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아티스트] 이진용-이것은 가방이 아니다

이것은 가방이 아니다

작가 이진용에게 구상과 추상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그는 스스로를 본질주의 작가(本質主義, Essentialist)라고 말한다.
비록 외형상 극사실회화처럼 보이지만 정작 자신은 대상을 보고 그리지 않으며 그 그림은 머릿속에서 나오기 때문이라는 것. 이진용의 이런 발언은 대상이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그림을 구상회화라고 주장했던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와 대척점에 있지만 일맥상통 한다. 5월 24일까지 서울 압구정동에 위치한 갤러리 바톤에서 이진용의 대형 신작을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손때 묻은 낡은 가방-그림은 그 속에 담긴 시간의 축적과 감동을 작가 이진용의 머릿속에서 재구성해 표현한 또 다른 차원의 추상회화로 읽힌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

이진용은 가방과 책이라는 구체적인 사물과의 유사성 속에서 그것을 재현했다. 보는 이는 가방과 책을 모방한 그림을 통해 그 대상을 재인식한다. 그것은 거대한 벽화이기도 하고 캔버스로 이루어진 설치와도 같다. 한쪽 벽면 전체가 완전히 그림으로, 화면으로 직립해 있다. 다른 쪽 벽에는 책등을 보여주는 대형 화면이 가설되어 있다. 사각형의 캔버스 틀이 그 자체로 부풀어 올라 사물 자체가 되어 존재한다는 느낌이다. 배경 없이 그대로 사물이 되어 육박하는 그림은 자신의 존재감과 그 존재 위에 얹혀진 시간의 깊이와 세월의 연륜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본래의 크기보다 훨씬 커지는 데서 오는 압도감이 우선적으로 망막을 막아선다. 실제 여행용 가방과 오래된 책들이 놓여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그려진 그림이다. 가죽 가방의 질감과 세부장식, 부착된 스티커 그리고 낡은 책등과 빛바랜 종이, 갈라지고 삭은 시간의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는 고서의 상황성을 묘사한 그림은 탁월한 재현술에 기반을 둔다. 무척 잘 그려진 그림이다. 고영훈과 이석주의 책 그림, 강형구의 인물화, 이정웅의 붓그림 등을 연상시키는 놀라운 눈속임 기법이다.
생각해보면 이 작가는 가방과 책을 그렸기보다는 그 사물을 빌려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흐름과 힘, 그에 따라 변화하며 서서히 소멸해가는 존재의 허무, 비애 등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단지 보이는 대상의 묘사가 목적이 아니라 내용, 주제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니타스적인 정물화의 흔적이 감지되기도 한다. 사실 모든 사물은 그 시간의 힘에 의해 사로잡혀 있는 것들이고 죽어가는 것들이다. 따라서 오래된 사물은 유한한 인간에게 많은 생각을 자아내게 하는 존재다. 그것이 수집의 의미이기도 하다. 이진용은 오랜 세월동안 엄청난 사물들을 수집해왔다고 한다. 그가 그려낸 오래된 책과 가방 역시 그의 수집목록 속에서 나온 것들이다.
