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박영남

 

붓 대신 손가락으로 색과 빛을 겹겹이 쌓았다. 손가락의 촉각성이 나타나는 추상회화로 널리 알려진 박영남이 금호미술관에서 개인전 <Self Replica>(10.16~11.9)를 연다. 이번 전시를 통해 그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디지털적인 빛의 미감을 만들어냈다. 무한한 자기복제와 변주로 열린 시각을 제시하는 그의 작품세계를 살펴본다.

복제(Replica)와 복수화(Re-pli)

강태성  미술비평, 국민대 교수

작가 박영남은 ‘self replica’라는 주제로 금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는 이 전시에서 세 가지 유형의 작품을 선보인다. 첫째 유형은 다채로운 사각형을 연결한 작품이고, 둘째 유형은 흑백 사각형 위에 사선과 흔적들이 있는 작품, 셋째 유형은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다. 전시장 1층 정면에는 10호 캔버스 21개를 길게 붙인 작품을 제시한다. 작가가 “색상이 형태가 되길 원한다”고 언급했듯이, 실제로 다양한 색상은 4각 형태를 만들며 다양한 리듬감을 표현한다. 이 공간은 2층의 공간과 대조된다. 2층 전시장은 완전한 흑백의 공간을 이루면서 무게감 있는 거대한 크기로 관람객의 동선을 압도한다. 흑백과 유채-무채색의 대조와 함께 손끝으로 검은 얼룩, 회색 얼룩을 이뤄내어 일종의 낙서의 자유로움처럼 지우고 덫칠하는 행위들을 표시한다.
3층의 좌측 공간에는 1층의 색채와 연관된 작품들이 전시되고 우측공간에는 2층의 흑백 작품들이 전시되어 대조를 이룬다. 특히, 3층에는 색채들이 손끝으로 화면을 더듬듯이 그려져 따뜻한 느낌을 갖게 한다. 손의 자취들은 촘촘하거나 듬성듬성하게, 정적이거나 동적으로 화면에 올라와 있다. 때로는 가로선이 세로선, 사선들과 만나며 조형적인 질감 표현과 행위의 의미들을 제시한다. 손끝으로 작게 찍어낸 물감의 느낌은 조용한 숨결처럼 담담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와 달리, 사선은 좀 단호한 자세로 소리 지르는 것같이 심상(image of mind)을 나타낸다. 그래서 작품은 단순한 추상이 아니라 심상의 재현도 포함한다. 인덱스(검지)와 같은 손가락은 구체적인 인덱스 없이 행위를 제시한다. 이 촉각적인 터치들이 이뤄낸 선들의 뭉개짐과 퍼짐은 추상표현주의적인 공간들과 연관된다.
이번 전시는 벽에 걸어 놓은 작품부터 벽에 기대어 놓은 작품까지 연출되고 심지어 비계까지 한데 놓여있어 전시장이면서도 작업실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러한 연출에서 ‘과정 중’이라는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비계의 형태들을 추상작품에서 만나게 된다. 이 형태적 만남은 작품과 세계가 ‘연속’된다는 것을 연상하게 한다. 그의 작품은 순수한 추상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 즉 현재의 물체들이 빛 속에서 새로운 구체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실제 추상주의자들은 어떤 사물성도 부정하며 색 자체이기를 강조하는 데 반해 그는 이러한 사물과의 연상성을 추상성에 포함시킨다.
지하 전시공간에서도 조형적 대조가 두드러진다. 좌측 공간에는 같은 크기의 10호를 다양하게 조합하여 4점의 회화작품을 제시하는데 이는 우측 공간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과 대조된다. 좌측 공간은 하나의 요소가 다양하게 변주되어 각기 다른 작품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가변적이고 정하지 않은 부정은 우측의 미리 정해놓은 조형성과 대조된다. 색채적으로도 안료의 색과 빛의 색이 대조된다. 또한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은 평면 위에 놓여있기보다 그 근원이 전시장 너머, 세상 너머의 초월적인 ‘광원’을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다르다. 작가는 이러한 흑백과 색조의 대조, 미리 정해진 작품과 정하지 않은 부정의 작품의 대조를 제시한다. 그는 이 대조를 통해서 관람객이 리듬의 강약처럼 이질적 공간을 여행하게 한다.
만짐과 부정
