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청년 작가들이여, 변화를 읽어내자

contents 2014.02. Special Feature | 청년 작가들이여, 변화를 읽어내자
한국의 미술은 지난 몇 십 년간 매우 압축된 역사를 경험했다. 소위 현대미술과 관련하여 한국은 1930년대 일제
강점기 선전(鮮展)부터 1950~1960년대의 모더니즘 미술, 그리고 1970년대의 실험적 아방가르드와 1980년
대의 정치적 미술, 그리고 1990년대 이후부터 시작된 국제적 동시대미술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미술이 보여준 궤
적은 매우 강렬하고 급진적인 것이었다. 나는 최근에 한국의 동시대미술이 1990년대 중후반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
다고 말한 바 있다. 그 이유는 ‘동시대성(contemporaneity)’이 본질적으로 전 세계에 걸친 예술적, 창조적 동시성
(synchronism)을 전제로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시대미술은 전 세계의 지역(local)들이 상호 연결되면서 최
대한 동등하고 호혜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낸다는 전제가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한국미술이 한국 현지에서 국제
미술의 흐름과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시작한 계기를 1995년의 <제1회 광주비엔날레>라고 본다면, 이후부터 본격적
인 동시대성이 추동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동시대성에 대해 이렇게 장황하게 말하면서 이 글을 시작하는 이유
는 ‘젊은 작가들’에 대해 언급하려면 한국 현대미술의 ‘압축적 성장’과 ‘동시대성’이라는 이슈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
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압축적 성장과 동시대성은 미술만의 이슈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의 사회,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부분에서 거론되어야 할 이슈이기도 하다. 젊은 작가들이란 이러한 압축적 변화와 동시대성을 대면하
면서 수많은 모순과 갈등, 압박과 가능성 등을 동시에 경험하는 연령적 ‘계층’이다.한국의 동시대미술은 역시 지난 15년 남짓한 기간에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국제적인 무대에서 활동하는 작가 수
가 늘었을 뿐 아니라 정보, 이동, 전시, 학술, 인프라, 프로그램 등에서 많은 지원과 신설이 이루어졌다. 특히 인프라 부
문에서 통신 인프라인 SNS와 세계 각국의 레지던시를 연결하는 공모체제가 구축된 것은 엄청난 변화라고 할 수 있
다. 우리는 전례 없이 많은 예술가가 배출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수의 시각예술가가 현장에서
활동하는 시대가 되었다. 제도적으로 많은 개선이 이루어진 것만큼이나 인정제도 안에서는 커다란 경쟁적 상황이
형성되었다. 게다가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할 정도로 ‘교육 받은’ 관객과 대중을 상대해야 한다.
전시 상황에서 조우하게 되는 관객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전문가마저 뛰어넘는 식견과 경험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
므로 예술에 관한 한 과거 예술가들이 취할 수 있었던 ‘계몽적’ 태도는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다. 2014년을 벌써 한 달
가까이 보내면서 ‘젊은 세대’라는 화제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들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동시대미술은 이제 다시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둘째, 한국은 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의 주요 문화 콘텐츠 생산국가가 되었다.
셋째, 모방이나 참조가 아니라 우리가 선택하는 삶의 양상이 그대로 전범이 되는 자발적 생산구조가 떠오르고 있다.
동시대 패러다임과 미술계 구조적 문제점
첫째로, 동시대미술은 앞서 말했듯이 세계 내에서 확보된 ‘동시대성’을 전제로 한다. 통신과 이동의 포화를 통해 이러
한 동시대성이 극대화되면 그때부터는 동시대성의 내부를 조직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유형의 창조적 생산을 이끌어
내는 노력이 시작된다. ‘공동체’란 이 과정에서 새롭게 규정되는 조직의 양태, 혹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다양한 레이어의 공동체들이 만들어질 것이며 예술가 및 예술 전문가들 역시 이 과정에서 강력한 에이전트 역할을
담당하게 되리라 생각한다. 즉 다가올 동시대성은 더욱 유기적이고 복합적인 관심과 관점들에 의해 수많은 결절
청년 작가들이여, 변화를 읽어내자
유진상 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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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ds)을 만들어내면서 더욱 흥미로운 현장을 만들어낼 것이다. 협업, 창업,
공유와 같은 키워드들이 예술가들에게 더욱더 중요하게 다루어지리라 생각
한다.
두 번째로, 한국은 매우 독특한 문화적 파생물들을 생산하고 있는 다소 예
외적인 후기-자본주의 국가 가운데 하나다. 일본과 더불어 한국은 아시아에
서 대중문화에 기반을 둔 강력한 문화 콘텐츠들을 생산하고 있다. 이러한 콘
텐츠들은 보통 소모적이고 수준이 낮은 문화생산물들로 치부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이러한 문화적 생산구조가 미디어 및 산업과 결합해 이루어내는
파급력이 강하고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실험적 파생물들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나는 젊은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필드를 넓힐 것이라고 생각한
다. 실제로 대학을 나와서 모든 졸업자가 재래적 의미의 작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만큼 선발의 규모가 크지 않
을 뿐 아니라 시장도 성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시장은 앞으로 더 성장할 수 있겠지만, 전통적인 예술 재래시장이
아닌 새로운 파생시장들이 만들어질 것이다. 이를 어떻게 예측하고 가시화할 것인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준은 관
객, 대중, 시민이 될 것이다.
