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나현

DF2B1686

<바벨탑 프로젝트, 체리나무 바벨탑>(사진 앞 오른쪽)120×120×140(h)cm 2013

나현의 개인전 <프로-젝트(PRO-JECT)>가 LIG아트스페이스에서 2014년 11월 27일부터 12월 31일까지 열렸다. 나현은 이 전시에서 수집한 역사적인 자료를 작가 개인의 주관과 결합하여 객관의 역사 속 절대 진실을 보여주는 일련의 작업을 선보였다. 따라서 관람객은 전시장에서 결과물이 아닌 지금도 지속되는 작업 과정을 목도하게 된다. 객관의 역사가 재구성되는 나현의 전시장으로 들어가 본다.

‘절대 진실’에 저항한다
김주원 미학

“민족의 피가 더럽혀져가는 이 시대에 자국의 가장 우월한 인종 보존에 최선을 다한 국가는 언젠가 분명 세상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우월 인종 보존을 두고 성공 가능성이 있는지를 당이 요구하는 희생과 비교하며 불안해지는 일이 있더라도 이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Mein Kampf》 중에서

한 작가의 작품세계에 관한 글을 내가 이렇게 불순하게 시작하는 이유가 있다. 한 사람의 광기어린 편견과 민족, 인종에 대한 오해가 다른 민족을 절멸의 운명으로 이끌고 세계지도를 전쟁과 학살의 피로 얼룩지게 한 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작가가 말하는 ‘절대 진실Absolute truth’, 즉 근대와 근대성의 표상이며, 이를 교육받고 강요받으며 유년기를 보낸 세대의 작가 나현이 이에 대한 의심으로 자신의 프로젝트들을 전개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성이자 말인 로고스에 대한 신뢰와 확신의 시대에 대한 의심인 셈이다. 합리주의와 식민주의/우생학, 진보에 대한 믿음과 인종/민족주의, 자본주의와 실증주의 등의 근대 프로그램은 작가 나현의 <실종Missing>(2006~2009)에서부터 현재진행형인 <바벨탑The Babel Tower>(2012~)에 이르는 거의 10년 동안 진행되는 프로젝트 등의 비판적 대상이며, 이로 인해 만들어진 객관화된 ‘하나’의 사실 혹은 역사로 불려온 것들이 사실은 두껍고 단단한 마스크를 쓴 복잡한 ‘여러’ 다른 얼굴을 감추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물론 이것은 그의 작업이 어떻게 진행돼왔고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를 살피는 일에서 확인될 것이다.
LIG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리는 작가 나현의 전시 <프로-젝트PRO-JECT>에는 작가가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현재 진행 중이거나 지금까지 진행해 온 회화, 드로잉, 영상, 사진, 설치 등 다양한 매체의 작업들이 소개되고 있다. 그의 프로젝트는 <실종>(2006~2009), <나현 보고서-민족에 관하여NA Hyun report-about the Ethnic>(2008~2011), <로렐라이의 노래A Song of Lorelei>(2010~2013), <바벨탑>(2012~) 등 크게 네 개로 구별되지만 이들은 연쇄적 성격을 지녔다.
프로젝트들은 하나의 특정한 레퍼런스, 장소, 그리고 시간에서 시작해 관련된 자료나 문서들을 수집하고 실재 인물 인터뷰 등을 이용하는 리서치 기반의 작업 형식을 띤다. 그러나 그 특정한 레퍼런스와 장소적 그리고 시간적 편협함 안으로 미끄러지지는 않는데, 이는 나현의 작업이 리서치 과정과 결과물의 형식에서, 아카이브나 기록이라는 전형성과 박제성에서 멀리 나아가기 때문이다. 즉 사건으로서의 역사적 사실과 그것을 에워싼 담론들의 축조들을 여러 맥락에서 살피고 다시 현재 혹은 각기 다른 장소, 시간과 엮고 구성하여 역동적 읽기와 새로 쓰기의 가능성을 여는 흥미로운 과정을 끌어오는 것이다.
예컨대, 작가가 우연한 기회에 접하게 된 독일제국의회의 1912년 혼혈혼 논쟁Die Mischehendebatte im Reichstag 자료에서 출발한 <바벨탑>의 경우를 보자. 사실, 인종 혼합이라는 공포의 이미지는 근대 식민주의 담론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식민지의 지배 인종이 피식민지인과 혼합되면서 식민 주도의 힘을 상실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인종 혼합=종種의 퇴화라는 우생학적 담론이 바탕에 있다. 이 정치적 논쟁의 법률적 도덕적 성격 판단 여부를 떠나 이러한 논쟁의 사건 속에서 지속적인 역사적 과정의 인식들이 생기게 된다고 작가는 보았던 것 같다.

