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광주비엔날레 2014 – 냉정과 열정 사이, 차갑고도 뜨거운

정현  미술비평

한 해 걸러 비엔날레가 다가올 때마다 나는 처음으로 광주비엔날레를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기억에 취했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비엔날레를 떠올리면 마음이 심란해지기 일쑤다. 생각해보면 1990년대 비엔날레를 관람한다는 것이 특권처럼 느껴진 적이 있었고 한국에서 세계적 작가들의 작업을 보는 쾌감도 남달랐다. 세계화를 표방한 문화 정책에 의해 설립된 광주비엔날레는 한국을 넘어 다른 세계, 문화, 이야기를 경험할 수 있는 통로였기 때문이다. 1990년대가 문화 제도화의 밑그림을 그리던 시기였다면 2000년 이후 미술계는 본격적인 세계화의 좌표를 추적하기 시작했고 양적으로 팽창한 미술계는 금융자본 붕괴 이후 정체기를 맞이했다. 21세기 이후 아시아를 비롯한 비서구권 국가들이 경쟁하듯 비엔날레를 창설한 이후부터 비엔날레는 세계 문화지형도를 움직이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고 이른바 ‘미학적 정치학’이 전개되는 거점이 되었다. 이 같은 국제적인 행사가 주는 긍정적인 긴장감은 나를 여전히 흥분시키지만, 언제부턴가 비엔날레를 통해 ‘미술’을 감상한다는 건 시대착오적인 생각이 되어버렸다. 2014년 가을, 또다시 비엔날레의 계절이 돌아왔다. 비엔날레 현장을 방문하기 전부터 호기심만큼이나 피로함도 함께 찾아왔다. 비평가는 늘 현장에 있지만 제대로 즐기기는 어려운 직업이다. 이해하고 분석하고 판단하는 과정은 언제나 어렵고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예술감독 제시카 모건의 말을 빌리자면,   <터전을 불태우라>는 1980년대 초 미국 팝그룹 토킹 헤즈의 노래 제목으로 미국 중산층의 불안을 담은 송가처럼 불렸다고 한다. 여기서   ‘불태우다’의 의미를 활활 타오르는 환희와 사회적 이슈에 대한 적극적 참여를 은유한다고 설명한다. 막상 전시의 문을 열자 의견이 엇갈린다. 전시 주제를 일차원적으로 재현했다는 의견과 역대 최고의 비엔날레였다는 평가가 오갔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에게 <터전을 불태우라>는 오랜만에 비평가의 입장이 아닌 전시를 즐기는 한 명의 관객 입장에서 포만감을 느낀 전시였다. 무엇보다 이번 비엔날레는 이해하기가 쉽다. 이해의 용이함이 깊이의 부족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동시대를 사는 다수가 이미 전제된 전시의 의미 혹은 개념에 의지하지 않고 작품들을 경험하면서 자연스레 의미의 맥락을 발견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는 것은 사유의 특별함보다 공통점에 무게를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올해 비엔날레는 웅장한 스펙터클을 선사하지도 않고 미술제도나 사회문제를 개념적으로 비틀지도 않는다.
전시는 장편 소설을 공간 안에 옮겨놓은 듯 사건을 목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개막 식전 행사에 선보인 임민욱의 퍼포먼스는 전시의 프롤로그가 되어 잊힌 역사적 사건을 현재로 이동시켜 기억의 반대편으로 우리의 의식을 이동시킨다. 전시장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불타오르는 빨간 창(잭 골드스타인, <불타는 창문>(1977)이 놓여 있고, 곧바로 이불의 초기 퍼포먼스 영상과 오브제 작업이 관객을 기다린다. 혹자는 전시 주제를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재현한다고 비판하지만, 올해 광주비엔날레는 전문인과 대중 사이를 가로막는 지식이나 경험의 장벽이 어느 정도 허물어진 상태다. ‘빨간 창’이 주제에 대한 직접적 재현일 수 있으나, 입구에서 맞닥뜨린 강렬한 이미지의 충격은 관객을 사건의 목격자로 만들기도 하고 폭력에 의한 사회적 불안을 은유하기도 한다.
<터전을 불태우라>라는 이야기의 시작은 이처럼 불이 타오르고 있는 사건이 벌어진 시점에서 출발하지만 도입부를 지나면 사건 이후의 외상, 폭력의 전조, 터전을 잃어버린 이후의 잔해가 놓인 공간을 가로질러야만 한다. 이상이 1부(제1, 2전시실)의 이야기라면 2부(제 3, 4전시실)는 마치 초현실주의 소설처럼 실재와 환상, 재현된 현실과 개념적으로 설정된 예술작업이 기이하게 조우한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서는 모든 게 소진된 곳에서 음악이 흐르고 폐허 속에서도 희미하게나마 희망의 윤곽을 그린다(도미니크 곤잘레스 포에스터, <M.2062(피츠카랄도)>(2014)) 희망을 향한 기대는 미약하게 나타나지만 그 공명은 깊다. 우리가 소설을 읽을 때 오직 한 방향으로만 페이지를 넘기듯 <터전을 불태우라>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의 동선이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 다원성을 지향하는 최근의 전시 공간 디자인 경향과 달리 복고적으로 볼 수 있는데, 이 같은 방식이 되레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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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지날리니 무케르지 <수목생성> 대마 금속 프레임 1991~1992 작가는 인도의 전통 조각에 뿌리를 두고 금속 프레임에 대마 섬유를 공들여 엮으면서도 인도 안팍에서 논의되고 있는 예술, 공예, 모더니즘의 적용 방식을 해체한다.

