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FEATURE 황현욱,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오다

황현욱의 인공갤러리와 나

김용익 | 작가, 前 경원대 교수

나는 인공갤러리에서 개인전을 네 번 했다. 1986년과 1994년에 대구 인공갤러리에서, 1989년과 1993년에 서울 인공갤러리에서, 그리고 1990년 서울 인공갤러리에서 4인전과 1994년 대구인공갤러리에서 3인전을 또 했으니 가히 “인공갤러리 작가”였다 하여도 무방하리라.
내가 198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한 <제1회 청년작가전>에서 나의 출세작인 ‘천(布)’ 작품을 박스로 포장해버리는 작품을 발표하고 당시 화단의 주류였던 소위 ‘에꼴 드 서울’파와 거리를 두는 행보를 한 이래 1997년 금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기까지의 약 15~16년 동안 나의 주 활동무대는 인공갤러리였다는 것이 화력(畵歷)을 보니 저절로 밝혀진다. 어떤 연고로 나는 이렇게 인공갤러리와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면 서울서 작가 활동을 하던 황현욱이 어느 때인지 대구로 내려가 화랑을 하나 맡아서 운영한다며 전시를 하나 기획하였으니 출품해달라는 연락을 해왔었다. 그 전시가 1982년 대구 수화랑의 <논리성 이후전>이다. 그 후 1983년에서 1985년 사이 언젠가 잘 기억이 안나는데 황현욱이 학교로 날 찾아왔었다. 대구서 자기가 직접 인공갤러리라는 공간을 오픈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개인전을 하자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대담한 제안을 하나 했으니 당시 내가 재직하고 있던 00전문대학 교수직을 조만간 정리하고 인공갤러리 전속작가를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대구미술계에서는 잘 알려진 인물인 모 음식점 사장님의 후원을 연결시켜 주었다. 그 후원금만으로는 생활이 안 되었고 또 그것이 1년 만에 끊겨서 그 대담한 제안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를 계기로 인공갤리에 대한 소속감을 굳게 가지게 되었다.
대구 인공갤러리도 그랬지만 서울 인공갤러리는 당시 한국에서 가장 모던한 흰 입방체로서의 화랑공간을 구현하고 있었고, 1988년 당시로서는 거의 무명이던 작가 이기봉을 개관 기념전 작가로 초대하는가 하면 도널드 저드, 리처드 롱 등 현대미술사의 반열에 오른 작가들의 개인전을 잇달아 개최하는 등 당시 한국 화랑계에서는 독보적 존재였다. 작가라면 누구나 거기서 전시를 하고 싶어하는 공간이었는데 거기서 네 번이나 개인전을 한 나는 1981년 예의 ‘박스작업’ 이후 화단의 주류에서는 멀어진 듯 보였지만 그 누구도 무시 못할 인공갤러리의 후광을 톡톡히 입었다고 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황현욱은 전시기획의 독보적 존재감과 화랑 운영의 성공을 맞바꾼 감이 있다. 운영이 어려워서였는지 어쨌는지 전시가 점점 뜸해지더니 결국 그는 1996년 서울 인공갤러리를 말파(marfa)라는 카페로 바꾸었고 대구 인공갤러리도 문을 닫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이 정말 화랑 운영의 어려움 때문이었는지, 서울 화단의 동료 작가들에 대한 서운함 때문이었는지, 미술신(scene) 자체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었는지, 이 셋이 조금씩 다 합쳐진 것 때문이었는지 나는 잘 모른다. 당시 나는 나대로 모더니즘 미술에 회의를 느껴 공공미술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었고 미술에 대한 생각이 바뀌면 전에 가까이 지내던 사람과의 관계를 끊음으로써 새로운 생각의 순도(純度)를 지키려 하는 습성대로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황현욱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러한 심정을 나는 1997년 금호미술관 개인전 카탈로그 맨 뒤에 실린 <narrow based specialist의 노우트 2>라는 에세이에서 ‘결별’이란 제목으로 피력한 바 있다. 그 후 그를 다시 만난 것은 내 기억에 두 번 정도인데 2001년 대전에 비비스페이스(BIBI Space)라는 공간을 오픈할 때, 그리고 같은 해 그의 임종 일주일 전 병문안을 가서였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날 알아보는 듯한 그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무 까불었었지…” 무슨 뜻이었을까? 나는 그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일단 그와 멀어진 내 마음은 그의 죽음도 그리 애틋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 후 그와 함께했던 시절의 추억을 다 잊고 살아왔다. 그런데 왜 아직까지 종종 내 꿈에 나타나는 것이냐? 황현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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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3월15일부터 30일까지 열린 우순옥 개인전 전시광경

