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FEATURE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부리부리한 눈의 자화상으로 잘 알려진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
그는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 겸재謙齋 정선鄭歚(1676~1759)과 함께 조선의 삼재로 불린다.
또한 뛰어난 화가이자 시와 문학, 실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인물이다. 윤두서 서거 300주년을 맞아 국립광주박물관(2014.10.21~1.18)에서 특별전을 마련했다. 이번 전시는 윤두서와 후대 작가들의 서화를 함께 전시해 18세기 조선의 인식변화를 이끈 그의 실학적 탐구와 정신을 재조명했다. 뿐만 아니라 공재를 넘어 아들 낙서駱西 윤덕희尹德熙(1685~1766), 손자 청고靑皐 윤용尹愹(1708~1740)으로 이어지는 회화세계를 살펴본다. 《월간미술》은 전시소개와 더불어 현시점에서 공재 윤두서를 다시 바라보려 한다. 르네상스인으로서의 공재 윤두서의 모습을 소개하고 그가 당대와 후대에 끼친 역사적 영향력을 고찰한다.
장소와 세대를 넘어 교감할 수 있는 윤두서의 열린 세계관을 살펴본다. 특별히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회화사료 세 가지(윤두서의 중국지도, 윤덕희의 단양 바위글씨, 윤위의 <구택규 초상>)를 소개한다. 이를 통해 윤두서 일가의 예술적 자취를 폭넓게 바라보자.

시대의 변혁을 꿈꾼 예술가, 공재 윤두서
이내옥 | 미술사

조선왕조와 같이 하나의 국가가 오백 년 동안 지속된 사례는 세계 역사상 흔치 않다. 조선은 유교를 국가 지배이념으로 삼고, 그를 통한 이상국가 실현을 지향했다. 그 근본 기저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흔들렸지만, 조선 멸망에 이르기까지 강고해져갔다. 주자학 이념은 국가와 사회 그리고 개인의 전반적인 규범과 사고를 조직하고 제어했다. 형刑이 아닌 예禮로써 국가를 운영하려 했던 조선의 이상적인 시도가 오백 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사실은 인류 역사상 높이 평가될 수 있다.
조선을 시대 구분하는 데에는 몇 가지 기준이 있지만, 크게는 임진왜란을 기준점으로 전,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 사상적인 면에서 보자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독존獨尊의 지배이념이었던 주자학에 균열이 생겼다. 그에 대한 대응은 두 갈래로 나타났다. 주자학의 배타성을 더욱 강조하려는 경향과, 청淸의 새로운 학문적 조류를 흡수하면서 보다 다양하고 유연한 학문적 경향을 추구하는 이른바 실사구시實事求是 이념에 입각한 실학이 그것이다. 임진왜란이 수습된 지 한 세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은 서서히 국력을 회복하고 경제적 안정을 이루는 가운데, 주자학과 실학이라는 두 가지 학문적 경향이 공존한 시기가 바로 숙종대(1674~1720)였다.
조선 후기의 사회적 변화는 숙종대에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농업에서 이앙법 등의 기술 혁신으로 광작廣作 운동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부농층이 대거 발생했다. 조선은 또 청일 간의 중개무역을 맡고, 일본에 인삼을 수출해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였다. 이러한 경제적인 부의 축적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윤택해지고 사치와 문화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던 사찰 3백여 개가 중창되고, 분원分院에서 사사로이 제작된 호화로운 자기들이 대량으로 시장에 보급되었다. 나라 안에 돈이 돌면서 여행의 풍조도 서서히 고조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맞물리면서 회화부문에서도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바로 새로운 장르로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와 풍속화風俗畵가 등장하고, 사대부의 고상한 정서를 표현하는 문인화文人畵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의 회화적 경향에 비한다면, 조선 후기의 이러한 변화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진경산수화, 풍속화, 문인화의 등장 배경은 무엇인가? 그리고 의미는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이야말로 회화사는 물론 조선시대 예술사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화두話頭라고 할 수 있다.