야나기 무네요시에 의하면 수집이란 심리적으로는 흥미요, 생리적으로는 성벽(性癖)이다. 수집은 물건을 향한 정애다. 물건을 구입하는 행위는 그러한 정의, 기연(機緣)을 만드는 일이다.(야나기 무네요시,《  수집이야기》, 산처럼, 2008) 수집은 물건에 대한 이해를 강화하는 길이다. 무언가 자신을 몰입하게 하는 대상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수집하고자 하는 욕망은 무척 인간적인 행위일 것이다. 수집은 합리적인 조치이기보다 훨씬 불가사의한 작동을 한다. 특정 사물을 편애하고 이를 모으는 사람은 수집하는 물건 속에서 또 다른 자신을 찾아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알다시피 렘브란트는 명화를 모으는 데 가진 돈을 모두 탕진했다. 워홀 역시 대단한 컬렉터였다. 우리의 경우 김환기, 도상봉, 권옥연, 김종학 그리고 구본창, 현태준 등이 알려진 수집가/작가들이다. 특별한 골동품이 아니더라도 일상의 소소한 물건을 수집하고 여기에서 그 조용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에 귀 기울이고 그 사소한 것들에 숨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시도는 모든 예술가들의 공통된 기호이나 감성일 것이다. 앞서 언급한 작가들은 모두 자신의 수집품에서 영감을 얻어 작업을 해나간 경우에 해당한다. 이진용 또한 대단한 수집가라고 한다. 그는 자신을 사로잡는 온갖 오래된 사물들을 수집하고 이를 완상하면서 그것이 지닌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구현하고자 한다. 그 아름다움은 오래된 물건의 피부에 서식하는 시간, 죽음의 자리다. 특히  정신과 물질을 담는 용기이자 전달 매체인 책과 가방이 주는 아름다움, 그 안에 켜켜이 쌓인 역사와 그 속에 배어있는 장인정신이 만들어내는 아우라에 매료된 그는 그러한 아우라를 그리고자 한다.
“제게 수집은 취미가 아니라 운명입니다. … 저는 옛사람들이 만든 물건에서 만져지는 장인정신과 그것들을 지녔던 사람들의 손길과 견뎌온 세월에서 무한한 감동과 전율을 느낍니다. … 이런 것들이 인류의 문화유산이자 역사겠지요. 저는 이런 것들의 소중함과 여기서 느끼는 감동과 에너지를 제 작품을 통해서 전달하고 싶습니다.”
(전시도록에 실린 김순응과의 대담에서)
그러니까 그의 그림은 그가 수집한 물건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그 수집한 물건의 외형을 그대로 모방, 재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또 다른 것들을 첨가 하는 것이 그의 그림이다. ‘억겁의 시간’과 그로부터 받은 ‘감동과 에너지’를 그림 밖으로 표출하고자 하며 따라서 그는 자신의 작업이 극사실적인 그림에 머물러 있지 않다고 강변한다.
“제 작품은 극사실주의가 아닙니다. 아니 사실주의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대상을 보고 그리지 않습니다. 제가 가방을 그릴 때 그 가방은 제 머릿속에서 나옵니다. 제가 무수히 많은 오래된 가방에 축적된 시간을 보면서 받았던 감동이 머릿속에서 재구성되어 그림으로 표현됩니다. 그런 면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작품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겁니다. … 저는 대상의 본질이나 사물의 진실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굳이 카테고리를 정하라면 저는 본질주의 작가(Essentialist)가 되고 싶습니다. … 저는 사물의 본질적인 무엇, 보편적이고 영원불변한 무엇 그리고  객관을 그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전시도록에 실린 김순응과의 대담에서)

