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이슬람미술의 역사

전완경 (1)-누끼

〈Page of Nasta‘liq Calligraphy〉 Opaque watercolour, ink, gold on paper 42.3×28.8cm Burhanpur, India(Historic Hindustan)1631~1632 1659년 다라 쉬코우 왕자의 사인이 있다 사진제공 Aga khan museum

전완경 부산외국어대 아랍어과 명예교수

622년 공식적으로 이슬람이 출현하기 이전에 아랍인은 예술이라고 부를 만한 그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아름다운 장식으로 사용되는 아랍문자 이외에는 미술에 공헌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비록 문자를 가지고 있던 까닭에 비문이 세워지기도 했지만, 책이나 문헌을 만든 것 같지는 않다. 사실 아랍인 대부분이
유목민이었으므로 기념비적인 예술을 만들 환경을 가질 수도 없었다. 이슬람은 초기의 기독교와 달리 시각예술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슬람이 출현하고 예언자 무함마드와 이후 정통 칼리파 시대(632~661)의 지도자들은 메디나가 이슬람 중심지로 확고히 자리 잡도록 노력했으며, 아라비아 이외의 지역으로 이슬람을 전파하는 데 바빠 다른 일에는 신경 쓸 여념이 없었다. 때문에 이슬람 공동체의 확대와 더불어 건축물의 건립과 장식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한 사람은 비잔틴, 콥트, 사산, 중앙아시아인 등 정복지의 숙련된 장인과 예술가들이었다. 당시 예술가들은 다양한 국적을 갖고 있었으며, 반드시 이슬람 신자였던 것은 아니다.
초기의 이슬람미술가들은 고유의 회화 전통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비잔틴제국과 사산제국 등 정복지역의 문화가 제공하는 모델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점차 비잔틴제국이나 페르시아 회화가 아닌 그들 자신의 예술로 만들어갔다. 즉 이슬람문명에 공헌한 모든 문화의 전통을 새롭게 결합한 것이다.
우마이야 왕조(661~750) 시대에 비로소 이슬람건축양식이 확립됐다. 이슬람 초창기부터 비교적 단순한 구조를 갖고 있던 사원(모스크)에 이슬람의 상징물이 다수 소개됐다. 안뜰, 첨탑(미나렛), 설교단, 벽감(미흐랍), 분수대, 마끄수라(VIP Room), 돔 축을 이루는 본당 회중석 등이 이슬람 사원의 특징물로 자리 잡았다. 특히 기독교 신자들이 사는 지역에서는 그들을 압도하기 위해서 모스크를 더욱 큰 규모로 지었다.
건축학적으로 볼 때 모스크에는 기독교 교회나 성당과는 판이한 특징적인 요소들이 있다. 모든 모스크는 메카의 카바 신전을 향해서 세워졌다. 무슬림들은 메카를 향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횡대를 이루어 길게 도열해 예배 의식을 거행한다. 이러한 배치는 메카를 향해 벽면에 가깝게 자리 잡으려는 욕구의 반영이며, 이슬람에서 절대적으로 지향하는 평등성에도 부합하는 행위이다. 자연적으로 모스크는 가로가 길고 세로는 짧은 구조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이 같은 건축 분야와는 달리 금속 세공, 직물 직조, 필사본 채색 등 장식미술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거나 빈약하다. 이슬람 시대에 처음 등장하는 회화는 의학 논문, 동물에 관한 책 그리고 서정시집 몇 권 등 제한된 범위 내에서 그려진 삽화들뿐이다. 그나마 이것도 이런 특정한 주제에 삽화가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의학 같은 과학서적에는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이 삽입돼야 했다.
무슬림 종교 그림은 14세기 초가 돼서야 출현했다. 최고의 완성품이자 오리지널 그림은 1330년부터 1550년 사이에 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8세기부터 13세기 동안 이슬람 세계에서 회화가 걸어온 운명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예언자 언행록에서 그림을 금지하고 혐오하는 내용이 많이 전해져 내려왔고 또 이슬람 신학자 대부분이 인간과 동물의 재현은 신神만의 특권이며, 그것을 그리거나 만드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생물의 상을 만든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미술가가 오직 신만이 가능한 창조행위를 빼앗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생물에 영혼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신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언자를 포함해 그 어떤 사람과 동물, 심지어 신이나 천사의 형상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도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화가들은 이슬람 초기부터 우상숭배 전통과 전쟁을 벌인 사상가와 문인들과는 달리 고상한 지위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회화의 전통은 이슬람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믿는 화가들에 의해 유지된 것이 분명하다.