세 번째로, 한국은 국적일 뿐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사용해야 할 ‘그릇’이고 그것을 통해 삶의 최대치
를 구현해야 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우리는 간혹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서구
에 대해 가장 부러워한 것은 그들이 정말 ‘재밌게 논다’는 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까지 그들이 노는 방식을 따라
하고 모방해 온 것이다. 심지어 제 3세계의 미술, 음악, 인문대학에서는 제도적으로 서구가 발전시켜 온 ‘즐거움의 생
산’을 교육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당위’로서 내면화했다. 결국 가장 잘 노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여기서 ‘이긴다’는 표현은 내셔널리즘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승부를 의미한다기보다는
스스로에게 부과했던 종속변수로서의 정체성을 자신도 모르게 극복하는 것이며, 나아가 각자의 존재가 스스로 세계
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우리의 삶을 멋진 스타일로, 쿨한 태도로 내면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나아가서
이를 압도적이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멋진’ 문맥들로 보여주어야 한다. 예술가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에 초점을
두는 것은 답이 아니다. 살아남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삶의 본질적 과제다. 예술을 선택한다는 것은 생존을 훨씬
넘어서는 과제를 추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반면, 이러한 패러다임 속에서 젊은 세대들이 직면하는 주된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 각각의 개별 세대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시스템이 여전히 불충분하다. 모든 세대는 가치부여(miseen-
valeur) 혹은 인정(recognition)의 시스템을 필요하다. 그것이 없다면 세대는 내부로부터 붕괴되거나 외부에
의해 몰인정의 상태에 놓일 것이다. 가치부여는 시선, 감탄, 선발, 비평적 인정, 토론, 유통, 재인정 등의 과정을 통해 조
금씩 공동체 내의 확신과 승인을 얻어가는 과정이다. 우리 사회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독일이나 러시아처럼 모든
관심이 정치, 사회, 경제적 문제들에 몰려있는 독특한 전방(前方) 국가형 사회다. 이념적 투쟁이 모든 화제의 중심이
된다. 따라서 가치가 이념적, 윤리적, 도덕적 가치로 수렴되는 상황 역시 가치의 분열을 초래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젊은 세대’라는 화제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들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동시대미술은 이제 다시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둘째, 한국은 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의 주요 문화 콘텐츠 생산국가가
되었다.
셋째, 모방이나 참조가 아니라
우리가 선택하는 삶의 양상이 그대로
전범이 되는 자발적 생산구조가
떠오르고 있다.”
개인이 이러한 가치를 내면적인 최고치로 받아들일지 불분명하기 때문이
다. 한국에서 예술의 가치부여 체제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미국이나 유럽과
같은 예술적 가치에 대한 공동의 이해가 수립되어 있는 국가들에서와 달
리, 예술가들 스스로 자신들이 생산하고자 하는 가치를 규명하고 강요하는
어려운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두 번째로, 이러한 예술적 가치 생산을 지원하고 따라잡는 재정적 선순
환구조가 부재한다. 그리고 선순환구조는 예술시장에 의해 해결되어야 한
다. 나는 예술이 공공지원에 의존하는 상태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또한 예
술시장은 즐기는 시장이지 언제까지나 버텨야 하는 시장이 아니다. 예술시
장이 답답한 콘텐츠들로 채워져 있다면 이것은 대학이나 현장을 통해 시급히 바뀌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무엇이 흥
미로운 것인지에 대한 공감과 인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예술에는 답이 없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서로의 얼굴만 바라
보고 있을 수도 없다. ‘미술판’은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수 십 혹은 백 개 이상의 서로 다른 ‘판’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
시아프>와 <공장미술제>는 서로 다른 ‘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울만 해도 문래동, 연희동, 상수동, 사간동, 평창동,
청담동 등은 전혀 다른 풍경의 판들을 만들어낸다. 한 사회의 미술은 이렇듯 다양한 ‘판’들이 연결되고 겹쳐져 있음으
로써 훨씬 풍요롭고 다양한 취향과 태도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된다. 문화와 역사, 지역과 계층, 교육적 출신성분과 또래
집단의 형성 과정, 시장의 특성과 제도적 지원 방식에 따라 이러한 판들은 전혀 다른 세계들을 만들어낸다. 20세기 초
파리 몽마르트르라는 작은 지역에는 약 500여 개의 서로 다른 집단이 상이한 판들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유럽과 북남미를 중심으로 세계 각국에서 모인 예술가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이었다고는 하지만, 현재 한국의 미술풍
경 안에서도 이에 못지않은 다양하고 뜨거운 판들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나는 이들이 관객들에게 자신들의 가치를
강요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시민들이 재정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는 수준 높고 흥미로운 예술이 범람하게 되
길 바란다.
1990년대 초에 홍대 앞의 바에서 매일 저녁 만나던 작가들이 생각난다. 이들은 지금 50대의 중진작가들이 되었으
며 여전히 바에서 만나고 있다. 이들과 함께 한 세대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내게는 커다란 기회이자 즐거움이다.
나는 청년작가들 역시 그들만의 행복하고 흥미진진한 세대를 만들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하기 위해
서는 변화를 읽어내고 그것을 즐겨야 한다는 점을 말해주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