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김정헌 생각의 그림·그림의 생각: 불편한, 불온한, 불후의, 불륜의, … 그냥 명작전

아트스페이스 풀 3.17~4.10

홍지석 단국대 한국문화기술연구소 연구교수

한 작가의 작업을 회고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통시적 축에서 그 작가 작업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살피는 것이다. 초기-중기-후기의 형식/양식 변화의 관점에서 작가를 다루는 방법 말이다. 다른 하나는 공시적 축에서 작가의 작업 양상을 분류하는 것이다. 해당 작가의 전체 작업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몇 가지 양상을 범주화하는 접근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김정헌의 작업을 역사적으로 정리한 연구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미완의 상태로 미술사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상태다. 마침 이번 전시와 더불어 화가 자신이 그간의 작업을 화집, 문집 형태로 정리해 출판했으니 향후 김정헌의 작업에 접근하는 미술사가나 비평가들에게 유용한 자료가 될 것 같다. 하지만 정작 그 화집을 일별해보건대 김정헌의 전체 작업을 시간의 흐름에 따른 형식이나 양식 변천이라는 수준에서 접근하기는 역시 수월치 않아 보인다. 그간 이 작가는 산동네, 도시, 농촌(또는 흙), 한국 현대사 등 여러 주제를 다뤄왔지만 그 진행 과정에서 작품의 형식, 양식의 결정적 변화를 포착하기가 매우 어렵다. 김정헌의 작업에서 역사의 변화는 형식이나 양식보다는 내용, 곧 그림에 포함시킨 당대의 사회상에서 좀 더 잘 드러난다. 특히 작품 안에 포함된 단어나 문장들, 이를테면 ‘럭키 모노륨’ ‘그 해 5월 광주의 푸르름’ ‘백조의 아몰랑 꿈’ 등 해당 작업의 역사적 위치를 지정해주는 지표들이다.
하지만 공시적 축에서 김정헌 작업의 특징적인 양상을 범주화하는 작업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지금까지 김정헌의 작업을 다룬 논자들은 대부분 김정헌이 자신의 화폭에 포함시킨 이질적인 요소들, 곧 글자(문자 텍스트)와 그림(이미지), 추상과 구상,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들이 작품 안에서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럭키 모노륨… 풍요한 생활을 창조하는…>(1981)을 전후로 한 시기에 그의 작품에 등장하여 이후 그의 화면에 가시적으로 부각된 문자/글자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이에 대해서는 먼저 작가의 개입으로 작품 안에 공존하게 된 이질적인 것들이 적대적인 방식으로 상호 작용하는 양상에 주목하는 논의들이 있다. 이를테면 <럭키 모노륨…풍요한 생활을 창조하는…>에서 “풍요한 생활을 창조하는”이라는 문장은 그림의 다른 이미지들(가령 허리를 숙인 농부의 뒷모습)과 격하게 충돌하며 이 충돌은 문장의 메시지를 산산조각내는 결과를 빚었다. 김정헌 자신도 이렇게 한 공간에 결합된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를 갉아먹거나 오염시킬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과거 어떤 자리에서 “경박스러운 회화성, 스티커나 반짝이는 큐빅으로 무거운 주제를 전복할 수 있지 않을까”(1997)라고 물었다. 과거에 박모(박이소)는 김정헌 작업에서 내러티브가 파괴되고 분열된 단어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양상에 주목해 그의 전체 작업을 “마치 산낙지의 잘린 다리, 몸체 등이 각자 꿈틀대는 형상”(1997)에 비유한 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박찬경(1997)은 데리다를 참조하여 김정헌이 의미의 유보, 또는 지연을 도모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질적인 것의 결합에 더해 김정헌 특유의 “대충 그리거나 못 그리거나 그리다 말거나 하는 방식”은 우리에게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유보를 체험하게 한다는 것이 당시 박찬경의 판단이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방향의 논의들이 있다. 여기서 김정헌의 작업에 개입된 이질적인 것들은 적대적으로 상호 작용하기보다는 즐겁게 화합하여 어떤 긍정적인 메시지들을 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예를 들어 2004년에 발표한 <김정헌論>에서 심광현은 김정헌 작업에 개입된 글자들(문장들)이 “침묵하고 있는 그림을 작동하게 하는 ‘의미론적 끈’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친숙한 어조로 말을 거는 제목들” 때문에 “관객은 벽면에 걸린 그림과 대화를 시작하며” 그 결과 다양한 의미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같은 해에 백지숙도 글과 그림이 결합된 김정헌의 작업을 상호텍스트성의 사례로, 즉 일종의 이야기 그림(narrative painting)으로 다룬 글을 발표했다. 여기서 롤랑 바르트가 말한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의 ‘정박’과 ‘중계’라는 개념은 김정헌 그림에 개입된 단어/ 문장들의 기능을 설명하는 적절한 개념으로 부각되었다. 심광현과 백지숙의 논의에서 김정헌의 작업은 조선시대의 ‘시서화 삼절’ 또는 ‘문인화’처럼 글(書)과 그림(畵)이 평화롭게 상호 작용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백지숙의 주장대로라면-만약 21세기에도 문인화가 가능하다면-김정헌은 “동시대적 문인화를 그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양자 사이에서 김정헌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내가 보기에 김정헌은 일종의 취사선택의 방식으로 두 방향을 모두 취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부정하는, 또는 적대하는 것을 다룰 때 그림에 개입된 이질적인 것들의 적대적 공존이 두드러진다. 반면에 그가 긍정하는 것, 옹호하고자 하는 것을 다룰 때 그림에 개입된 이질적인 것들은 서로 화합한다. 2016년 전시 작품 가운데 <이상한 풍경> (1999)은 전자에 속한다. 분단된 양자의 한쪽에 이리저리 흩어진 ‘쭉쭉’ ‘흑흑’ ‘낄낄낄’ ‘꿀꺽꿀꺽’ 같은 단어들은 그려진 이미지들과 적대적으로 기능하여 전체적으로 음산하고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반면에 <희망도 슬프다>(2015)에서 그림에 포함된 ‘희망도 슬프다’는 문장은 어두운 바다, 푸른 하늘 흰 구름, 노랗게 빛나는 창문과 더불어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의미 창출에 기여한다. 하지만 그림에 개입된 이질적인 것들이 언제나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기능하거나 작동하지는 않는다. 부정에는 언제나 긍정이, 긍정에는 언제나 부정이 깃들어 있다. 파괴가 있다면 건설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2016년 전시는 어쩌면 이런 자신의 애매한 위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는 시도일지 모르겠다. 작가는 이 전시에 “생각의 그림?그림의 생각”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그 제목이 아우르는 양방향이 나로서는 야릇하게 느껴진다. 그 양방향을 포괄하는 것이야말로 “이 작가가 정치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는 전략이 아니었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친 까닭이다.

위 김정헌 <국가를 향해 쏴라>(맨 왼쪽) 캔버스에 아크릴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