1991년 3월15일부터 30일까지 열린 우순옥 개인전 전시광경

황현욱과 철학자 박이문 선생, 그리고 나

우순옥 | 작가, 이화여대 교수

1990년 가을, 독일 유학 중 잠시 서울을 방문하던 차 서울에 근사한 갤러리 하나가 생겼다기에 찾아가 보았다. 현대미술 전문화랑이며 많은 작가가 선망하는 공간이라는 말을 듣곤 더욱 궁금했다. 옛 추억의 거리 동숭동 사잇길가 단정한 컨테이너 건물 외관이 우선 신선했고 ‘인공갤러리’라는 이름(디키의 ‘예술제도론’에 영향받아 지었다함) 또한 모던했다. 어떠한 장식이나 서술 없이 심플하게 기본 골조로만 이루어진 대담한 공간 감각에서 예술의 본질을 꿰뚫어보고자 하는 의도가 느껴졌고, 시원하게 높은 천장은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현대미술’을 위한 공간임을 실감케 했으며, 침묵의 성소같이 그 공간을 감싸고 있던 쿨하고 적막한 아우라는 작품마다 독특하고 강한 존재감을 안겨주었다. 때마침 갤러리 2층에서 힐끗 내려다보던 검은 양복 차림의 시니컬한 황현욱 선생 역시 어딘지 비밀스럽고 ‘인공’스럽게 그 장소와 잘 어울렸다.
그날 황현욱 선생과는 초면이었지만 이런저런 대화에서 철학자 박이문 선생님을 존경한다는 서로의 공통점을 알게 되자 어떤 신뢰와도 같은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난 며칠 뒤 독일로 다시 떠나면서 인공에 간단한 포트폴리오를 남겼고 그해 겨울 황현욱 선생은 뒤셀도르프로 편지 한 통을 보내왔다. ‘내년 3월에 개인전 합시다. 저는 우선생의 전시에 기대가 큽니다. 박이문 선생님의 사상에 관심을 가진 분이라서 더욱 그러하거니와 현재 우리 화단의 상황에 비추어보면 마땅히 기대되는 것입니다…’ 아,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것은 무명작가 독일 유학생이던 나의 첫 개인전이었다. 전시기간 동안 무심한 듯 세심한 황현욱 선생의 배려에 감사했고 시대를 앞서가는 탁월한 갤러리스트의 순수한 열정과 집념에 놀랐으며 척박한 한국 현대미술 상황에서 느끼는 깊은 고뇌와 피로, 고독과 절망에 어떤 연민이 느껴졌다.
1993년 봄, 나는 7년 만에 일시적으로 귀국하였다. 오랫동안 떠나 있던 고향 서울은 또 다른 낯선 땅이고 난 이방인 같았다. 적응하기 힘들어 혼자 파묻혀 지내던 시절이다. 그때마다 문득 인공갤러리를 찾아가면 황현욱 선생은 동병상련으로 맞아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이화여대 후문에서 만나 박이문 선생님 댁을 방문하였다. 박이문 선생님은 나의 대학시절 철학 스승이시고 황현욱 선생은 대구시절 그분의 책으로 현대미술을 스터디했다 한다. 그날 황현욱 선생은 은근한 존경심과 첫 만남의 설렘으로 이우환 선생님의 화집과 김용익 선생의 작품을 정중히 선물로 드렸고, 기뻐하시는 노학자의 순수한 열정과 투명한 정신에 감동했으며, 세상의 부닥침에 점점 희미해져가던 예술과 사회에 대한 자신의 오랜 꿈을 다시금 되새겼다. 지금 돌이켜 보아도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황현욱 선생이 안타깝고 아쉽다. 그리고 그날 저녁 우리에게 무수한 철학적 질문으로 예술과 삶의 진실성을 일깨워 주셨던, 하지만 지금은 노환으로 쓰러져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신 채 말없이 깊이 잠들어 계신 박이문 선생님의 슬픈 망각이 또한 너무 아득하고 허무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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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갤러리가 있던 동숭동 골목의 과거

