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미술과 通한 사람들 – 사진, 처음 만나는 자유_신성원

spe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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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처음 만나는 자유

아나운서 신성원

무거워진 마음을 끌어안고 지낼 자신이 없을 때 카메라를 들고 나갔다. 금세 마음이 사뿐사뿐 가벼워질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카메라를 들었고 일단 나갔고 일단 셔터를 눌렀다. 그렇게 시간을 버티다 보면, 입술 끝도 살짝 올라가 있고 머릿속도 텅 비워졌다. 일에 치여 놓쳐버린 수많은 일상의 순간들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카메라에 담아내고 싶었다. 그러면서 스스로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며 감동받고 행복해 하는 지인들을 보면 내가 먼저 행복했다. 그러다가 누구도 포착하지 못했을 것 같은 아름다운 풍경을 찍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듯 뿌듯하기까지 했다. 이 오래된 습관은 사진을 좋아하던 친구와 어울리던 10년 전쯤부터 시작되었다. 셔터스피드나 조리개 수치, 심도 같은 카메라의 기술들은 잘 몰랐어도 표현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프레임 안에 담고 그것이 누군가의 마음에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건 참 근사한 일이었다. 정확하면서도 맥락에 딱 맞는 적확한 단어로 말해야 하는 방송과는 다르게 사물과 상황에 감성적으로 접근하고 표현하는 사진은 마음마저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게다가 사진에 집중하는 동안의 나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누구도 의식하지 않았고 남의 시선에 눈 돌릴 여유가 없었다. 그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할 뿐이었다. 무엇에 그렇게 몰입해본 게 얼마 만인지 몰랐다.
언젠가부터 집을 나설 때는 무조건 카메라가 동행했다. 찍고 싶은 장면은 한 번 놓치면 다시는 찍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 생긴 버릇이기도 했다. 함께 여행할 친구가 없어도 카메라를 들고 떠나면 든든했고 사진을 찍으면서 자유로웠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이름도 낯설고 지리적으로도 머나먼 나라, 쿠바다. 내가 갔을 땐 우기에 접어들 무렵인 5월이었는데, 적도 부근의 나라라서 그런지 하루 종일 뜨거운 햇빛이 쏟아졌다. 아침에 샤워를 하고 길을 나서자마자 곧바로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그 무더운 곳에서 나에겐 남보다 항상 짐 하나가 더 있었다. 카메라와 렌즈 몇 개를 넣은 묵직한 가방은 마치 달팽이의 집이나 거북의 등처럼 늘 내 등 뒤에 붙어 있었다. 그 무거운 가방을 짊어진 채로 여기저기 다녔다. 체 게바라의 도시로 알려져 있는 산타클라라에 갔을 땐 쨍쨍 내리쬐는 한낮의 태양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무려 2km를 걸은 적도 있었다. 시내 광장에서 체 게바라 기념관까지 물 한 모금도 못 마시고 걷는 그 길은 누군가에게는 짧다면 짧을 수도 있는 거리겠지만 나에겐 고행의 길처럼 느껴졌다. 안 그래도 더위에 괴로운데 무거운 카메라 가방 때문에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티셔츠는 이미 흥건하게 젖었다. 카메라 따위 던져버리고 싶었다.
이 풍경들 다 머릿속에 담아가면 될 텐데 왜 굳이 사진으로 남기겠다고 하는 건지. 스스로를 책망했다. 얼마나 좋은 풍경을 담겠다는 건지. 그리고 이 무거운 카메라가 무슨 소용인지. 스스로를 원망했다. 그래도 끝끝내 포기하지 못한 것은 그렇게 고생해서 찍은 사진들에는 나조차 잊고 있었던 내 생각과 감정들이 오롯이 투영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때의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보고 있으면 기억과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 시간과 공간에서 가졌던 생각들과 감성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돌파구가 필요했던 때,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던 열정을 다 바칠 무엇이 절실했던 때 사진을 만났다. 카메라의 파인더를 통해서 팍팍한 현실을, 지루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아름다운 풍경에 푹 빠지기도 했고, 매일 반복되는 우리네 소박한 삶의 또 다른 이면을 찾아보려 애쓰기도 했다. 사진작가 다이앤 아버스(Diane Arbus)는 “사진이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고,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허가증”이라고 말했다. 사진을 알게 되면서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을 위한 무언가에 푹 빠져보는 경험을 할 수 있었고, 다이앤 아버스의 말처럼 자유로 향하는 허가증을 갖게 되었다.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해 세상을 보는 동안만큼은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복잡했던 세상의 모든 고민은 내려놓은 채로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어서 살 것 같았다. 나는 살아있었고, 나는 자유로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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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원은 <문화공감 신성원입니다>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밤10시 라디오에서 인사하고 있는 KBS의 아나운서다. 1997년 KBS 24기 아나운서로 입사해 KBS음악실, 문화탐험 오늘, 시사플러스, 문화읽기 등 시사 교양 프로그램을 맡아왔다. 2009년 3월 <신성원의 사진일기전>을 열었고 같은 해 12월 에세이 《속삭임》을 출간했다. 얼마 전 상명대 문화예술대학원을 졸업하며 방송국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연작을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