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김남수ㅣ안무비평-오늘의 샤머니즘과 감흥으로서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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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수 ㅣ 안무비평

나는 한국민족의 조상들이 추운 북방의 삼림지대(Tagar)를 통과하 면서 형성된 무교(Shamanism)적 체질이 한국인의 정신과 육체에 스며있어, 그것이 한국예술의 특성을 좌우했다고 본다. –조요한, 《한국미의 조명》, 1999

감흥으로의 시작

굿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이해하겠지만, 샤머니즘은 언캐니한 것 이다. 그것은 샤먼이 소위 작두를 타기 때문이다. 작두를 탄다는 것 은 유심히 보지 않으면 안된다. 작두 아래에는 항아리가 하나 놓여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물의 메타포이다. 그 우물 속에는 용신이 살 고 있다. 해수계에서 지상계로, 다시 천상계로 솟구쳐 오르는 용의 다이내믹한 승천을 촉발하는 것이 작두타기이다. 즉 용의 제물이자 용의 매개자인 셈이다. 용, 즉 ‘미르’는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동 북아시아에서 광범위하게 수용되어 왔다. 샤머니즘은 그 가장 오래 된 신앙 형태를 ‘영원회귀의 신화'(엘리아데)로서 다시 한 번 재현하 는 제의인데, 그 제의는 재현의 일반적인 의미를 떠나서 항상 언캐 니하다. 거기에 기묘한 부분이 있다.
작두타기를 하는 것으로서 해수계-지상계-천상계가 연결될 때, ‘사 슬 세우기’가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사슬’이란 DNA처럼 두 겹으로 꼬아진 매듭 구조인데, 상징적으로는 황룡과 청룡이 새끼꼬기를 하 듯이 사슬을 이루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다. 이 두 마리 용의 새 끼꼬기 하는 승천이 김금화 만신의 태몽이기도 하다(김금화, 《비단 꽃 넘세》, 32쪽). 즉 그는 무당이 될 팔자였던 셈이다. 이렇게 ‘사슬 세 우기’가 이루어져야 굿판의 모든 사람이 소슬해진다.
이렇게 굿판의 모든 사람이 서서히 섬뜩하면서도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을 때, ‘무감서기’가 가능해진다. ‘무감서기’란 샤먼 이 대감놀이를 진행하는 막간에 일반 사람들이 샤먼이 벗어둔 무복 을 챙겨입고 굿판에 올라서서 마치 샤먼처럼 춤추고 사설을 읊는 행 위이다. 한 많고 억울한 사람들이 ‘무감서기’에 많이 나서는데, 가령 시집살이하는 며느리가 신명이 오른 상태에서 시어머니를 패기도 한다는 것이다.(홍태한, 《서울굿의 다층성과 다양성》, 87쪽) 신이 들 어와서 자아가 망실된 상태라는 변명과 함께. 그런 사정 탓에 이 ‘무 감서기’라는 판을 원천봉쇄하려는 시도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이것이 없다면, 민중의 신명은 오르지 않고 사회적인 굿판도 열릴 리 만무 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슬 세우기’와 ‘무감서기’는 샤머니즘이 커뮤니티와 함 께 할 때, 주요한 수행적인 것이 된다. 우리가 굿판을 보러 갔을 때, 대 체로 보게 되는 것이 이 두 부분이다. 현대예술의 동향과 연루될 만 한 샤머니즘의 감각을 말하고자 할 때는 이 부분의 탐문이 긴요하다 고 보고,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우선 통상 쓰이는 ‘신명’, ‘무감’ 이란 말 대신에 ‘감흥(感興)’이란 개 념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 개념은 분명히 스피노자 이후 정치미학에 서 주목해온 ‘affect’의 주요 번역어 중에 하나인 ‘감응’에 대응하는 것이다. ‘감응’을 감정이나 정서의 에너지를 신체의 극한적 상태로 표출하거나 배치하는 것이라고 정의 한다면, 요제프 보이스가 말하 는 ‘사회적 조각’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인간의 노동 영 역 안에 어느 정도의 잠재적인 창조성이 존재한다.”(보이스) 그런데 이러한 상태가 ‘감흥’의 외적 표현이 될지도 모르지만, 좌우간 ‘감흥’ 을 제안하는 것에는 다른 출발이 있다.