인공갤러리가 있던 동숭동 골목의 과거

내가 혜화동 키드였던 시절

고충환 | 미술비평

당시 나는 아이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아닌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림을 그리다가 벽을 만났다고 생각했고, 실기가 아닌 이론을 통해서 그 벽을 넘거나 우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이야 미술사학과, 예술학과, 미학과처럼 예술이론 관련 학과가 세분화돼 있지만, 당시에는 그렇지도 않았다. 앞뒤 사정을 모르기도 했거니와, 그저 예술이론 관련 학과면 되었다. 그래서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에 응시를 했고, 덜컥 붙었다. 그래서 어떡하든 서울에서 기숙하면서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고, 인공갤러리와의 인연은 그 필요가 만들어준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계기로 어떻게 인공갤러리에 기숙하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주변 사람들의 중재가 있었을 것이다.
인공갤러리와의 인연은 그렇다 치고, 황현욱 선생과의 인연은 대구 미술대학 시절로 소급된다(앞으로 적지 않은 사람의 이름이 거명될 것인데, 그중에는 이미 작고하신 분들도 있고, 그리고 대개는 쟁쟁한 분들이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편의상 선생으로 총칭하기로 한다). 당시 영남대학교 서양화과 출신을 중심으로 한 람이라는 그룹이 있었는데, 그 그룹의 일원으로 갤러리 댓에서 전시를 했었다. 갤러리 댓은 서울인공갤러리 이전에 황선생이 대구에 차린 작은 갤러리로서(물론 그 이전에 수화랑이라는, 보다 중요한 공간이 있었지만), 현대미술을 표방했고, 신진작가들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공간이었다. 돌이켜보면 치기가 형식을 범했던, 형식의 실험실을 방불케 하는 자유분방한 분위기였던 것 같다. 그 전시에 똥 싸는 그림을 걸었는데, 세로로 긴 그림 위에 엉덩이를 까고 앉은 사람이 똥을 싸면 그 똥이 화면 아래쪽에 쌓이는 그림이었다. 세상을 향해 똥을 싸는 의식 있는 그림도 아니었고, 인격을 똥으로 환원하는 존재론적인 그림도 아니었다. 막연하게 좀 무겁고 꿀꿀한 그림들을 그렸었는데, 그 연장에서 나온 그림이었다. 당시 그 그림을 황선생도 보았을 것이고, 우스개를 자아냈었던 것 같다. 인연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런, 인연 같지 않은 인연이 황선생의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서울 인공갤러리에 둥지를 틀었다. 추운 줄도 모르고 마냥 춥던 시절이었다. 공간은 1, 2층으로 구분돼 있었는데, 층고가 높은 1층이 갤러리 공간으로, 그리고 2층이 사무실공간으로 구분돼 있었다. 그 구분은 황선생 공간과 내 공간의 구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2층의 황선생 공간은 출입금지구역까지는 아니더라도, 드문 호출이 아니라면 거의 드나들 일이 없는, 그래서 오히려 호기심을 자아냈던, 그런 공간이었다. 그렇다고 1층이 온전한 내 공간도 아니었다. 작품 사진을 찍거나 작품 설치를 하거나 작품 철수를 할 때에만 일시적으로 내 공간이었고, 정작 작품이 전시되는 대부분의 기간 내내 1층은 내 공간이 아니었다. 내 공간은 벽과 똑같은 흰색이 칠해진 문짝에 달린 손잡이가 아니라면 문이 있는지도 모를, 전시공간 구석에 있는 작은 문을 밀고 들어가면 있는, 창고였다. 그 창고에서 작품들과 뒤섞인 잡동사니들과 더불어 살았는데, 겨울이면 어김없이 그릇에 떠놓은 물이 얼어붙는, 그런 곳이었다. 그나마 세면대가 있어서 전시 오픈 때면 주방으로 임시변통되는, 그런 곳이었다.
여느 도시가 그렇듯 혜화동에도 바깥쪽과 안쪽(뒤쪽?)이 있다. 바깥쪽과 안쪽의 구분은 특히 낮보다는 밤에 더 극명해지는데, 바깥쪽이 거사를 치르는 곳이라면, 안쪽은 결산을 위한 곳이다. 밤에 인공갤러리는 결산하기에 딱 좋을, 그런 도심 속의 후미로 변신한다. 일어나면 하는, 하루 일과 중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바로 간밤의 결산의 흔적을 일소하는 일이다. 인공갤러리에는 전면 주차장 옆으로 나 있는, 옆집 벽과 공간 사이에 나 있는, 바깥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그런 좁고 긴 사이공간이 있었는데, 바로 그곳에서 밤사이의 결산이 이루어진다. 아침에 청소할 때 보면 버려진 빈 지갑과 주민등록증, 그리고 때로 여자 팬티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주차장 구석에 수도가 있었는데, 낮에는 황선생이 사용했지만, 밤에는 술꾼 아니면 싸움꾼 차지였다. 긴 호수를 연결해 마당(주차장)에 물을 뿌리곤 했던 수돗가에 박 터진 머리를 디밀고 피를 씻어내던, 유리창 너머로 보이던 누군가의 황망한 눈빛이 선연하다.
