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베르사유 작가 이우환, 외부와의 대화

베르사유 작가 이우환, 외부와의 대화

심은록  미술비평, 철학

베르사유궁은 어떻게 보면 작가에겐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나 자칫 무덤이 될 수도 있다. 장소가 가지는 역사적 상징과 규모에 압도되거나 그것과의 이질감을 극복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우환의 이번 전시는 베르사유와 작품이 서로 소통하는 장이 되었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 필자는 이번 전시에 출품된 이우환의 작품을 분석하며 작품과 공간이 나누는 대화에 귀 기울인다.

베르사유 궁전은 ‘전통과 현대와의 대화’를 목적으로 2008년부터 제프 쿤스, 무라카미 다카시, 주세페 페노네 등 세계적인 현대작가 전시를 잇달아 개최하고 있다. 첫 번째 초대작가인 제프 쿤스의 전시가 개최되자마자, 일부 프랑스인들은 베르사유의 전통과 명예를 모독한다며, 당장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소송으로까지 이어졌다. 외국의 미술애호가들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제프 쿤스의 전시는 그의 명성만큼이나 훌륭했다. 그런데 너무 훌륭해서 작품만 보이고 작품이 놓인 장소인 베르사유궁의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전시의 목적인 베르사유의 전통과 현대 미술 간 ‘대화’가 이뤄지지 않고, 단지 현대미술만의   ‘모놀로그’가 되었다. 이와 반대로 또 다른 작가의 경우에는 ‘조화’를 지나치게 염려한 결과, 그의 작품은 베르사유궁의 웅장함과 찬란함에 묻혀버렸다. 이 경우도 베르사유와 현대미술의 ‘대화’가 아니라, 베르사유의 ‘모놀로그’가 되었다.
이런 논란을 종식시키고 싶어선지, 올해는 ‘대화’와 ‘관계항’의 대가인 이우환이 초대되었다. 그러자 일부에서는 ‘대화’와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작가라 할지라도 아시아인이 과연 프랑스의 오랜 역사와 철학이 담긴 베르사유 궁전을 이해할 수 있느냐는 회의가 일었다.
6월 17일, 마침내 <이우환 베르사유(Lee Ufan Versailles)전>(6.17~11.2)이 막을 올렸다. 까다로운 입맛과 날카로운 혀를 지닌 프랑스 미술애호가들은 감탄했다. 베르사유도 보이고 작품도 보이기 때문이다. 이우환의 작품은 노쇠하고 무거운 베르사유에 생동감과 젊은 역동성을 주었고, 베르사유는 작품에 장엄함과 신비를 더해 주었다. <이우환 베르사유전>에는 총 10점 (실내 1점, 실외 9점)이 설치되었으며, 작가는 관람객들의 동선을 세심하게 고려하여, 작품을 정원을 산책하면서 자연스럽게 감상하도록 배치했다. 이 글에서는 이우환의 ‘외부와의 여러 가지 대화법’ 가운데, <관계항-솜의 벽>을 통해서 ‘전통과 역사’와의 대화법을, <관계항-베르사유의 아치>와 <관계항-바람의 날개>를 통해서 ‘자연’과의 대화법을 살펴 보도록 하겠다.

