 우스의 ‘시는 회화와 같이’라는 말이 대변하듯, 시를 비롯한 문학에 서는 눈앞에 ‘보이듯’ 풍부한 회화적 묘사가 즐비하였고, 회화를 비 롯한 미술에는 ‘읽어내야’ 할 수많은 우의와 상징이 가득하였다. 그 러나 18세기 ‘순수예술’ 체제가 성립된 이후 20세기 중엽까지 모더 니즘 예술이 진보의 역사를 거듭하는 동안 미술은 문학과 철저히 멀어졌다.1재현, 서사, 참조 등 미술 본유의 것이 아닌 이른바 문학적 특 징들은 모더니즘 회화에서 모두 철저히 배제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 한 미술의 비본유적 특징들은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보란듯이 부활 하여 오늘날 이미지를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게 되었다. 많은 작가들이 관객이 시각 외에 여러 다양한 감각으로 작품을 경험하고 나름의 기준으로 받아들여, 여러 겹의 숨은 의미를 읽어내고 자유롭 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박민준은 ‘볼거리’ 뿐 아니라 ‘읽을거리’가 있는 그림을 그린다. 그 의 그림에는 모더니즘 이후 회화에서 배제되어 온 대상의 구체적인 재현과 사건의 서사, 미술사의 참조가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서 양의 고전주의(classism) 회화가2 있다. 작가는 전통적인 서양의 재 현회화 방식을 빌려와 그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넓은 의 미에서 고전주의 회화는 세밀하고 매끈한 붓질과 형태들의 질서 있 는 배치와 구성, 각 요소들 간의 균형과 통일감을 형식적 특징으로 하며, 내용적으로는 신화, 성서, 역사 등과 관련된 이야기를 상징 (emblem)과 우의(allegory)를 통해 함축적으로 담아내는 것을 특 징으로 한다. 박민준 역시 형식과 내용 면에서 어느 정도 이러한 고 전주의 회화의 틀을 따르고 있다.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여러 요소들 이 작가의 철저한 계획 하에 최대한 매끈하게 올라가 있는 그의 그림 에는 아르고, 올림포스, 세이렌, 아누비스, 아리아드네, 이카로스, 크 로노스 등 고대 신화의 소재가 자주 사용되고 사자, 호랑이, 새, 도마 뱀, 당나귀 등의 동물을 통한 우의적 표현과 날개, 저울, 기둥, 휘장, 창, 후광, 고대 조각상 등의 도상이 흔히 등장한다. 그러나 그러한 소 재들은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를 중층적으로 함의할 수 있 게 하기 위해 선택될 뿐, 고정된 전통적 의미의 상징과 우의가 우선 시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작가는 <아누비스>(2009)에서 자신 의 지식과 세계가 전부인양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그들을 바라보는 절대적 존재가 곁에 있음을 말하고자, 죽은 자를 판단하는 고 대 이집트의 신 아누비스를 가져온다. 그러나 자칼의 머리에 인간의 몸을 가진 모습으로 전해지는 아누비스는 작가의 손을 거치며 동물 의 머리털과 날개를 달고 사후 재판을 집행하기 위한 지팡이와 ‘진리 의 저울’이 손에 들려있는 모습으로 세심하게 변형되었다. 아누비스 의 신화가 그림의 이야기를 보다 풍성하게 하지만, 신화를 모르는 사 람들도 빛을 받은 채 공중에 떠 있는 비현실적 존재와 자신만의 세계 에 갇혀 있는 지상의 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 그림의 주제를 어느 정 도 파악할 수 있다. 