 아틀리에 에르메스 서울 전시광경 2013

<바벨탑 프로젝트> 아틀리에 에르메스 서울 전시광경 2013

네 개의 프로-젝트와 질문들
혈통, 민족, 로고스(이성이자 말), 신화 등으로 대응되는 바벨탑 이야기는 작가 나현에 의해 전후 전쟁 쓰레기로 만들어진 베를린의 토이펠스베르크Teufelsberg(악마의 산)과 자본의 논리 아래 쏟아지는 산업, 생활 쓰레기로 이루어진 서울의 난지도라는 두 도시의 인공산으로 연결되었다. 프로젝트에는 7000년 전 유럽과 한성 백제시대의 <목조우물>의 재현, 베를린 거주 외국인들의 모국어 <인터뷰_크로이츠베르그>(2013~2014) 프로젝션, 외래종과 토착종의 채집 식물들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목조우물> 속에 프로젝션 되고 있는 <인터뷰>는 터키, 미국, 일본, 캐나다, 에티오피아, 그리스, 폴란드, 이탈리아, 이스라엘, 브라질, 한국 등 각기 다른 언어로 말하고 있지만 한 가지 언어(‘영어’)로 질문하고 다시 한글로 번역되는 과정을 보인다.
이 작업들은 나현의 프로젝트가 고대 유적 바벨탑의 발굴 프로젝트임을 상징한다. 서로에게 대응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로고스를 둘러싼 분리와 단절의 계기들을 혼합된 경계지대로 이끌어내어 서로가 ‘적’이자 ‘위험한 것’이었던 민족 간 혹은 인간과 신, 자연과 인간 등이 스스로 품었던 두려움, 공포, 경계 등을 끄집어냈다. 이는 서로 연결될 수 없을 것만 같던 공간과 시간, 여러 가지 계기들이 작가 나현에 의해 다시 직조되어, 지배적인 판단, 정의, 역사라는 확정된 절대 진실에 대한 수사학적 전복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프로젝트 <바벨탑>은 <로렐라이의 노래>, <나현 보고서-민족에 관하여>와 동일한 맥락에 서있다. ‘기적’과 ‘개발’의 수사로 언급돼 온 독일의 라인 강과 한국의 4대강을 연결하여 3년에 걸쳐 진행된 또 다른 발굴 프로젝트 <로렐라이의 노래>는 14세기 독일의 성과 영토를 위한 경계 목A boundary post <PILE(말뚝) PROJECT>(2012)을 재현한 것으로 시작된다. 나현은 2년 동안 강변에 <말뚝>을 박고 자연의 흐름과 그것을 둘러싼 인간의 사회정치적인 태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관한 압축적 지표화를 시도했다. 라인 강을 둘러싼 정벌과 전쟁, 교역과 공업, 생태도시로의 전환이라는 시간차를 둔 이 모순적인 역사적 모델들은, 아름다운 소녀의 감미로운 노랫소리가 죽음의 유혹이라는 전설의 노래와 하이네의 시 ‘로렐라이’로 수렴되어 <말뚝>에 흔적으로 남게 했다. 그리고 다시 <말뚝>은 테이블로 제작되어 ‘기적’과 ‘개발’이라는 근대적 신화를 만들기 위한 충돌과 모순, 경계를 통합하는 가능성으로 전환됐다. 라인 강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한국의 남한강대교-한강, 구담교-낙동강, 담양호-영산강, 금강 등지에서도 나현의 프로젝트는 그렇게 수행되었다.
사실 <나현 보고서-민족에 관하여>는 앞의 두 프로젝트가 의심하고 있는 문제들, 즉 근대와 근대성이 요구해온 ‘절대 진실’로서의 동일성과 균질성, 그리고 경계가 그 이면의 것들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질문에 닿아있다. 다른 것들에 비해 상당한 갈래를 갖고 있는 작업들은 시베리아나 몽골의 바이칼 호와 쿠바 그리고 한국의 서남해안 등지를 여행하며 수집한 역사와 자료들에 기초한다. 작업은 민족(혹은 ‘국민’, nation)의 구성적 특징이라 여겨진 초역사적 단일성과 동질성의 개념을 흔들고 민족ethnic의 문제를 디아스포라와 잡종, 그 경계에 주목하게 했다. 원시시대 소금과 먹이를 찾아 이동한 매머드를 따라 인간 역시 이동했다는 작가의 가설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1950년대 한국전쟁에 참전한 프랑스 군인 중 실종자 7인에 관한 도큐멘트에서 출발한 <실종>은 프랑스군, 연합군, 실종자라는 무정체적 정체를 지닌 보편 혹은 덩어리들인 7인의 병사를 12인의 개인, 혹은 파편으로 찾아내고 소생시켰다. 실종이라는 이미 멈춰버린 사태와 그 사태의 해체 혹은 재구성을 위한 그의 작업 과정은 실종자 7인의 실종확인 도큐멘트, 시테 섬의 7개의 다리, 관을 연상시키는 7개의 함석 제작품 등으로 가시화된다. 특히 7개의 함석제작품 안의 <물 위에 그리기>는 지나간 시간들이 사건으로 남는 방식에 관해 말하고 있다. 물위에 그린 그림, 증발된 물, 함석 바닥에 남은 물감의 분명치 않은 흔적 등은 주체에 따라 매우 상이한 방식으로 인식되고 상상될 것이다.
<우물>, <말뚝>, <매머드 터스크>, <물위에 그리기>는 네 개의 프로젝트 각각의 중심에 있다. 현지 조사와 수집을 통해 모아진 레퍼런스들에 기대는 종류의 작업이 잃기 쉬운 미학적 터치들은 작가가 설정한 발굴 지표로서 이들 작업에서 해소되고 상징화됐다. 나는 근대와 근대성의 모순적인 모델들을 마술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으로 이들을 상정한 작가의 진심을 여기에서 읽는다. 그래서 그의 작업이 프로젝트가
아닌 프로-젝트일 수 있는 가능성을. 다른 시간들과 공간들, 그리고 다른 공동체들의 담론적 네트워크를 실천하는 수행성을. ●

 2010/2012/2013

<로렐라이의 노래 프로젝트, PILE-Rhine> 2010/2012/2013

 

DF2B0389나 현 Na Hyun
1970년 출생했다. 홍익대 회화과, 동 대학원 그리고 옥스퍼드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과 일본, 독일, 영국 등지에서 15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한국을 비롯하여 인도, 일본, 미국, 영국 등지에서 열린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출품했다. 프랑스 파리 시테, 쿠바 아바나, 베를린 쿤스트하우스 베타니엔 등 국내외 레지던스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현재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