‘사슬 세우기’와 같은 의례의 가장 기초적인 행위로서 터줏대감 을 불러내는 것을 연상해보자. 어떤 곳에서 어떤 행사를 하게 되어 제의를 할 경우, 먼저 그 토지신을 안심시키고 진정시켜야 한다. 그 래서 땅에다 술을 붓는데, 토지신이 술에 취해서(!) 잠에서 깨어나 게 된다. “‘흥(興)’이라는 것은 ‘잠에서 깬다’, ‘자리에서 일어난다’는 의미가 있다.” (시라카와 시즈카, 《주술이란 무엇인가》, 198쪽) 이렇 게 어떤 것이 지니고 있는 내적인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 렇게 하여 샤먼의 몸속에 들어간 소위 ‘몸주대감 상태’가 된다. 즉 몸 의 주인인 대감신에 의한 대리보충 상태. 이때부터 샤먼이 노는 것 이 아니라 대감신이 놀게 된다. 놀이라는 것은 피동형이다. ‘흥’은 무 아 상태에서 타자가 개입되어 있는 상태에서 노는 것이다. 이 ‘흥’은 백남준에 의해 사르트르가 제시한 명제, 즉 “나는 나인 것으로 존재 하지 않으며, 나는 내가 아닌 것으로 존재한다” 와 연결이 시도되었 다.(<실험TV 전시회 후주곡>, 1964). 곧바로 라캉의 명제로도 이어 졌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 존재하지 않으며, 나는 내가 생각지 도 못한 곳에 존재한다.”
‘감흥’이란 이런 식으로 ‘몸주대감’이라는 타자에 의해 대리보충 되어 있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경계 체험이자 전이 체험이다. 소위 리미널리티(liminality)라는 제의성의 ‘문지방’ 체험이 바로 ‘감흥’ 이다.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를 경계로 구분짓지만 동시에 연결되 어 있는 무차별지대로 인지하고, 그 사이를 매개하는 사슬로 맺어주 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흥’이 없다면, ‘사슬 세우기’라는 해수계-지 상계-천상계 사이를 꿰뚫는 ‘감통’ 역시 일어나지 않는다.

대감굿의 시대

19세기부터 20세기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많은 변화가 생겼는데, 그 중에서도 기억해둘 만한 것은 바로 굿의 세속화이다. 이것은 굿의 타락이 아니라 굿에 보다 많은 유흥성이 생겼다는 뜻이다. 유흥성이 란 해학과 놀이의 감각이다. 가령, 재담과 발탈의 명인 박춘재는 ‘대 감굿’을 ‘대감놀이’로 변화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이전 굿판이 가장 간단하게 정리된 도식이었던 <무당내력>에는 미미하게 소개 됐던 대감거리가 어느덧 굿의 주류가 된 것이다. 12거리 중에 하나 였던 대감굿이 12거리 전체를 모두 접수한 셈이다. 그랬을 때, ‘대감 놀이’는 기존의 ‘씻김굿’ 체제와는 유다른 샤머니즘의 세계를 펼쳐 보였다고 할까.