2012년 아라리오갤러리 청담에서 열린 이진용의 개인전 광경. 작가가 수집한 물건과 그림이 함께 전시됐다

2012년 아라리오갤러리 청담에서 열린 이진용의 개인전 광경. 작가가 수집한 물건과 그림이 함께 전시됐다

기교와 철학이 겸비된 작가
주관을 부정한 객관의 세계를 그대로 응시하고자 하는 것, 동시에 그 객관의 세계에 상상력과 변형이라는 주관의 산물을 삽입하려는 시도로 이루어진, 주관/객관이 한자리에 서식하고 겹쳐지는 그리기!
흥미로운 것은 최근 극사실적인 그림에 대표적인 작가들이 한결같이 자신의 그림을 극사실주의 혹은 사실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강하게 부정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진 보수적 기법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는 것, 보이는 대로 그리기보다는 상상력과 변형, 연출을 동원해 이전의 사실주의 그림과는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얘기다. 피상적으로는 대상과 닮아 보이는 그것이 실제로는 허구의 이미지로 가득한 거짓의 세계, 이른바 시뮬라크르(simulacre)라는 것이다. 이는 강형구의 작가의 변(辯)과 매우 유사하다. 초상화의 경우 그 연출방식도 매우 흡사하다. 이진용의 그림은 실제 모델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상상력의 산물이 된다. 수십 년간 수많은 책과 가방, 그리고 그 안에 스며들어 있는 관계와 가치, 시간들을 관찰하면서 자연스럽게 쌓인 기억들과 영상, 물리적 감촉에 대한 시각화가 오랜 시간 축적되면서 ‘실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의 회화적 구상화’의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책과 가방의 이미지들은 사물의 본질에 대한 한 화가의 극단적인 추구의 결과인 셈이다. 가방과 책의 외형 그 너머 어딘가에 존재하는 본질에 대한 극한의 탐구와 절제된 고도의 예술적 테크닉의 이상적인 결합을 보여주고자 한다는 이진용에게 재현이란 단지 눈앞에 자리한 대상의 사실적인 묘사 그 자체로 귀결되는 차원이 아니라 그렇게 재현된 존재들로 인해 환기되는 정서나 느낌의 고양에 있다. 주어진 대상의 즉물적인 묘사 너머의 무엇인가를 환기시키는 작업이란 얘기다. 그러니 다분히 관념성이 강한 그림이다. 그가 그려낸 가방과 책은 사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그가 상상해서 다시 연출한 가짜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기존 책과 가방을 참조해서 이루어진다. 사실 그 위에 슬그머니 허구를 창출하는 전략이다. 왜곡과 변형, 연출을 통해 리얼리티보다 더 실재적 효과를 창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동시대 극사실주의를 기법으로 내세우는 작가들의 작업 알리바이로 작동된다.
“인간이 상상하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작품 말입니다. 작품의 힘은 ‘경탄’에서 나오고 경탄은 무엇이 인간의 한계 밖에 있을 때 나옵니다. 그림에 대한 경탄은 이론이나 철학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미술은 문자 그대로 시각예술(視覺藝術, Visual art)입니다.”
(전시도록에 실린 김순응과의 대담에서)
그렇다면 그의 그림은 여전히 일루전/모방의 즐거움에 호소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보면 그것은 사물의 표면을 열심히 따라가보는 그리기이자 사물의 질감에 대한 편집증적 편애에 해당한다. 오로지 표면만을 애무하는 그리기는 회화의 본질적인 영역일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는 사물의 감각적인 질감을 가지고 유희하는 일이고 그것들과 한 몸으로 접속되는 일이다. 새삼 미술행위가 눈이라는 감각기관과 관계되어 이루어지는 형국을 조망하고 그 눈속임에 기반을 둔 조형행위의 여러 상황을 통해 미술의 가장 오래된 본성을 부활시키고 있는 동시대 극사실적인 회화의 존재 이유 및 그 전략과 어법, 특성들을 헤아려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과연 이진용의 이 같은 그림이 기존의 사실주의적 그림들과 어떤 변별성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대회화로서 어떠한 의미 있는 담론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까? 재현의 논리, 동일성의 법칙에서 빠져나온 비재현적 회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20세기 이후 회화는 사실상 그러한 재현의 논리로부터 달아나는 방법을 지속해서 모색해왔다. 중요한 것은 재현의 틀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이 단지 모방적인 회화의 닮은꼴을 변형하거나 약간 틀어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사물과 세계를 추인하는 재인과 상식, 그 특정한 가치판단을 내포하는 도그마 자체를 문제시하는 선에서 풀려나와야 한다는 생각이다. ●

 

(왼쪽) 캔버스에 유채 131×194cm 2013 갤러리 바톤 전시광경

<Hardbacks #H1H05> (왼쪽) 캔버스에 유채 131×194cm 2013 갤러리 바톤 전시광경

 

이진용은 196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동아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했다. 1984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조현화랑, 박여숙화랑, LA Artcore 갤러리, 아라리오 갤러리 등에서 24회 개인전을 열었다. 부일미술대전 대상을 비롯해 MBC미술대전, 중앙미술대전, 동아미술대전 등에서 수상했다. 현재 부산에서 작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