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FACE 2015 박지희

“공간적 구조 변화에 대한 실험만이 아닌 그 공간 속에서의 삶의 방식과 패턴에 대한 실험은 작가의 관심이 그저 과학적인(물리적이고 화학적인) 공간 변화의 차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공간 속에서의 생활과 삶의 차원에까지 포함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 민병직 대안공간루프 바이스디렉터

비가시적 유기체의 생존실험

시큼털털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음식물 처리장을 방불케 하는 냄새에 이끌려 다가가면 동파이프에 꼬치처럼 꽂혀있는 과일을 마주하게 된다. 가공하지 않은 생과일은 시간이 흐르며 썩어간다. 썩은 과일은 동파이프와 화학작용을 일으키면서 에너지를 생성한다. 변해가는 과일과 낡은 동파이프가 만나 새로운 생명을 탄생하는 ‘기초전지’로 변모한다. 실험실에서 일어날 법한 이 작업은 박지희 작가의 〈과일 전지 시리즈〉 이야기다.
2012년부터 2년간 런던에 거주한 작가는, 에일스버리(Aylesbury)와 헤이게이트(Heygate) 공공지원주택 단지의 재개발 논쟁이 첨예한 런던 남부의 엘리펀트&캐슬에 거주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황폐화된 이 지역에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사이에 브루털리즘(Brutalism) 양식으로 대규모 주거복합단지가 세워졌다. 일명 ‘콘크리트 왕국’으로 불리는 이곳의 노후한 공공지원주택건물을 둘러싸고 2009년 이후 정부와 거주민은 서로 개발과 유지보수 논리를 펴며 본격적으로 갈등을 드러냈다. 그 중심에서 작가는 짧은 시간이나마 해당지역에 거주하는 구성원이면서 동시에 맥락과 무관하게 콘크리트 건물 자체가 가진 압도적인 스케일에 경도되는 이방인이었다. 내부인이자 주변인. 박지희의 작업이 개인적인 감정의 동요를 최대한 배제한 채 실험구조를 선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는 직접 경험한 장소를 주제로 삼지만, 사회·정치적 이슈에 대한 동감의 표현을 피하고 수치와 계산을 통해 객관화된 다이어그램으로 풀어낸다.
영국에서 첫선을 보인 〈과일 전지 시리즈〉는 건물 노후의 중심에 있는 배관시설인 동파이프와 그 지역 이주민이 즐겨먹어 쉽게 구할 수 있는 열대과일을 재료로 사용했다. 노스탤지어를 자극하거나, 현장의 모습을 그대로 담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기보다는, 그곳의 식문화와 거주문화를 조합해 재개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한편 대안공간 루프에서 열린 그녀의 국내 첫 개인전 〈직사각형은 언제 평행사변형이 될까?〉에서는 논현동을 주제로 실험을 이어갔다. 작가가 오래 거주한 공간인 논현동은 재개발 이슈의 중심에서 비켜나 있다. 논현동 주민들은 경제적인 조건에 맞춰 이 지역을 선택했을 뿐, 이 지역만의 특정한 정체성은 없다. 작가가 자신이 속한 동네를 작업으로 끌어들이게 된 계기는 우연히 영화 홍보차 방한한 영화배우 윌 스미스가 주변에 있는 고급 호텔 스위트룸에서 관광지를 바라보는듯한 시선으로 찍은 논현동 다가구주택지역의 사진 한 장이었다. 작가는 이 사진에서 타자화된 시선을 통한 낯선 풍경과 맞딱드린다. 이를 시작으로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논현동 다가구주택 밀집지역의 공간을 실험이라는 도구를 통해 가시화하는 과학/미학적 치환을 시도했다. 논현동이라는 지역을 정의 내리기 위한 실험은 동네 원룸의 공기부피와 무게를 측정하고 이를 구로 만들어 논현고개의 경사각에 해당하는 곡선 구조물에서 굴리는 것이었다. 또 코너모양의 테이블을 만들어 지역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는 방수천의 녹색 안료가 되는 산화크롬을 발생시켜 공기 중으로 날려 물리적 이동량을 실험했다. 공간과 장소의 존재를 화학과 물리적 실험으로 풀어내는 시도다. 또한 과일과 함께 동네 편의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조리식품을 사용해 <과일 전지 시리즈>를 만들었다. 이러한 실험을 통해 이름없는 공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죽어있는 공간이 아닌 지속적 변화가 가능한 곳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실험적인 장치를 통해 작가는 가시적인 사실 저변에 깔려 있는 비가시적인 것을 이끌어낸다. 또한 정체성이 모호한 공간에 뚜렷한 명제와 정의를 제시한다. 작가가 평소 “인간의 삶은 전지와 같다”고 생각해서 일까. 숨을 쉬고 있어도 멈춰있는 현대인과 그들이 사는 공간을 건조한 방식으로 재가시화시키고, 에너지를 부여하는듯 하다. 임승현 기자

박지희는 1984년에 태어났다.
이화여대와 동 대학원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영국 슬레이드 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2013년 영국의 기업 레어드 PLC와 커미션 작업을 했고 2014년 영국 케니스 아미타지 재단으로부터 젊은 조각가상을 받았다. 같은 해 런던의 한미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현재 7월 9일부터 8월 2일까지 대안공간 루프에서 국내 첫 개인전이 열리며 서울과 청주에서 작업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