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예선의 달콤한 작업실 17

최예선 (1)

골목과 문장, 새파랗고 새하얀

내가 나누는 이야기의 절반 이상은 책과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얼마 전 깨달았다. 읽었거나 읽고 있는 책은 물론이고 읽어야할 책도 대화 목록에 들어간다. 쓰고 있는 책과 써야 할 책에 대한 것들도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책이 일이자 취미이자 삶인 인간이라 그런 모양이다. 그러니, 책 이야기가 없는 대화는 도무지 이어갈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읽기에 몰두하는가, 무엇이 나를 쓰게 만드는가? ‘가장 재밌고 즐거운 일이니까’ 라고 대충 대답하기엔 이 질문은 포함하는 맥락이 깊다. 읽고 쓰는 나를 규명하기 위해 읽고 쓰는 일을 계속하는 것일까? 그런 재귀적인 대답이 석연찮지만 삶이란 어떤 시작과 끝을 반복하는 무한 루프처럼 보이므로 어느 정도까지는 유효한 대답이리라. 그러나, 책과 나의 관계를 어떻게든 밝혀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나와 세계, 나와 타인, 나와 당신의 관계를 설명하는 일과도 분명 관련이 있다. 나를 규명하는 일만큼 시간이 들고 귀찮고 한편, 근사하고 복잡한 일이 또 있을까. ‘나’에서 시작된 질문들이 ‘책’에 이른다. 책의 언어는 새파란 바닷물처럼 심연을 건드리고 새하얀 포말처럼 바깥을 만지게 한다. 나는 잠시 질문을 가다듬으며 해답을 유예한다.

감정에 깊은 흔적을 내는 문장을 읽고나면, 오늘의 독서는 끝난다. 그 문장 하나로 가슴이 벅차올라 더 읽어가기가 어렵다. 그럴 땐 작업실을 나와 남산을 향해 걷는다. 남산에서 흘러내린 산자락에 자리한 해방촌은 복잡한 골목으로 치자면 서울에서 가장 손꼽힐 곳이 아닐까? 산등성이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난 골목길은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로 이어질지 가보지 않고는 가늠하기 어렵다. 사방으로 뻗은 골목길은 어디로 이야기가 흘러갈지 모르는 미스터리 소설의 문장처럼 보인다. 때로 막다른 길에 다다르면 ‘아무리 노력해봐야 이 무의미의 세계에서 우리가 건질 건 하나도 없어!’라 외치는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문장을 본 것처럼 허탈해진다. 그래도 난해한 문장처럼 복잡한 골목은 더 많은 모험을 하라고 나를 부추긴다. 사람 사는 집은 길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건축가 남편의 믿음을 되새긴다. 그건 책 속의 문장이 사람을 외면할 리가 없다는 나의 믿음과 유사할 것이다. 낯선 골목에서 새하얀 포말이 인다. 이 골목과 나는 최초의 문장처럼 만난다.

최예선 (2)골목 가장 높은 지점에 남산순환도로인 소월길이 나온다. ‘소월’이라는 아름다운 시인의 이름이 붙은 길에 서서 ‘해방촌’이라는 그리 아름답지 않은 이름의 동네를 바라본다. 남산 아래 동네 해방촌은 일제가 물러가고 북쪽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서울에 정착하면서 생겨난 곳이다. 집도 절도 없는 사람들이 산 언저리에 터를 잡았고, 그 흔적 그대로 길이 만들어지고 집이 앉혀졌다. 구불구불해서 어디로 이어지는지 불명확한 골목을 따라 빈틈없이 집들이 들어찼다. 이 수많은 집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수십 년어치의 인생이 포개진 이불장과 옷장이 그 중심에 놓여있을 방들, 늦은 시간이 되어야 엷은 불빛이 새어나오는 조그마한 창문들. 잎사귀가 말라버린 화초가 문가와 담 아래에서 기이한 풍요로움을 알리고, 취향을 훤히 드러내는 빨랫감들이 가장 풍경 좋은 옥상에서 바람에 나부낀다. 배내옷과 보행기, 돋보기와 나무의자가 골목을 따라 돌고 도는 동네. 물건들처럼 사람들도 돌고 돈다. 용산 미군부대와 해방촌은 태생적으로 이민자들의 동네다. 골목엔 새파란 바람이 분다. 도시의 심연에선 바다처럼 짠내가 난다.

나의 산책은 길어지기 일쑤다. 해방촌 길을 따라 내려가 경리단, 이태원까지 걷기도 한다. 걷다보면 걷는 일조차 문장을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되뇌인 문장과 새로 지은 문장이 만나는 곳에 새하얀 운무가 낀다. 두 세계의 대화가 목표도 없이 발설되었다가 골목에 버려진다.

산책의 마지막은 결국 서점이다. 문학 중심 서점을 표방하는 ‘고요서사’는 소설과 에세이와 잡지들이 자신만의 문장을 토해내는 곳이다. 산책하다 들른 것처럼 쓰윽 들어서긴 하지만, 실제론 그 반대다. 나는 고요서사에 오기 위해 일부러 먼 곳으로 휘돌며 걷는다. 고요서사에 들어서면 ‘제발 이 책에 대해 좀 들려줘요!’라고 말하는 듯한 갈급하고 수줍은 표정으로 책방 주인을 바라본다. 책 이야기를 귀찮아하지 않는 건 책방 주인의 미덕이다. 이야기는 어째서 우리의 호흡을 이토록 가쁘게 만들까! 작은 책방 안에 새파란 공기가 생겨나 나를 감싼다.

나는 다시 골목길로 향한다. 매번 다른 길을 걸어보지만 미지의 골목길은 여전하다. 천 갈래 만 갈래쯤 되는 것일까? 좁게 휘어진 계단을 걷다가 어떤 삶을 바라보고 누군가 흘린 문장을 주워 품 속에 담는다. 길은 각기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지만 알아채지 못할 곳에서 스쳤다가 만나며 이어진다. 우리가 세상 어디선가 반드시 만나게 되듯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