전통과의 대화법 : <관계항-솜의 벽>

<관계항-솜의 벽>은 베르사유 궁전의 가브리엘 건물(Aile Gabriel) 내에 있다.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설계된 이 건물에 들어가면, 멀리 이 작품과 그 배경인 내부건물이 보인다. 내부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으며, 위층에는 모던하고 여성적인 이오니아식 원주(colonne)들이 있고 이 원주 가운데에 가브리엘 천사의 조각상이 있다. 아래층에는 모던하고 남성성이 표출되는 도리아식 원주들이 있고, 이 대리석 원주들 한가운데 이우환의 솜으로 된 원주 하나가 세워져 있다. 솜으로 된 원주 꼭대기에는 커다란 돌이 마치 주두장식인 것처럼 가뿐히 앉아 있다. 그리스로마의 건축양식에서 주두장식은 시대적 특징과 성격을 반영하면서 서로를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루이14세의 유명한 두 왕실건축가 루이 르 보(Louis Le Vau)와 쥘 아르두앙 망사르(Jules Hardouin Mansart)에 의해 지어진 베르사유의 건물 외부는 대부분 프랑스식 고전주의 양식을 따른다(반면에 내부는 대부분 바로크적 양식이다). 루이15세의 왕실건축가 앙주-자크 가브리엘(Ange-Jacques Gabriel)은 이러한 프랑스식 고전주의 양식을 이어받으면서 또한 모던한 요소를 가미하기 위해,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가브리엘 건물’을 설계했다. 프랑스식 고전주의나 신고전주의 양식은 시대를 초월한 절대적이고 영원한 미(美)의 표상인 그리스로마 양식의 정신을 되살리자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모던하고 날렵한 모양의 그리스로마 양식 원주가 세워졌다.
<관계항-솜의 벽>에 가까이 다가가면, ‘원주’라고 여긴 것이 사실은 ‘벽’의 한 단면이었음을 바로 깨닫게 된다. 이렇게 ‘벽’을 ‘원주’로 착각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작가의 거듭된 숙고를 거친 의도 때문임에 틀림없다. 가브리엘 조각상을 가운데 둔 도리아식 원주와 이오니아식 원주가 정면으로 보이는 바로 그 위치에서만 <관계항-솜의 벽>은     ‘원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위치에서 단지 몇 도만 방향을 바꾸거나 조금만 위치가 바뀌었어도 그런 인상을 받을 수 없다. 특히, 기존의 원주들이 없었다면, <관계항-솜의 벽>은 이러한 사고로 이끄는 암시를 줄 수 없었을 것이다.
<관계항-솜의 벽>은 허물어진 벽의 모습이다. 그리스나 로마의 유적지에 가보면, 원주들은 세월의 폭풍을 견뎌내고 서있지만, 건물들의 벽은 거의 온전한 것 없이 무너져 있다. 바로 그 허물어짐에서 영원성이 보인다. 금방 신축된 완벽하고 튼튼해 보이는 건물에서는 오히려 영원성을 느낄 수 없다. 반대로, 허물어져 일부만 남아있는 성의 폐허나 고대 조각들을 보면 먹먹할 정도의 영원성이 느껴진다. 존재성 혹은 현존성이 그만큼 사라지면서, 시간, 자연, 영원성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의적인 느낌이 ‘솜이라는 가벼운 존재성’과 ‘영원성의 자취인 허물어진 벽’ 그리고 이미 ‘영원의 시간을 겪은 자연석’으로 재현되었다. 더욱이 <관계항-솜의 벽>이 그리스로마의 초월적이고 영원한 미를 표상하는 신고전주의 양식 건물과 원주들 사이에 놓여 있기에, 이러한 양의적인 감성은 더욱 극대화 된다.
육중한 돌이 가벼운 솜 위에 가뿐히 앉아 있는 이 작품은 ‘트릭’을 사용했다. 이러한 종류의 작품은 이우환 조각의 초기 스타일이다. 비슷한 스타일이라고 할지라도 그 느낌과 효과는 전혀 다르다. 예를 들어, 이번 베르사유 전시 출품작에 철봉과 자연석을 사용한 <관계항-거인의 지팡이>가 있는데, 이는 나오시마의 이우환 미술관에 있는 작품과 같은 종류의 마티에르를 사용한 같은 이름의 연작이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이 같은 이름을 지니지 않았다면, 연작임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느낌이 사뭇 다르다. 이에 대해, 이우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동일한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내 작품을 포함하여 모노하 작가들의 작품은 공간이나 위치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모노하 작가들의 예전 작품을 그대로 재생하거나 복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대와 장소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대로, <관계항-솜의 벽>이 비록 작가의 초기 조각 스타일을 연상시킨다고 할지라도, 이 작품은 ‘이곳 현재(sic et nunc)’에서만 가능한 기능을 한다. <관계항-솜의 벽>뿐만 아니라 베르사유의 모든 작품이 이처럼 ‘이곳 현재’라는 시공간성과 관련하여 기능하고 있다. 이는 베르사유 전시에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모든 곳에서 그가 전시해 온 방식이다.

자연과의 대화법 : <관계항-베르사유의 아치>, <관계항-바람의 날개> 그리고 ‘대운하’