대신 무슬림은 기하학, 식물, 자연경치, 서예 등을 이용한 장식으로 눈을 즐겁게 하는 미술을 발전시켰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타지마할의 벽면은 여러 가지 색깔의 보석을 사용해서 대리석에 기하학적 문양과 꽃문양을 새겨 넣은 아라베스크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례이다. 건축 장식, 조각된 나무와 돌 표면, 색칠한 표면과 도기, 유리, 금속공예, 제본, 도서 채색, 이슬람 카펫 등 다양한 장식에서 아라베스크가 발견된다.
필사자는 당시 이슬람 신자에게 아주 명예로운 직업이었다. 특히 코란의 필사본은 무척이나 신중한 계획 아래 작성되었고, 선 하나하나에도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8세기에 발생하여 가장 칭송받는 예술이 된 서예는 예루살렘에 있는 바위의 돔 사원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비문碑文의 형태이긴 하지만 분명히 장식적인 기능을 보여준다. 이처럼 장식적인 아랍어 명문을 만드는 전통은 이슬람 초기 건축물은 물론 후대의 수많은 건축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모스크에서 아랍어 문자는 일반적으로 돔 아래나 벽감 주변 또는 출입구 주위에서 발견된다. 이 서예야말로 오롯이 이슬람적인 예술이며, 이슬람회화에 끼친 영향도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무슬림은 인간과 동물의 재현을 통해 표현할 수 없는 미학을 나타낼 경로로 서예를 선택했다. 아마도 서예가 단 하나의 순수 아랍예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아랍어 글자는 장식적 디자인에 크게 한몫 차지하면서 이슬람미술에 하나의 강력한 모티프가 되었으며, 심지어 종교적인 상징이 되기도 했다.
압바스 왕조(750~1258) 시대는 이슬람문명의
전성기였다. 이 시기에 지어진 것 중 이슬람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물을 살펴보면, 장식이 무척 화려했음을 알 수 있다. 터키 이스탄불의 사원과 궁전의 내부는 마치 화려한 색채의 꽃으로 꾸며진 화원과도 같다. 톱카프 궁전 타일의 장식 도구에도 꽃문양이 많이 쓰였다. 14세기 중후반에 완성된 스페인 그라나다 지역의 알함브라 궁전은 외부에 비해 내부를 지나치게 호화롭게 장식했다. 궁전의 벽은 타일과 치장벽토 세공의 조화를 보여주는데, 이곳을 본 사람은 누구나 그 복잡성에 놀라게 된다. 내부는 추상적인 선線 요소 그리고 아라베스크(포도나무 덩굴손 등 고대의 잎사귀 디자인을 채택하고, 이것을 아라베스크라는 새로운 형태의 장식으로 발전시킨 사람들이 바로 아랍인들이다. 한마디로 아라베스크는 이슬람세계의 예술과 밀접히 연관된 무슬림 예술의 형태이며, 이슬람 장식미술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와 아랍어가 결합된 장식적인 형태의 커다란 아랍어 서체로 치장됐으며 아울러 기하학적 형태의 타일도 함께 볼 수 있다.
고대부터 장식 디자인과 색채 전문가로 인정받는 페르시아인들은 이 시대에 이슬람의 산업공예가 높은 우수성을 자랑할 수 있도록 발전시킨 주인공이었다. 이 시대에는 특히 카펫이 크게 발전했다. 본질적으로 이슬람미술에 속하는 카펫의 디자인으로는 사냥하는 모습과 정원 풍경이 선호됐으며, 염색에는 명반이 사용됐다. 이와 같은 동양풍의 카펫은 르네상스 이후부터 유럽의 회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흔히 파랑, 초록, 빨강, 노랑 중 두 가지 색조를 선택해 채색하고, 중앙은 기하학적 문양으로, 가장자리는 아랍어 서체로 장식했다.
한편 기하학적 문양 이외에도 인간의 형태나 동식물을 그려 넣은 세라믹이 장식적 스타일의 아름다움을 획득했다. 또 페르시아로부터 다마스쿠스에 소개된 타일은 전통적인 꽃문양으로 꾸며져 건물 내/외부 장식에 쓰였고, 모자이크와 함께 큰 인기를 끌었다.
유리와 도기 등 공예분야는 이 시대에 특히 페르시아, 이집트 그리고 시리아를 중심으로 최고조에 이르면서 일상생활 도구를 창의적이고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만들어갔다.