가령, 강신의 춤(降神舞)이 여전히 역사의 억울함을 씻기며 신의 고뇌와 합일하는 춤인 데 반해, 유신의 춤(侑神舞)은 청정한 성화(聖 化)를 완료한 자가 신인합일된 상태에서 추는 놀이의 춤이다. 유신 의 춤은 신이 불행을 벗고 즐겁게 노는 것을 요구하는 신탁을 자주 보낸다. “한 예로 경성 주변의 <대감놀이>에서 형식화된 공수 중에 는, “뭐니뭐니 해도 내가 제일이다. 내 마음을 다치게 하면 너희들은 살아날 수 없다. 내가 만족하게 놀도록 해줄 수 없느냐” 하고 말하고, 또한 신전 앞의 공양물을 흘겨보며, “이것은 도대체 무엇이냐, 내가 혼자 먹어도 배를 채울 수가 없지 않느냐, 산 좋고 물 맑고 놀기 좋고 경치 좋은 곳에 가서, 잘 놀게 해줄 날이 언제인고” 라며 기원자의 갖 가지 기원조차 귀찮아하며, 서둘러 신놀이 신악으로 들어갈 것을 요 구하는 것을 볼 수 있다.”(아키바 다카시, 《춤추는 무당과 춤추지 않 는 무당》, 140쪽)
이 ‘대감놀이’가 흥미로운 지점은 유흥성을 살리면서도 여전히 ‘감 흥’의 세계에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유흥성 속에서 새로운 밀도를 가지게 된 영역을 개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단 그동안 중구난방으 로 흩어져 있던 신들의 이름들을 ‘대감’ –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에 의하면, ‘대감’이란 북방아시아의 천신을 의미하는 ‘텡그리(Tengri) ‘가 대가리>대갈(Taigar)>대감 등으로 변이된 용어이다 – 이란 호칭 으로 정리하면서 “욕심 많고 탐심 많은 터줏대감”의 캐릭터하에 인 간과의 교섭을 보다 긴밀하게 하고 있다. 그 호칭 정리 과정에서 “대 주로는 몸주대감 계주로는 직성대감”이란 대목이 등장하는데, 이것 이 바로 위에서 말한 ‘몸주대감 상태’라는, 즉 엑스터시(망아 상태)와 포제션(빙의 상태)이 결합된 타자적 상태 (대감신이 몸의 주인으로 들어와서 춤추고 노래하는 상태)를 직접 지목하는 부분이다. ‘직성 대감’이란 보통 웬만해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대감이라고 새기는 데, 그 우직한 성격과 기개를 느낄 수 있다. 또 일설에는 “인간의 복 과 수명을 관장하는 별”로서 몇 년마다 바뀌는 대감의 신격이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칸트의 정언명제로서의 ‘별’처럼 하나의 윤리학적 기초가 될 만하다.
그러면서도 ‘감흥’의 수준은 여전한데, 이제 본격적으로 술이라 는 매개체가 개입한다. “왜 한국인은 인사불성 상태까지 술을 마실 까?”라는 것이 쓰쿠바대학 최길성 교수가 진지하게 제기하는 쟁점 이며, 이는 ‘대감놀이’에 임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태도라고 할 수 도 있다. 밤의 문화로서 술을 상용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탈혼망아에 대한 지향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홀로 빚어서 고독주요/ 둘이 빚어서 대화주로다/ 셋이 빚으니 공 론주로다/ 뚝 떨어졌구나 낙화주로다/ 함께 빚어서 백년주야 ‘대감놀이’의 소위 약주타령의 일부인데, 이 사설은 술을 빚는 과 정을 다루고 있다. 사람수가 많아질수록 계급장을 뗀 공론장으로 초 대된다는 의미가 이채롭다. 술로 가능한 탈현실적 현실이란 얘기인 데, 민주주의와 연결될 수 있는 것이 이러한 지향의 결과이다. ‘대감놀이’의 차원을 현장에서 증언해주는 이는 바로 김금화 만신 인데, 그는 북미 인디언들과의 굿에서 이러한 소감을 남겼다. “서로 딛고 선 땅이 다르고, 얼굴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굿으로 통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소통’이며 ‘맺어짐’이 아니고 무엇일 까.(…) 서로 섬기는 신은 달랐지만 어떤 힘이 나를 그 먼 미국까지 불 러들여 우리를 포옹하게 하였다. 종교와 인종을 넘어서 인디언들의 신과 나의 신령님이 만난 것이다.” ( 《비단꽃 넘세》 218~225쪽) ‘대감놀이’에 와서 샤머니즘은 타문화의 신을 ‘대감’으로 호칭하면서 굿의 유흥성 안에서 문화적으로 친교하고 어울릴 수 있는 바탕이 만들어진 셈이다. 이러한 문화와 문화의 교류로서 샤머니즘을 적 극적으로 표현한 또 다른 이는 바로 백남준이다. 그는 1984년 도쿄 소게쓰홀에서 벌어진 요제프 보이스와의 <코요테 콘서트> 이후, 관 객과의 대화에서 이러한 ‘대감놀이’의 정신을 보다 쉽게 표현한 바 있다. 전쟁에 지친 두 부족 사이에서 신들끼리 대화주를 나눌 수 있 고, 공론주를 나눌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하 다보면 지칠 때도 되었고,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도 될 수 있는 게 인지상정이고 보면, 때로 전쟁을 쉬고, 이쪽 신(神)을 저쪽 신에게 나들이 보내서 의논도 해보고, 저쪽 신을 이쪽으로 초대해서 융숭한 대접을 드린 다음 돌려보내드리는 게 인간다운 예의라고 생각한다 는 것, 신은 인간보다 한 차원 높은 품격이니까 이것은 얼마든지 가 능하다는 것”(유준상, <내가 본 보이스와 백남준>, 《비디오 때 비디 오 땅》 도록, 1992)이라는 전제가 인간이성을 초월한 ‘대감’의 신격 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콘서트 직전에 펼쳐졌던 <굿모닝 미스터 오웰> 역시 일종의 ‘대 감놀이’라는 차원에서 볼 필요성이 제기된다. 특히 막간에 보드빌쇼 처럼 진행되었던, 뉴욕의 견우와 파리의 직녀가 위성의 방송사고를 가장하여 전개했던 코미디 ‘견우직녀쇼’는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또한 그 2년 후에 <바이바이 키플링>에서 우주왕복선의 스페이스와 분할화면으로 공존한 것은 채희아 (김금화 만신에게 내림굿을 받은 신딸) 만신의 굿판 장면이다. 미디어의 세계와 샤먼의 세계 사이를 사슬로 엮는다는 것이 백남준의 전략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다른 기 회에 이 부분을 다루기로 하겠다.
