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이정배 이미-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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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역사관 2015.6.25~6.25

김최은영 미학

연약한 식물이다. 간신히 유리창에 매달린 씨앗은 뿌리가 깊지 않다. 그러나 생명이다. “볼품없는”(신현진, <볼품 없음에 대하여…> 이정배 개인전 서문) 그것에서도 싹이 텄고, 잎이 달렸다. 이젠 제법 풍성한 인공의 식물은 여전히 생존 중이다. 자유와 평화, 평등과 박애가 아직 죽지 않았단 뜻이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사무동 유리벽에 이정배의 <이미-항상>은 비역사적 단어를 선택 후 역사적 공간에서 다루어 과거, 역사 속 연약한 정의들이라는 교집합을 도출한다. 동시에 온전히 치유되지 못한 채 시간에 매몰되었던 그 시절 명제에 자라는 식물을 통해 현재와 진행이라는 시간성을 부여한다. 이렇듯 자유, 평화, 평등, 박애가 작가가 상정한 역사성과 시간성 속에 다뤄지면 일상의 용어에서 벗어나 미래(“고통의 씨앗이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상징의 언어”(이정배의 작업 노트))를 지닌 서사적 구조를 띠게 된다. 때문에 씨앗을 단어 모양으로 배열하는 인위적 행위는 단순한 가독을 통해 노골적 이해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마찬가지로 자라는 식물을 연출하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추가로 잎을 붙여 나가는 행위를 진행한다. 시트지로 만들어낸 인공의 식물은 작가의 작위가 선행되어야만 싹이 트고, 자라나는 순환의 생명력을 획득할 수 있다. 행위, 즉 실천을 통해야만 얻어지는 가치에 대한 작가의 의도다. 씨앗프로젝트가 1년이라는 시간과 한 달에 한 번이라는 작가적 행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유기적 관계성과 진행성이라는 명분이기도 하다.
작업은 여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목격한 여러 관람객과의 소통 여부가 본 설치작업에서 제안된 또 하나의 프로세스다. 아직 현재의 시간성은 여백의 가능성으로 남아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유리벽에 자라는 풀들은 보는 사람들의 지금일 뿐이다. 이정배는 그 지점을 예민하게 직감했다. 내가 목격하지 못한 과거에 대한 막연한 오늘, 그리고 의식 없는 나의 행위로 비롯될 미래의 가치 변화에 대한 물음을 자라나는 식물로 대변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에 따른 시각적 결과물은 식물의 진위 여부와 공간성, 시간성에 지배되지 않고 작가의 의도를 수행하는 도구로 읽히며 충분한 역할을 수행한다.
유리벽에 꽂힌 듯 서있는 풀들은 마치 의도된 하나의 구조물 같다. 깊게 뿌리내릴 수 없는 차가운 속성과 투명하지만 분리를 위한 막음이 분명한 벽의 속성은 잘 버티고 있는 긴장감처럼 보인다. 식물의 뿌리가 조금 더 자라면 견고한 유리벽은 깨어질 것이다. 유리벽이 깨진 후 식물이 무성하게 영역을 확장하면 굳이 자유와 평화, 평등과 박애를 목격하고 인식해야 할 만한 의식행위가 필요 없을 지도 모를 일이다. 더 이상 연약한 식물이 아니다.
“씨앗 프로젝트는 국가의 과거사 중 고통의 기억을 씨앗으로 비유한다. 이 고통의 씨앗이 현재와 다가올 미래에 희망으로 작동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고통의 씨앗이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상징의 언어로 표현되고, 그 씨앗으로 형성된 언어에서 싹이 트고 잎이 나고 무성한 여름을 맞이한다. 열매를 맺으며 겨울을 맞이해도 씨앗은 사라지지 않는다. 또 다른 씨앗이 자라나 미래를 희망의 것으로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 이정배
예술이 사회에 개입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소란한 웅변과 적나라한 고발도 쉽게 목격된다. 오늘 이정배 작가의 <이미-항상> 프로젝트는 어쩌면 지금 막 불붙은 뜨거운 감자는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쉽게 잊기엔 너무도 중요한 문제다. 광복70주년 기념 씨앗프로젝트. 광복이 낡은 감상이 되지 않길 바라는, 역사와 그 역사 속 자유와 평화가 철지난 의식으로 치부되지 않길 바라는 작가의 제의가 조용히 담겨 있다. 날카롭지 않지만 예리하고, 유연하지만 견고하다.

위 이정배 <이미-항상> 아크릴, 시트지, 벽화 2015~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