우선 그의 작품은 손으로 그렸는데도 마치 나이프나 다른 기구들을 사용한 것처럼 매우 다양한 기법을 보여준다. 손끝으로 찍어낸 듯한 그림, 손날로 빠르게 칠한 그림은 붓으로 그려낸 것과는 달리 좀 더 직접적이다. 손으로 만져내는 물질은 다른 도구보다 육체적으로 감각화된다. 작가는 손으로 다양한 색을 바르고 다시 그 위에 물감을 흘리고 미끄러뜨려 자취들을 만들어낸다. 신체의 움직임은 몸의 기록이자 자취로서의 움직임이다. 여러 색을 겹쳐 놓은 자취가 있는 추상의 형태(색채)들은 단순히 불투명한 덧칠이 아니라, 실제 색면이 있는 흔적(trace)이다. 이것은 색층 사이에 이야기가 있고 단순하게 밑의 색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흔적이 남아있는 부정이다. 즉, 과거가 공존하는 부정이다. 이는 차연(differance)으로서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부정하는 것이다. 손으로 그린 그림은 촉각적인 공간을 열어놓아 직접적으로 몸과 인접된다. 즉 캔버스와 물감(객체) 사이를 작가가 ‘만지고’ ‘만져지는’ 관계들을 제시한다. 메를로 퐁티의 ‘만지기’를 통해 주체와 객체 사이의 이분법을 부정한다. 만지기는 만져지기를 통해서 이뤄지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의 이러한 행위는 손끝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제스처’라는 의미들을 형상화한다. 이는 “감성적인 유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감의 유출처럼, 손끝에 의해서 빠르게 밀려나 흰색을 남기면서도 밑의 색을 드러내 순간적이며 시간적인 존재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간은 직접적이고 분출적인 마음과 물감의 유동성을 이뤄낸다. 이렇게 직접적인 촉각은 이성이기보다는 ‘욕망’과 같은 상징적인 동인들을 생각하게 하는데 이는 시각에 의존한 회화보다 회화의 육체화란 의미를 강조한다. 이러한 손의 직접성은 회화의 본질을 언어나 생각, 개념 이전의 상태로 바꾸어 놓는다. 롤랑 바르트의 표현처럼 박영남에게도 손은 욕망으로서 억제하는 합리성의 의미를 넘어서고 있음을 발견한다. 손의 욕망은 무수히 반복되는 손장난이나 낙서와 같은 자유로운 선들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울러, 작가는 물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손바닥으로 빠르게 긁어내는 행동, 뿌리는 행동, 그리는 행동, 찍어내는 행동 등으로 욕망을 다양하게 제시한다.
그렇다고 작가가 손의 욕망만을 형상화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살펴본 다양한 대조는 시각과 촉각 사이의 대조로도 나타난다. 사실 그의 회화는 거리를 두고 볼 때 강력한 조형적 구성이 존재한다. 시각은 생각과 관념, 본질 등과 어원적(idein-idea-ideology, eidos)으로 연관되는 것으로 명백함, 사유, 상상력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 작가는 촉각적인 공간의 의미와 함께 이러한 시각적인 의미들을 용인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부정들이 공존하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의 부정의 몸짓은 차연을 포함하여 두 가지의 또 다른 부정을 제시한다. 하나는 부정(不正, 否正)하기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不定)의 부정이다. 마르셀 뒤샹이 제시한 ‘정하지 않은 부정’의 의미를 그에게도 연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박영남은 작품의 완성이 그 제시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작품의 완성이란 전시될 작품 한 단위의 완성이다. 이미 한정되고 결정된, 완성된 회화이기보다는 계속 변화하는 열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부정의 작품은 완성되었으나 역설적으로 진행 중이다. 그래서 그 작품의 외연은 열려있는 것이다. 그리고 작품을 조직하는 요소들도 열려있어서 ‘가능태’와도 같다. 이 ‘열린 작품’은 크기와 구성이 경우마다 다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 그것은 정하지 않은 부정이다. 아울러 이 개인전에서 작가는 <replica> 이외에 다른 작품 제목이나 제작 시기를 관람객에게 제시하지 않는다. 이 점 역시 ‘과정 중의 작품’처럼 한정하지 않고 열어놓는 개방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정하지 않은 부정(不定)으로서 작품의 일반적인 의미를 부정하며 열린 공간으로 관람객을 초대하는 것이다.