물정치의 본래적 의미
2010년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 수상자는 브뤼노 라투르였다. 그는 “현실정치에서 물정치로 : 어떻게 사물을 공적인 것으로 만들 것인가”라는 제목의 수상 연설을 한 바 있다. 그는 인간과 비인간(자 연, 기계, 동물) 사이의 하이브리드를 주장해 온 철학자인데, 그런 기 반 위에서 ‘물정치’라는 보다 확장된 정치 개념을 제안했다. 쉽게 말 해서 인간뿐만 아니라 사물까지 개입해 있는 정치이다. 그런데 이러 한 정치는 어떻게 입구를 찾아들어가서 이해해야 할까.
우선 그가 찾아낸 것은 하이데거가 해석한 물(Thing)의 의미이 다. “‘Thing’이나 ‘Ding’이라는 오래된 단어는 예전의 의회(議會)를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서유럽에서 게르만이나 색슨족의 여러 의회는 여전히 이런 물의 의미와 어원의 오래된 뿌리를 보여준다. 독일에서 ‘Thingstaatten’은 ‘물(Thing)’을 표시하기 위한 원형의 석재 구조물, 즉 스톤 헨지 같은 신전이었음을 예시한다. 그리고 보 다 단적으로 아이슬란드의 의회로서 ‘Althing’을 거론한다. 이 의회 는 대서양과 유럽의 지각표층 사이에 존재하는 황폐하고 장엄한 장 소인 단층선 위에 있었다는 것이다. 고대의 ‘Thingmen'(지금의 국 회의원들)은 바로 그 단층선 위에 놓인 테이블에서 나랏일을 논한 것이다. 이것이 물정치의 예라고 한다면, 이는 놀라운 감상을 불러 일으킨다. 왜? 바로 그 단층선의 균열 사이로 피어오르는 화산 연기 를 마시면서 진행하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히 고대 델포이 신전에서 무녀들이 지하의 화산 연기를 마셔서 ‘감흥’ 상태에서 언 어가 신과 함께 하여 신탁을 내렸다는 것과 직접 연관된다. 언어가 시적인 것은 바로 탈혼망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물정 치의 본래적 의미라면 어찌할 것인가.
브뤼노 라투르가 ‘물(Thing)’이라는 오래된 어원을 부활시키려 는 의도가 단순히 군중을 사회법칙에 따른 몽유 상태로 빠져들게 하 거나 공감의 공동체로 재규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들 자체가 잠정적이고 임시적인 (비)동의를 만들어내기 위한 장소를 호출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물로 돌아가라!” 라고 외칠 때의 그 사 물이 바로 단층선 위라는 장소이자 쟁점이 되는 셈이다. 바야흐로 물정치는 샤머니즘적인 정치로 변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샤머니 즘적인 정치의 귀환이 가능할까.