베르사유의 정원으로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작품 <관계항-베르사유의 아치>(이하, 아치)가 보인다. 높이 12미터와 길이 30미터의 스테인리스스틸로 된 아치의 양 끝에는 두 개의 자연석이 놓여 있다. 아치 밑에는 아치와 똑 같은 크기의 스테인리스스틸이 긴 융단처럼 바닥에 깔려있다. 정원 초입에 있는 스테인리스스틸 융단에 서면, 저 멀리 정원 끝에 있는 또 다른 스테인리스스틸 융단이 보인다. 사실, 후자는 융단이 아니라 앙드레 르 노트르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 대운하이다. 스테인리스스틸 융단과 대운하 사이의 간격이 상당히 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놀라울 정도로 모양과 색감이 일치해 대운하가 또 다른 스테인리스스틸 융단이라고 착각할 만큼 비슷하다.
<아치>와 ‘대운하’ 중간에는 ‘녹색융단’이라고 불리는 푸른 잔디밭이 있고, 그 위로 이우환의 또 다른 작품
<바람의 날개>가 펼쳐져 있다. 40개의 거대한 스테인리스스틸로 구성된 이 작품의 반(20개)은 잔디밭 위에 누워있고, 또 다른 반은 세워져 있다. 미풍처럼 혹은 잔잔한 물결처럼 부드럽게 굴곡진 스테인리스스틸 판들은 아치에서 운하를 오가는 바람의 움직임을 시각화한다. 이처럼 이우환의 작품은 정원이 시작되는 <아치>에서부터 <바람의 날개>를 타고 정원 끝에 있는 ‘대운하’까지 3부작(triptyque)처럼 밀접하게 연결된다.
아치의 양끝에 있는 자연석처럼, 이우환의 조각은 언제나 자연에서 가져온 돌을 원래 상태 그대로 전시해왔다. 전시장에 자연을 그대로 옮겨다 놓았으면서도 그는 이를 ‘ready-made’(여기서는 ‘자연에 의해 이미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re-made’(‘다시 만들어진 것’)이라고 강조한다. “사람의 시선이 갔다는 것은 이미 순수하게 자연 그 자체라고 할 수 없는데, 더욱이 자연을 전시장에 옮겨다 놓았으니 이는 re-made이다”라는 작가의 설명은 슈뢰딩거의 유명한 가설 ‘동시에 살아있고 죽은 고양이’를 떠오르게 한다. 사람이 자연을 볼 때, 본다는 그 행위로 인해 자연(슈뢰딩거에 의하면 ‘양자’)과의 관계가 발생하며 자연(‘양자’)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자역학자의 고민과 똑같이, 그는 보기 이전의 자연을 어떻게 표현할 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왔다. ‘대운하’가 비록 앙드레 르 노트르에 의해 만들어졌다고는 하더라도, 이번 전시에서 이우환은 자연을 옮겨오지 않고, 있는 상태 그대로 자신의 작품에 개입시켰다. 이로 인하여 그가 바라던 것이 어느 정도는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가 조각에서 ‘자연’(자연석)을 차용해왔듯이, 이번에는 베르사유의 ‘대운하’를 그의 작품으로 그대로 차용하면서, 거대한 3부작인 <관계항-베르사유의 아치>, <관계항- 바람의 날개> 그리고 ‘대운하’가 성립되었다.
이 글의 도입에서 언급했듯이, 베르사유 현대미술전에서 ‘전통과 현대미술의 대화’가 그렇게 힘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더욱이 베르사유 현대미술전의 초대 작가인 제프 쿤스도 그의 예술목적이 ‘소통’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제프 쿤스의 ‘소통’과 이우환의 ‘대화’는, 비슷한 뉘앙스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이렇게 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왜일까? 이우환 작가에게 서구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소통’과 이우환이 말하는 ‘대화’의 차이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Communication(소통)’은 ‘community(공동체)’에서 나온 말이니까 공동체 내부의 일을 암시한다. ‘Communication’이란 community의 ‘identity(정체성)’로서 이미 공통견해를 공유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이뤄진다. 그래서 이는 ‘common sense(상식)’는 되지만 공동체 밖의 세계, 타자와 통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correspondence(조응)’는 공동체 내부에 국한되는 ‘dialogue(대화)’가 아니기에, 서로의 의견을 일치시킨다거나 어떤 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서구적인 표현으로 ‘dialogue’라고 할 때는 또 다른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긴다. 여기 사람들의 대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화’하고는 또 다른데, 서양에서 ‘dialogue’는 ‘monologue’에서 나온 것으로, ‘monologue’가 깨진 상태가 ‘dialogue’이다. 에고(ego)가 깨진 상태에서 오는 것이 ‘dialogue’이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말하는 ‘대화(對話)’는 서로 대(對)하고 마주하고 말하는 것(話)이기에, 서로가 대면하는 그 자체가 중요하고, 처음부터 에고(ego)가 전제되지 않기 때문에, 에고가 깨지거나 답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제프 쿤스의 ‘소통’의 경우와 관련해서 미셸 푸코의 설명을 추가할 수 있다. 푸코는 사람들이 담론하는 경우 정치적이며 전략적인 미세한 권력(pouvoir)이 작용한다고 했다. 소통하면서 상대를 설득하여 화자의 의도를 상대방이 받아들이게 하거나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우환의 경우에는, 상대에게 영향력을 끼치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개별성을 존중하면서 ‘대화’하고 ‘관계성’을 가진다. 관계를 맺으면서도 개별적으로 남을 수 있는 미묘한 상황에 대해, 타자성에 대해 늘 고민해온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관계는 그 자체에 의해 타자성을 뉴트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유지한다. 타자로서의 타자는 우리가 되거나 우리의 것이 되는 오브제가 아니다, 반대로, 자신의 신비 속으로 들어간다.”
이우환의 조각은 오브제로 환원되지도 않으면서, ‘돌은 돌대로’, ‘철판은 철판대로’ 존재이유를 드러낸다. 이번 베르사유의 전시에서도, 그의 조각품은 조각품대로, 베르사유 정원은 정원대로 존재케 하면서, 관계에 의해 서로의 타자성을 뉴트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서로의 신비 속으로 초대되어 들어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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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um-Wavelength Space> 철 150×500×1.5cm (세로설치, 총20점)/150×24320cm(바닥설치, 총20점) 2014

맨 위 이미지 <Relatum-Wall of Cotton> 바위 솜 270×40cm(솜에 싸인 벽) 30×30cm (바위, 각, 2점) 2014 이번 출품작 중 유일하게 실내에 설치되었다. 1969년에 제작된 <Relatum-System> 연작을 변형한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