아마도 내가 꼭 필요한 이유였을 것이고, 실제로도 내가 한 가장 중요한 일과 중에 하나였다. 나는 인공갤러리의 지킴이였다. 당시 인공갤러리에는 엄청난 양의 전시 팸플릿이 배달돼 왔는데, 대부분은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쓰레기통으로 건너가기 전에 팸플릿은 내 점검을 거쳤는데,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한 일 중 하나였다. 그렇게 나는 인공갤러리의 청소부였다. 맵시 있고 말이 없는, 겉보기와는 달리 혹은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그렇게 웃음에 인색하지도 않았던 것 같은, 그런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주인을 모시는 기꺼운 지킴이였고 청소부였다.
이런 지킴이며 청소부와 함께 잔심부름과 같은 소소한 일 외에 내가 딱히 해야 할 일은 없었다. 특히 전시 오픈 때 내가 해야 할 일이 없다 싶으면 대개는 줄행랑을 쳤는데, 그렇게 동숭아트센터와 문화예술회관을 어슬렁거렸고, 갤러리 소나무와 바탕골(지금은 양평으로 이사 간)을 들락거렸다. 동숭아트센터에는 예술영화 전용관이 있어서 자주 찾았었는데, 사실은 영화를 보다가 잘 때가 더 많아서 지금은 뭘 봤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건물 내에 갤러리도 있었는데, 당시 그곳에서 심영철 선생의 네온설치작업을 본 기억이 난다. 빛을 내는 가시 면류관을 형상화한 것으로서 종교적인 개념을 작업으로 승화한 것이다. 심영철 선생은 이후 인공갤러리에서도 전시를 했는데, 성경책을 쌓아 만든 피라미드로 형상화된 말씀의 집을 불을 뿜는 뿔을 가진 신성한 사슴이 지키는, 그런 설치작업이었다.
문화예술회관 뒤편에 갤러리들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황금사과’ 아니면 ‘타라’와 같은 그룹전을 본 것 같고, 김찬동 선생도 그때 그곳에서 전시를 했다고 들었다. 갤러리 소나무는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국 작가들(아틀리에 소나무 소속 작가들)이 국내거점으로 마련한 것이라고도 했고 아니라고도 했다. 여하튼 당시 건물 2층에 있는 전시장에서 이불 작가의 핑크 몬스터 행위작업을 본 기억이 난다. 일종의 성기괴물이라고 해야 할 거대한 봉제인형을 뒤집어쓰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작가의 궤적을 따라 사람들이 자리를 피해주면서 같이 움직였던, 그런 인산인해였던 것 같다. 그리고 당시는 작가가 아니었던 강형구 선생이 운영하는 나우갤러리가 있었고, 그곳도 자주 드나들었던 것 같다. 이후 강형구 선생 첫 전시에 전시 글을 쓰기도 했지만, 아마도 당시에는 서로 보고도 몰랐을 것이다.
다시 황선생 얘기로 돌아오면, 황선생은 원래 서라벌예대 출신의 작가였다. 황선생의 그림을 우연히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뉴욕색면화파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색면구성이었다. 대구 수화랑 시절 스터디를 이끌기도 했다고 하는데, 현대미술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대개는 비트겐슈타인의 분석철학과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에 조예가 깊었고, 박이문 선생의 저작이 그 안내자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실제로 황선생과의 대화를 통해서라기보다는 꽤나 오랜 시간 모시면서 자연스레 드는 감이 그렇다는 말이다. 공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말을 삼갔고, 공적인 자리를 싫어했던 사람인만큼 미술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 작업에 관한 한 편애가 심했는데, 자기가 생각하는 현대미술이 아니라면 미술로 쳐주지도 않았다. 작가가 너무 많다고도 했다. 공간을 탐낸 작가가 많았지만, 그렇게 탐낸 작가들 중 실제 전시로까지 성사된 경우는 드물었다. 한정된 작가군 내에서 움직였는데, 주로 앵포르멜 계열의 작가들, 단색파 화가들, 미니멀 계열의 작가들, 그리고 물성 위주의 조각가들과 어울렸다.