동아시아에서 이런 식의 라투르의 물정치는 낯선 것이 아니다. 극 단적인 예로 은나라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문은 현재에 이르러 동이 족의 샤머니즘적 정치를 진행한 결과라는 것이 정설이다. 대체로 “비 가 오겠습니까?” “적이 물러가겠습니까?”같은 사안들을 정치적 군 장이 묻고 신이 답하는 형식이다. 그런 문답에 개입하는 샤먼을 표현 하는 한자가 바로 ‘약(若)’이다. 갑골문이 완전히 샤머니즘의 기호학 임을 밝혀낸 석학 시라카와 시즈카에 의하면, 이 약은 “신에게 기도하 면서 춤추는 광란하는 무녀다.(…) 약이란 신이 승낙의 뜻을 표시하 는 것을 말한다.”(시라카와 시즈카, 《한자 백 가지 이야기》, 130쪽) 또한 이 약(若)이 젊은 무녀의 엑스터시 상태를 표시하는 글자라 는 사실은 ‘닉(匿)’의 글자 모양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스 무녀들은 지하의 샘물이 끓어오르는 어둡고 으슥한 곳에서 신탁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러한 무녀들의 모습을 이 ‘닉’에서 추측할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동굴 속에서 몰래 행하는 주술 의례였을 것이다.”(같은 책, 132쪽)
이러한 정치적 감흥을 아예 처음부터 채택한 황해도의 초감흥굿 은 문화와 문화의 교류가 완성형인 굿이다. 초감흥굿은 감흥신령, 즉 신들의 수장을 초청하는 굿이다. 감흥신령이 나타나면, 모든 신 이 출현한다. 그랬을 때, 신들의 민주주의가 발동된다. 감흥신령은 단군, 즉 ‘텡그리’라는 천신의 신격인데, 그 신격이 주재하는 몽골의 쿠릴타이에서 만주와 조선의 화백에 이르는 신성한 의회라고 할 수 있다. 해수계부터 시작되는 생명의 사슬을 바로 세우는 정치로서, 조요한 선생에 따르면 일찍이 이러한 감흥의 정치가 타이가 삼림지 대를 지나면서 충분히 발효되었다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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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개관을 위해 언제부터 준비했나? 2012년 12월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관을 정년퇴임하고 지난해 5월 박물관을 개관했다. 지금 나이가 60이 넘었다. 20대 때부터 박물관을 열 생각을 하고 물건을 사 모았으니 오랜 기간 준비했다고 할 수 있다. 샤먼이 돌아가실 때 물려받은 것도 있다. 소장품들은 무속인들이 사용하는 물건, 신당에 모셔진 물건 등 기본적으로 샤먼문화를 구성하는 물품들로 무신도, 무신상, 신복, 신구, 창검, 굿 제기, 촛대, 향로, 지화, 설경, 굿문서, 악기, 점도구, 부적 등이 있다. 박물관 건물은 내가 12년간 살던 집을 개조해서 꾸민 것이다.
샤먼문화는 현재 사람들의 관심에서는 많이 벗어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무속을 종교적으로 접근해야 하는가? 아니면 문화적으로 접근해야 하는가? 현재 정책적으로는 무속을 종교로 보지 않는다. 무속인을 신앙은 다 배제하고, 인간문화재로 지정해 전통문화를 이어가는 사람들, 무형문화재 전승자의 역할로만 본다. 하지만 실제로 무속인에게 신앙은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게 없으면 무속인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일반인도 무속을 미신이다, 미개하다, 우리에겐 불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본다. 무속이 우리 것임에도 불구하고 외면받고, 외래종교가 득세하는 꼴이다. 종교뿐 아니라 음식을 비롯한 모든 문화가 외래의 것으로 뒤덮여 있다. 서양의 방식이 편하고 위생적일 수는 있겠지만 그게 정답은 아닐 것이다. 그러다보니 샤먼문화가 꿈틀 거릴 틈이 없다. 그럼에도 무속이 필요할 때에는 이용한다. 예를 들어 현재 판소리는 국가에서 지정한 중요무형문화재다. 중요무형문화재라는 것은 우리가 낸 세금으로 그 문화재를 전승하는데 지원한다는 뜻이다. 판소리는 얼마 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 등재했다. 그래서 정부는 판소리를 전 세계적으로 홍보하고, 이번 소치 동계올림픽 국제페스티벌에서도 선보였다. 근데 판소리의 기원을 살펴보면 무당이 굿소리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판소리의 뿌리는 샤먼문화다. 샤먼문화는 우리 민중예술의 뿌리다. 이걸 버리고 나서 한국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런데 겉모양만 가지고 떠드는 것이다. 들추면 미개하고 타파의 대상이 된다. 한국 사회는 모든 것이 눈 감고 아옹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샤먼문화가 한국에만 있는 건은 아닌데,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한국의 샤먼문화는 어떤 특징을 가졌는지 궁금하다. 샤먼문화는 어느 문화권에서나 다 존재한다. 현재 지구상의 문화축을 크게 둘로 나누어 북에서 남으로 오는 북방설과 남에서 북으로 가는 남방설이 서로 교차한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시베리아 문화권이 북방문화의 시작이라면 히말라야 문화권이 남방문화의 정점이다. 시베리아와 히말라야축 이 양축이 있고, 그 중간에 몽골, 중국, 한국, 일본 등이 있다. 국수주의적 관점이 아니고, 샤먼문화를 학문적으로 접근하다보니 히말라야의 샤먼문화와 시베리아 샤먼문화가 합쳐지는 정점이 한국으로 밝혀졌다. 신내림을 받고 공수를 하는 것이 북방의 시베리아 문화라면 남방의 히말라야 문화의 경우 아름다운 옷을 입고 노래, 춤, 무구 활용 등 의례를 중요하게 여기며 무당이 세습된다.