윤두서 〈윤씨가보尹氏家寶〉 25면 〈나물 캐기〉 모시에 먹 30.4×25cm 조선 17세기 말~18세기 초

윤두서 〈윤씨가보尹氏家寶〉 25면 〈나물 캐기〉 모시에 먹 30.4×25cm 조선 17세기 말~18세기 초

르네상스인, 공재 윤두서
조선 후기 회화사의 새로운 경향의 대두에 대한 해명 작업이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다. 단순히 실학이라 추정하기도 하고, 문화적 자존의식의 발로라고 하기도 했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점은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를 창조하고 문인화를 수용한 최초의 인물이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공재에 대한 연구 없이는 그에 대한 설명 자체가 관념적이고 공허할 수밖에 없다.
공재는 1701년 실경의 <금강산도>를 두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토론했으며, <산골의 봄>과 <백포별서도> 등 2점의 진경산수화를 남겼다. 그리고 <나물 캐기> <짚신 삼기> <목기 깎기> <돌 깨기> 등 4점의 풍속화가 전하고 있다. 4점의 풍속화 모두 노동하는 인간을 그렸다는 점이 특징적이며, <나물 캐기>는 여성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공재는 당쟁에 회의를 느껴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면서 학문과 예술에 매진했는데, 선비로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세상일을 자기 책임으로 인식하는 정서를 문인화로 표현했다. 원말사대가元末四大家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많은 문인화를 그린 것이다.
공재의 이러한 창조적 시도가 초창의 미숙성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의 모색은 영·정조대를 거치면서 계승, 발전해 나갔다. 진경산수화에서 겸재 정선, 풍속화에서 단원 김홍도, 문인화에서 추사 김정희가 출현해 황금기를 연출했다. 따라서 겸재, 단원, 추사는 공재의 예술적 키즈였다. 당시 추사는 공재를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했다. “우리나라에서 옛그림을 배우려면 진정 공재에서 시작해야 한다. 정선이나 심사정이 모두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전하는 바의 권첩이란 한낱 안목만 어지럽게 할 뿐이니 결코 들춰보아서는 안 된다.” 문인화가 전공이었던 추사의 입장이 드러난 말이지만,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공재의 위치에 대한 적절한 평가라고 하겠다.
공재는 회화적 표현 역량 또한 탁월했다.
그의 <자화상>(국보 제 240호)은 동양 전신傳神의 최고 수준의 작품이다. 말을 지극히 사랑한 그의 <유하백마도>는 문기와 사실성이 결합된 동아시아 최고의 작품이라 평가할 수 있다. 공재의 예술에서 비교적 덜 알려진 부분도 많다. 서양의 음영법을 채용한 조선 최초의 정물화를 그리기도 했고, 전각예술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그가 그린 조선지도는 정상기와 김정호 지도의 선구였고, 그의 일본지도는 정밀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또한 조선을 석권했던 한석봉체의 거칠고 투박한 서예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여 동국진체東國眞體 창안의 중심에 섰다. 이렇게 다양한 방면에 뚜렷한 창조적 업적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공재는 진정 조선의 르네상스인이었다.

윤두서 〈윤씨가보〉 11,12면 〈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 비단에 엷은 색 32.2×40cm 조선 17세기 말~18세기 초

윤두서〈윤씨가보〉 11,12면〈유하백마도柳下白馬圖〉비단에 엷은 색 32.2×40cm 조선 17세기 말~18세기 초

공재 윤두서, 시대를 꿰뚫어 보다
공재는 다양한 학문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예술에 대해서도 남다른 신념이 있었다. 앞선 시대의 예술적 경향을 반성하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였다. 공재는 해남윤씨海南尹氏 가문의 종손으로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자이다. 공재는 윤선도의 가풍을 이어 교육을 받았으며, 같은 남인南人인 성호星湖 이익李瀷 형제들과 학문적으로 매우 밀접하게 교유했다. 이들이 두 집안에 소장하고 있던 중국과 서양 서적을 비롯한 수천 권의 도서를 열람하고 토론하는 과정이 조선 후기 새로운 사상과 학문 그리고 예술의 탄생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공재의 학문은 증조부인 윤선도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윤선도는 예론을 비롯해 천문, 음양, 지리, 의약, 복서, 음악 등에 걸쳐 박학했다. 이러한 학문적 경향은 그의 새로운 인식론에 바탕을 둔 것으로, 주자학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공재는 윤선도의 이러한 학문적 경향을 가학家學으로 전수받았다. 공재의 인식론은 천하의 만사 만물이 각각 다르므로 그 속성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궁구하여 그 경험적 지식을 축적하고 체계화하는 분석적 방법론이다. 이러한 인식론에 기반을 둔다면, 외계 사물을 실사實事에 비추어 증험함으로써 실득實得을 추구하고,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성리학과 예론은 물론 천문, 지리, 의약, 음악, 패관소설, 병서, 공장, 기교 등 다방면에 걸쳐 박학할 수밖에 없다. 조선 후기의 실학도 바로 이러한 인식론에 근거하고 있다.
인식론의 변화는 예술에서도 새로운 변화를 일으켰다. 이제 주위의 호박, 참외와 같은 하찮은 미물들이 그림의 대상으로 등장했다. 동양의 오랜 전통적인 관점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파악하고, 그 자연과 동화될 때 이상적인 경지에 다다른다는 이른바 인간과 자연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상화된 자연으로 표현된 것이 관념산수화였다. 그렇지만 각각의 사물에 별도의 이理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여 상대적으로 보는 시각이다. 예컨대 이러한 시각에서 산을 그린다면 그 산들은 각각 독자적인 차별상을 가지고 표현될 것이고, 금강산, 인왕산 등 개개의 이름을 가지는 개성적인 산으로서의 진경산수화가 출현하는 것이다. 풍속화의 대두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공재 이전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관념적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단일한 주체, 즉 사대부였다. 그러나 인간들을 독자적인 차별상으로 표현할 때에 그 대상은 폭넓게 확대되어 상인, 농부, 하인, 공인, 여인네 등으로 넓어진다. 그 표현이 조선 후기의 풍속화였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예술적 변화의 근원에 공재가 위치한 것이다.
공재의 외증손인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은, 공재를 성현의 재질과 호걸의 뜻을 갖춘 분이기에 남긴 글과 유묵도 그러하나, 시대를 잘못 만나 애석하다고 했다. 공재가 지닌 역량이나 시대를 보는 안목 그리고 후대에 미친 영향에 비한다면, 지금까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저평가된 것이 사실이다. 예술가는 예민한 촉각과 감관을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공재는 다가올 시대를 예견하고, 그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정통 주자학을 신봉했던 주위 인물들은, 당시 공재의 학문과 예술에 대해 우려하고 비판했다. 그러나 공재가 창조하고 개척한 예술은 조선 후기 문예부흥의 토대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공재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연 진정한 선구자였다. ●

윤두서 《가전보회家傳寶繪》 19면 20면 〈송함망양도松檻望洋圖〉 종이에 먹 23×61.4cm 조선 1707년

윤두서 《가전보회家傳寶繪》 19면 20면 〈송함망양도松檻望洋圖〉 종이에 먹 23×61.4cm 조선 170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