최근 개인전에 소개된 드로잉 중 <벌거벗은 임금 님을 위한 드로잉> (2013)에서 작가는 왕좌에 오른 한 마리의 침팬지 와 그 주위에서 왕을 향해 온갖 짓을 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묘사하였 다. 작가는 이 그림을 통해 스타 예술가와 그를 떠받치고 있는 예술 계의 풍토를 비판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림의 함의는 중층적이다. 동 화 『 벌거벗은 임금님』을 아는 대다수 사람들이 파악하는 그림의 표면적 이야기부터 유럽 회화에서 전통적으로 원숭이가 화가를 뜻하는 것3을 아는 사람들이 짐작할 수 있는 작가가 말하려는 이야기와 미국의 부시 대통령을 닮은 침팬지의 얼굴에서 전혀 다른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까지 그야말로 제각기 다른 독해가 가능한 것 이다.
이렇듯 박민준에게 고전주의 회화란 따라야 할 본질적인 강령을 담은 하나의 사조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예술에 근접하기 위한 하 나의 방편이자 기준점이 된다. 작은 차이들이 모여 결국 큰 차이를 만드는 예술을 지향하는 그에게 ‘고전(classic)’이란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모범이 될 만한 가장 기본적인 예술이라는 의미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하나의 사조가 지닌 형식을 고수하기 보다 는 필요에 따라 계속해서 조금씩 변화된 형식을 취해 왔다. 초기 작 업에는 극단적인 명암대비로 극적인 효과를 높이는 카라바조의 테 너브리즘(tenebrism)이 중심이 되었다. 당시 그림들에는 마치 암 흑의 무대에서 조명을 받으며 등장하듯 인물의 동작 및 표정과 서사 를 위한 중요한 사물들이 주로 부각되었다. 그러나 이후 작가는 전체 적으로 명암의 대비를 줄이고 배경과 주변 사물들까지 보다 세밀하 게 묘사하는데 힘을 기울인다. 이전에 암흑으로 처리했던 배경은 고 전적인 양식의 계단과 창문, 패턴이 있는 천장과 바닥 등의 건축적 요소로 일일이 묘사하고, 인물 외에도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는 보다 많은 형태적 요소들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화면 전체에 관람자의 시선을 고루 분산시킨 것이다. 예를 들어 일곱 개의 타로 점궤를 인물 과 함께 표현한 회화 연작 (2010)와 그 일곱 점의 회화를 한 사 람의 여인과 함께 다시 하나의 회화에 재현한 (2010)가 대 표적이다. 세밀하게 재현된 그림들을 또 다른 그림 안에서 더욱 세밀 하게 재현하는 이 일련의 작업에서 작가는 풍부한 기호적 의미를 이끌 어내며 작품들 간의 상호텍스트성 또한 제시하고 있다. 유화만이 아니 다. 드로잉에서 그 세밀함은 또 다른 모습으로 빛을 발한다. 르네상스 시대 은필화(silverpoint)와 금박(gold leaf)기법을 비롯, 연필, 수채 물감, 오래된 다양한 펜촉에 찍은 잉크까지 여러 전통 재료와 기법을 사용해 종이에 그린 드로잉들은 가늘고 정밀한 선들과 그 선들이 만 들어 낸 전체적으로 가벼워진 화면으로부터 유화와는 또 다른 느낌 을 전한다. 문설주에 새겨진 부조의 작은 인물형상이나 사람의 머리 카락과 동물의 털까지 재현해낸 묘사력은 감탄의 경지에 이른다. 레 오나르도 다 빈치가 책으로 묶어낸 수많은 스케치와 판화 형식의 삽 화들이 그렇듯, 이후 유화로 옮겨질 스케치들과 그 자체 완결된 소묘 작업들은 박민준의 작업 세계를 보다 풍요롭게 하는 동시에 그간 유 화에서 보여주던 완벽한 형식적 구성과 채색의 압박으로부터 숨통 을 트여준다.