사건을 목격하는 관객
남겨진 주검의 잔해들로 채워진 컨테이너 박스 두 개가 비엔날레 광장 앞에 놓여 있다. 그것은 말이 없다. 임민욱의 <내비게이션 ID>   (2014)는 한국전의 비극이 만들어낸 악몽 같은 현실의 일부를 꺼낸 작업이다. 사건은 발단은 다음과 같다. 한국전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원, 형무소 재소사 등 인민군 부역혐의를 받은 민간인을 학살하는데, 그중 진주와 경산에 거주하는 민간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유해와 유골은 오늘까지 컨테이너 박스에 보관돼 있고, 학살된 사람들의 가족은 죽음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현실이라 믿기엔 너무도 초현실적인 현장이 우리의 일상 안에 버젓이 버티고 서 있지만 사건과 무관한 사람들은 그저 강 건너 불 구경꾼과 다르지 않다. 작가는 주검을 보관한 컨테이너 박스를 광주로 옮기는 과정을 헬리콥터에서 촬영해 생방송으로 전송하고 희생자 가족들은 비엔날레 광장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내비게이션 ID>는 폭력의 희생자들을 현재형 시점으로 호출해 비극적 오디세이의 상황을 제시하는데, 이는 과거를 현재로 전환하는 통과의례가 된다. ‘터전을 불태우라’라는 선동적 표제가 지시하듯 전시는 희망이 소진된 보이지 않는 사회적 외상을 건드린다. 비엔날레 전시관 내외부에 설치된 스털링 루비의 <난로>(2014)에서 나오는 연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폭력, 학살, 억압이 자행되고 있다는 상징이 된다. 제1, 2전시장은 국가, 자본, 산업화, 물질주의 등에 의해 발생하는 폭력의 현장을 재연하는 대신 일상 속에 은밀하게 배어있는 폭력을 시사하고 있다.
어쩌면 폭력이 자행되는 장면보다 증상, 징후, 잔해같이 보이지 않는 폭력이 일상 안에 숨어 있다는 사실이 더욱 큰 공포로 다가온다. 파키스탄 작가 후마 물지의 조각 <분실물 취급소>(2012)는 국가 폭력에 의해 실종된 사람을 연상시키고 데쓰야 이시다는 기계나 부속품들로 결합된 인간의 형상을 통해 폭력에 의한 외상의 징후를 시각화한다. 회화 속 인물들은 영화 <모던타임즈>의 채플린과 다르지 않다. 터키 작가 바누 제네토글루는 한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증류주인 소주의 인류학적 궤적을 추적한 후 그가 직접 모은 다양한 소주를 시음할 수 있는 바를 제공한다. 이른바 한국 소주 지도를 그린 셈인데 바슐라르가 언급한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성질을 갖고 있는 술을 통해 초국가적 사유를 펼친다. 브라질 작가 레나타 루카스의 <불편한 이방인이 될 때까지>
(2014)는 비엔날레 전시관 벽을 부숴 건너편 아파트를 향한 새로운 창문을 만들어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비엔날레 제도 안에 개입한다. 전시장 초입의 <불타는 창문>과 대칭을 이루는 작업이다.
스위스 작가 우르스 피셔는 자신의 뉴욕 아파트 내부를 1:1 사진으로 재현한 공간 내부에 피에르 위그, 조지 콘도, 도모코 요네다 등의 작업을 개입시켰다. 이러한 개입의 방식은 이중적으로 표출된다. 우선 재현된 피셔의 아파트 내부, 다시 재현된 아파트 내부에 걸려 있는 예술작품, 실재를 재현한 공간 안을 점유하고 있는 타인의 작업들은 삶, 일상, 진짜와 가짜 등이 혼재한다. 이처럼 제3전시장은 피셔의 아파트 공간 내부와 외부로 분리되는데, 외부는 사회적 비평을 내포한 작업들로, 내부는 팝적인 요소로 가득 찬 유쾌하고도 괴상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4전시장은 현실과 허구, 실재와 환영이 교차하고 성정체성의 질서를 묻는 다소 원론적인 젠더 이슈와 게이 운동에 관한 작업들로 채워져 있다. 특히 벨기에 작가 카르슈텐 휠러의 <미닫이 문>(2003)은 미래주의 영화에 등장할 것같은 자동 거울 문으로 만들어진 공간을 제시한다. 복도이자 방인 정체성이 모호한 이 공간은 브루스 나우만의 복도 작업과 댄 그레이엄의 거울 작업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모호한 정체성에 대한 물음은 곳곳에 포진해 있다. 김성환의 <게이조의 여름-1937의 기록>(2007), 올라퍼 엘리아슨의     <밤 없는 여름, 낮 없는 겨울>(1994), 특히 므리날리니 무케르지의 <수목생성>(1991~1992)은 금속 프레임에 대마 섬유를 엮어 만든 공예적 조각으로 남녀 생식기를 연상시키는 식물을 형상화한다. 젠더 정치학의 시선은 이데올로기의 견고함을 부수기 위한 큐레이팅의 묘수로 보인다. 전시의 끝부분이 되자 타오르던 불꽃도 소진된다. 전시장 전체를 횡단하던 엘 울티모 그리토의 벽지 <미장센>(2014) 속 불꽃과 연기 패턴도 사라진다. 곤잘레스 포에스터는 축음기를 들고 있는 홀로그램 환영이 되어 어둠 속에 서있다. 이미지는 죽음을 대신하는데, 이미지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엘레지처럼 들린다. <터전을 불태우라>는 극단적인 작업들과 냉정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지만 말할 수 없는 ‘무엇’을 대하는 따스함이 전시를 관통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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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스털링 루비 <난로> 청동 주물 2014 파괴와 부활에 대해 개념적으로 다가가는 이 작품은 ‘터전을 불태우라’는 비엔날레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4개의 대형 난로가 전시장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