황현욱이 편애한 이우환과 윤형근
몇날며칠 전시 디스플레이를 했던, 장흥 토탈미술관에까지 가서 철판 위에 놓을 호박돌을 실어왔던 이우환 선생 전시, 홍대 앞 작업실을 방문해 작업을 실어왔던 윤형근 선생 전시(거칠한 막사발에 당신의 그림처럼 묽은 커피와 돌 설탕을 타서 내어주시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오리선생이라는 별명을 안겨준 특유의 무심한 필치로 그린 그림과 점토 덩어리를 되는대로 툭 던져놓은 것 같은 입체작업의 이강소 선생 전시, 사이 톰블리를 연상시키는 권오봉 선생 전시, 프랭크 스텔라의 셰이프트 캔버스가 입체로 화한 것 같은 김용익 선생 전시, 앵포르멜을 연상시키는 파워풀한 검은 그림을 내걸었던 제여란 선생 전시, 색면구성을 각각 평면으로 그리고 입체로도 변주해 보여준 장옥심 선생 전시, 침목 끝을 무슨 젓가락처럼 자른 틈새로 돌과 함께 소형 모니터를 끼워 넣은 박현기 선생 전시, <내일의 너> 시리즈를 그린 박영하 선생 전시, 조각으로는 김청정 선생과 김진영 선생 전시, 그리고 사진에 권부문 선생 전시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돌이켜보면 작가들 중 특히 윤형근 선생에 대해서만큼은 유독 편애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좀체 표를 안 내는 사람임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다. 알 만한 사람들 전시에서도 따로 도록을 만들지는 않았는데, 대개는 간단한 엽서나 접지 형식의 리플릿으로 대신했다. 그런데 윤형근 선생은 예외였다. 사실상 전작을 수록한 도록을 구상했고, 당시로는 이례적일 정도로 하드커버로 된 제법 두툼한 도록을 제작했다. 인쇄 색깔이 제대로 나왔는지 전전긍긍해하고 몇 번이고 수정하고 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 일련의 전시들과 함께 당시 인공갤러리 전시로 치자면 단연 도널드 저드와 리처드 롱 전시를 빼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전시를 위해 두 작가 모두 직접 내한했는데, 특히 리처드 롱은 현장작업의 특성상 직접 오지 않으면 아예 전시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최소한 무의미한 경우에 해당한다. 당시 인공갤러리의 한쪽 벽면 전체를 일일이 손바닥으로 흙칠해 메우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전시 기간 내내 사람들은 거대한 흙벽과 마주해야 했다. 도널드 저드는 공항에서 작품이 문제가 된 사실이 당시 신문에도 실렸다. 예술작품이면 면세가 되고 공산품이면 세금을 물리는데, 당시 황선생이 직접 공항에까지 가서 전후사정을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난다. 도널드 저드도 그렇고 리처드 롱도 마찬가지지만 이후 근 10년은 지난 연후에나 국제화랑에서 순차적으로 두 사람을 초대전시한 걸 보면 황선생이 선구적인 사람임을 알 수가 있겠다. 그 시차만큼 황선생이 시대를 앞질러간 혜안의 차이로 봐도 되겠다.
황선생 얘기를 해야 하는데, 결국 내 이야기를 한 것 같다. 글을 청탁하면서 이준희 편집장이 아주 개인적인 경험과 추억에 기반을 둔 회고성격의 글을 주문하기도 했거니와, 사실 황선생과 공유할 만한 이렇다 할 추억도 별반 없는 편이다. 모르긴 해도 황선생 당신도 추억을 만들 만한, 그런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추억은 세속적인 사람의 몫이다. 그렇게 새삼스레 추억을 곱씹게 해준 이준희 편집장이 고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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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영 딴판이었는지도 몰라”
– 막다른 공간 – HHW의 선택 가능성