 종이에 잉크, 수채물감, 금박 50×68cm(액자크기) 2013

종이에 잉크, 수채물감, 금박 50×68cm(액자크기) 2013

읽는 그림, 회화의 잠재력

이렇듯 점차 강화되어 온 ‘디테일’은 박민준 회화의 가장 두드러진 지점이자 고전주의 회화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흔히 고전주의 회화 의 특징으로 원근법을 비롯한 균형잡힌 화면 구성을 꼽지만, 어떤 면 에서 디테일은 전체적인 화면의 구성보다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의 결혼>에서 중앙에 걸린 작은 거울이 나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1533)에서 하단에 기울어진 해골처럼 그림 전반을 압도하는 고전주의 회화의 디테일의 사례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디테일은 현대회화로 올수록 화면을 전체적 으로 감상할 수 없게 만드는 장식적인 요소이자 저속한 것으로 평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예술가의 탁월함을 묘사력에서 찾지 않 게 되면서 디테일은 점차 지양되어야 할 것으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앞서의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고서도, 디테일은 화가가 전통과 규범 을 어기며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부분이자, 보는 사람에게 더 풍 부한 의미와 더 큰 즐거움을 주는 부분으로 평가될 수 있다. 프랑스 미술사학자 다니엘 아라스는 자신의 저서『 디테일』4을 통해 서양의 재현회화에서 디테일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다각도로 재조명한다. 아라스는 진정한 의미의 디테일은”그림 속에서 사건을 일으키며 강 력하게 시선을 붙들어 구성되어 있는 시선의 경로를 동요시키”며 ” 한 그림의 기쁨이 회화적 환희로 바뀌는 특권적 계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미지를 만드는 재현에 관련된 ‘도상적 디테일’과 재현과는 무관하게 회화의 현존을 나타내는 ‘회화적 디테일’을 구분한다. 그 두 가지 계기는 함께 작동하기도 하지만 구분되는 것으로, 디테일이 란 읽어낼 수 있는 기호의 의미를 만드는데 기여하는 동시에 보는 것 만으로도 즐거움을 주는 회화적 질료의 현존 자체로서의 가치를 지 닌다는 것이다. 따라서 재현회화에서의 디테일이야말로 회화가 사 진을 비롯한 다른 예술 매체들과 차별화되어 여전히 의미와 가치를 지닐 수 있는 매체임을 방증하는 지점인 셈이다.
박민준의 회화에서 역시 디테일은 도상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의 계기 모두로 작동한다. 이야기의 중층적 의미와 그 자체 회화의 매체 적 특성이 디테일로부터 비롯되어, 그림을 보다 풍요롭게 읽게 해주 고 그 자체로 그림의 맛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은 것’ 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는 작가의 태도와 맞닿아 있을 것이다. 그가 고전주의 회화의 틀을 따르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역사는 죽 고 모든 것이 허용되었다”는 단토의 말이나 “세상에서 이제 양식적 인 개혁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제임슨의 말처럼, 오늘날 예술은 역사적 진보의 굴레에서 벗어나 지나간 모든 경향 및 사조를 자유롭 게 차용하고 전유할 수 있게 되었고, 예술가는 새로운 양식의 압박에 서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다. 표면적인 양식을 보는 사람에게 박민준 의 회화는 고전주의 회화의 답습일지 모른다. 그러나 작가가 무슨 이 야기를 하려 하는지 그 이야기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작은 디테 일을 읽어내려는 사람에게 그의 그림은 큰 기쁨을 줄 것이다. 그것은 모더니즘 회화 이후 우리가 잠시 망각했던, 보는 그림뿐 아니라 읽는 그림으로서 변하지 않은 회화의 잠재력을 드러내며 그 자체로 동시 대 예술의 또 다른 의미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

1독일의 비평가 레싱이 『라오콘 – 회화와 시의 경계에 관하여』(1776)에서 고대 그리스 조각상 라오콘을 통해 미술과 문학이 본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예술임을 역설한 이후, 모더니즘 미술 이론가 그린버그는 「더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1940)에서 동일한 주제를 이어 받아 미술이 문학의 그늘로부터 벗어나 순수하게 시각성과 물질성을 추구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2 고전주의 미술은 흔히 18~19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신(新)고전주의 미술을 지칭하지만, 여기에서는 빙켈만이 ‘고전 양식’으로 구분한 르네상스 회화와 이후 바로크 회화 및 신고전주의 회화까지를 포함한 광의의 의미로 사용하고자 한다.
3 화가-원숭이의 개념은 14세기 자연을 모방하는 화가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는 의미에서 사용된 ‘예술은 자연의 원숭이(Ars simia naturae)’라는 표현에서 비롯되었다.
4 다니엘 아라스, 『디테일-가까이에서 본 미술사를 위하여』, 이윤영 역, 숲,
2003.(Daniel Arasse, Le Détail-Pour une Histore Rapprochée de la Peinture,
Editions Flammarion, Paris,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