남방문화를 빼고 한국 남쪽의 세습무를 설명하기 어렵다. 한국의 경우 양쪽에 문화가 다 들어와서 서로 습합된 면에서 정점이라는 것이다. 한국은 샤먼문화가 꽃을 피울 수밖에 없다. 영향을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도 자생적인 샤먼문화가 있었다. 그리고 일찍이 역사학자 최남선은 샤먼문화가 한국에서 중국과 일본으로 퍼져 나갔다고 주장했다.

샤머니즘박물관 전시광경

샤머니즘박물관 전시광경

무속인들에게 정화를 위한 자기 수련 및 수행적인 측면이 중요하다고 들었다. 불교, 기독교 등 다른 종교의 경우 승려,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수련 과정을 거친다. 무속의 경우 본인이 신들렸다고 하면 신당 차려놓고 무당이 된다. 특별히 걸러지는 과정이 없다보니 콩가루가 많다. 얼마 전 뉴스에 인간문화재 이수자가 1회에 5000만 원짜리 굿을 해 사기를 친다는 내용이 나오더라. 엉터리 무당이 많다. 하지만 제대로 된 무당들은 자기 수양의 과정으로 기도를 많이 한다. 자기 수련을 통해 억제심, 절제심을 기르면 속된 말로 영(靈)빨을 더 잘 받는다고 한다. 기도를 하러 산이나 바다를 많이 찾는데 연구된 바는 없지만 신령들이 주로 활동하는 곳이 산이나 바다, 즉 청정지역이다. 샤머니즘이 환경 문제, 생태와 연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본인의 판단에 의해 자기 수련을 한다. 무속은 관례화, 시스템화되지 않아서 한계가 있다. 사회에서 특정 종교들은 구조화된 종교로 조직적으로 움직인다. 성직자들이 성직자답게 보이도록 그런 수련의 과정을 거치게 하는 것이다.
한국의 문화를 ‘신명’, ‘흥’으로 보는데 그것이 다 굿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나? 굿이란 흥을 가지고 놀음을 하는 것이다. 사람이 아프면 흥을 돋우어서 병을 고치다. 가라앉은 기를 살리게 하는 방법이 ‘흥’이고 ‘신바람’이다. ‘신바람’은 신께서 주신 바람, 영의 바람으로 우리가 터치할 수 없는 것이다. 힐링문화도 새로운 것이 아니라 원래 샤먼문화에 내재된 것이다. 무당은 신을 부르는 사람이고 신을 잘 조절해 아픈 사람을 낫게 한다. 무속의 행위 자체가 흥을 붇돋우는 것이다.
샤먼과 예술가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앞서 얘기했듯이 샤먼의 역할은 흥을 북돋우는 데 있다. 그리고 해로운 기운은 막아내야 한다. 나쁜 기운을 잘 걸러내야 흥이 더욱 살아난다. 그리고 행여라도 차후에 끼칠지도 모를 해를 막아주는 역할도 한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삶이 더욱 풍요로워진다. 예술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미학적 측면에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정화해주는 것이다.

이슬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