사각에 대해 작가는 ‘대지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설명한다. 작가는 여기서 수직과 수평의 격자를 추론했고 마치 수학에서 x와 y처럼 공간을 구성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이러한 시각은 현대회화나 조각,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시각적 요소인 그리드, 곧 격자와 같다. 그의 격자는 현대미술의 메커니즘, 추상성의 격자와 같은 시대성을 갖는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과거 추상작가들처럼 닫혀서 굳어진 형태를 띠지 않는다. 때에 따라서 두 개의 캔버스로 형성된 작품은 제작시기에 결정되었기보다는 완성 후에 다른 화면과 연합되기도 하고 또 다른 작품과 바뀌기도 한다. 특히, 이번 사각형의 연작을 통해 작기 복제라는 의미가 드러나는데 10호 단위에서 시작해 다른 작품들과 이웃하며 놓여진 것이다.
실제로, 그가 지난 한 해 동안 준비한 10호 작품은 모두 200점인데 이번 개인전에 70점을 사용하였다. 23개짜리 작품, 2개로 떨어진 연작, 24개짜리 작품 등으로 구성된다. 때로는 10호 9개의 같은 수의 캔버스가 다른 형태로 연출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웃하기는 실제로는 작품으로서 그 외곽의 모양을 완성시보다는 캔버스들을 이웃시키며 ‘형성’하는 과정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에게 ‘이웃하기’는 ‘하나’의 작품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사각의 확대는 우선 10호 내에 가로, 세로 각 3줄로 사각형 9개를 만들어내며 이것이 여러 개의 10호로 놓이면서 사각형은 여러 개로 증식한다(repliaca, replicare). 색의 단위로 구성하고 그 면을 9면의 사각형으로 나누어 색조를 조합하고 이것을 병렬로 제시하여 색면의 숫자를 늘려나간다. 이는 ‘자기복제’이고 ‘증식’이다. 즉, 복제(replica)는 다시 보면 “다시 주름잡기(re-pli)”인데 그는 화면을 1에서 9로 미시적으로 구분하면서 동시에 가장자리(repli)에 이웃시켜(竝列) 복수화한다(replicare). 이 어원(replicare)처럼 그는 화면을 뒤로 접어들어가거나 빛을 반사하는 행위들을 포함시킨다. 이는 무한으로 확장될 작품의 증식이다. 작가는 그 요소들(형태소 또는 의미소)처럼 단위를 형성한다. 이렇게 증식해나가는 작품 수는 색을 통해 형태를 전개해가는 ‘이야기’를 더 길게 하여 마치 장편영화처럼 늘려 놓는다. 이러한 수적, 양적인 팽창은 순수한 조형성의 이야기를 드라마처럼 늘리는 것이고 이때 전혀 다른 미술만의 ‘조형 이야기’가 형성된다. 또한 이때 사각은 디지털 세계의 링크되는 논리처럼 상호 연관되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하는 구조를 갖는다. 이러한 박영남의 사각(텍스트)은 마치 실제가 있는 하이퍼텍스트의 기능을 수행한다. ●

박영남은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서양화과와 뉴욕시립대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그는 1979년 고려화랑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제3회 김수근미술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아라리오갤러리 등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국민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캔버스에 아크릴 253×600cm 1999(왼쪽) 금호미술관 전시광경

<달의 노래> 캔버스에 아크릴 253×600cm 1999(왼쪽) 금호미술관 전시광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