제여란 | 화가

사실 갤러리 공간이란 어떤 가상성에 기반을 두고 설계된 것이다.
항상 머릿속의 궁리 끝에 선택되는 것보다
먼저 발생하는 이 가시성을 위해 경험을 채우는 것이다.
감각적 대상적 관계적 형식적 건축적 비감각적 추상적 취향적 선행 구상에 따라 선택되고 현실화된 그곳에서 항상 더 즉각적인 아이콘으로 기능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소설이나 시보다 경구나 말장난을 더 좋아한다.
개를 좋아한다.
사람을 좋아하는 자신보다 사람다움을 좋아하는 자신을
더 좋아한다.
모든 오류가 이성이나 논리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편을 좋아한다.
붉은 색을 좋아한다.
일찍 집을 나서는 것을 좋아한다.
약이나 병이 아닌 다른 일들에 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기념일보다 하루살이가 기념일이 되는 것을 좋아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점잖음보다 섣부른 말을 해서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좋아한다.
섣부른 악수를 하는 것보다 도덕론자를 좋아한다.
땡땡이 무늬를 좋아한다.
평범한 기적보다는 개소리를 좋아한다.
지나치게 쉽게 믿는 것보다는 교활한 영리함을 좋아한다.
비축보다는 낭비를 좋아한다.
혼돈의 평화보다는 정리된 지옥을 좋아한다.
그림자가 몸보다 더 실재일 때가 많은 경우보다는
그림자도 실재도 없다는 장갑 같은 공간을 좋아한다.
햇빛의 볼륨보다 낙하산의 하강을 좋아한다.
내 눈이 불쌍해 보이므로 귀티 나는 눈매를 좋아한다.
책상 서랍보다는 책상 위를 좋아한다.
자유로운 0보다 1을 좋아한다.
열거하지 않은 많은 것보다 열거되지 않은 다른 많은 것을 좋아한다.
단단한 돌들의 시간보다 풀벌레의 시간을 좋아한다.
우울한 기분을 떨치기 위해 발 구르는 것을 좋아한다.
얼마나 남았는지 언제인지 물어보지 않는 것을 좋아한다.
존재 그 자체가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는 착각의 행간에 주목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왼편과 오른편들의 반대로 움직이는 것을 좋아한다.
사과씨보다 과수원을 좋아한다.
질문보다는 답을 좋아한다. 감탄과 절망 둘 다 좋아한다.
하늘보다 망원렌즈 안으로 들어와 말린 지평선을 좋아한다.
명확한 것보다는 그럴싸한 것을 좋아한다.
구멍 난 장갑보다는 살을 에는 듯한 냉기를 좋아한다.
화가 ‘K’의 우울증적 불만보다는 그의 헛헛증을 좋아한다.
유아론적 자기 찬양보다 맹목적 충동에의 복종을 좋아한다.
고상한 안달보다는 발칙한 현기증을 좋아한다.
증류주(酒)를 좋아한다.
미래, 침묵, 무(無)보다 낭자한 웃음을 좋아한다.
어릿광대를 좋아하지만 어릿광대로 분장한 익살광대를 더 좋아한다.
짙은 색 코트를 즐겨 입던 그를 좋아하면서 거의 노출증에 가까운 경솔한 인간인 과묵한 엘리트였던 ‘G’를 좋아한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좋아한다. ‘H’의 드로잉보다 밧줄처럼 팽팽한 원고지 한 장을 좋아한다.
과묵하고 느슨한 영혼의 음모보다 치통을 좋아한다.
자신과 겉돌고 있는 무능과 무력감에 대한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던 혐오감을 좋아한다.
정신 산란한 지식인의 회절된 머리보다 넉넉하고 호방한 남자의 어깨를 좋아한다.
숲과 안개 별들과 깨진 기와 벌레가 우글거리고 거미줄이 철마다 뒤엉키면서 양감을 더해가면서 꽃뱀이 소스라치던 안동의 병산서원을 좋아한다.
하여 길(교차로) 위에서 언제나 부분적이고 순간적이며 뒤따르면서 앞서 가다가 숨어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