은이나 금으로 만든 그릇을 성당 예식에 사용한 기독교사회와는 달리, 이슬람사회의 사원에서는 그런 물건이 필요하지 않았다. 때문에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공예품은 모두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던 사치품들이다. 이슬람의 도공들은 다른 분야의 장인들과 마찬가지로 색과 질과 문양 같은 외형적 장식을 선호했다. 이처럼 정교한 외형에 대한 선호는 이슬람미술을 특징짓는 불변의 요소 중 하나이다.
13세기는 이슬람 역사의 분수령이었다. 몽골인이 이슬람 세계를 침공해서 예술의 중심지들을 약탈하고 파괴했으나 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슬람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이들을 통해 주제의 처리, 여러 색으로 칠한 불사조, 정교하게 그린 나무와 꽃 그리고 물 등 분명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극동의 사상과 예술이 이슬람 세계로 전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카이로의 맘루크 시대에는 금속 공예품의 생산이 증가하고 상감 세공기술의 발달도 두드러졌는데, 아랍어 서체와 문장 화법이 주요 장식 테마로 이용되었다. 카펫 중에는 특히 적색 바탕에 별, 삼각형, 팔각형 등 기하학적 문양을 넣은 디자인이 발달했다. 맘루크 술탄들의 후원하에 만들어진 세밀화는 대단히 아름다웠고, 이는 14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다. 세밀화 속 인물들은 일반적으로 인형 같고, 그림은 해설적이라기보다는 눈에 띄게 장식적이다.
세밀화 부분에서도 새로운 양식이 나타났다. 페르시아와 중국의 화가들이 양식과 기술을 교환하면서 양측이 모두 좋은 결실을 얻은 것이다. 이때부터 다양하고 깨끗한 채색이 무슬림의 그림에 도입되었고, 극동의 요소가 가미되어 풍경, 특히 바위・나무・구름 등이 혼합됐다. 그래서 15세기와 16세기에 제작된 세밀화는 티무르 왕실의 옥외문화를 고증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5세기 후반기에 가장 특징적인 사건을 들자면 몇몇 화가가 처음으로 작품에 서명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5세기에 들어서면서 이슬람 세계에서 세력을 확장한 오스만인은 지중해와 중동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특히 이 시대에 여전히 최고의 예술로 평가받은 서예와 세밀화 분야에서 큰 진전이 있었다. 오스만제국의 그림에 보이는 독특한 사실주의는 사실주의적인 화풍으로 발전했고 초상화에 커다란 관심을 보인 무굴제국의 그림과 경쟁 구도에 놓였다.
16세기 중반에 터키와 페르시아, 양쪽 모두에서 필사본 서적을 후원하는 위대한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 이후 이슬람 세계의 회화는 분명히 쇠퇴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금속공예, 직물, 타일, 유리병, 비단, 카펫 산업이 발전한 것과는 다른 점이다.
17세기 이전 페르시아 회화는 유럽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러한 영향은 17세기 중반 유럽인과 페르시아 화가들이 직접 접촉하면서부터 한층 강화됐다. 그러나 이는 결국 페르시아 회화에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 페르시아 화가들이 빛과 음영을 적용한 유럽의 원근법과 입체 표현을 시도했지만,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림 속 인물들은 옛 페르시아 세밀화보다 커 보이지만 생생한 느낌을 주지 못했으며, 함께 먹고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도 마치 긴장한 듯 어색해졌다.
당시 오스만 화가 중 한 사람인 레브니는 술탄의 딸 결혼 축제행사를 묘사한 걸작을 남겼다. 그러나 유럽 화단의 강력한 영향을 받았기에 결국 오스만 회화의 특성을 완전히 파괴하는 등 진통이 이어졌다. 이처럼 이슬람미술을 만들어낸 가치들은 이슬람 세계의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점차 사라지고, 서구의 개념과 기법에 압도되었다. ●

알 하산 이반 알 아라브샤 (Al-Hassan Ibn al-Arabshah) ‘카산의 메이단 모스크의 미흐랍 (Mihrab of the Meidan mosque in Kashan)’ Glazed and painted Listre ceramics 1226 Staatliche Museen Beriln 소장

알 하산 이반 알 아라브샤(Al-Hassan Ibn al-Arabshah ‘카산의 메이단 모스크의 미흐랍 (Mihrab of the Meidan mosque in Kashan)’ Glazed and painted Listre ceramics 1226 Staatliche Museen Beriln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