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차종례

차종례

분도갤러리 11.3~29

대구에서 처음 선보이는 차종례의 개인전에선 2009년부터 2014년에 제작한 20여 점의 작품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가의 작품은 <드러내기/드러나기(Expose exposed)> 연작으로 이루어졌다. 전시된 작품을 대면하고 처음 느낀 감상은 같거나 다르게 반복되는 뾰족한 돌기나 봉긋 솟은 둥근 모양의 형태들이 마치 수면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만든 풍경 같은 것이다.
작가의 <드러내기/드러나기> 연작의 리듬감은 자연과 인공, 평면과 입체, 선과 형이 빚는 일종의 도형퍼즐(puzzle)이다. 이 미묘한 형상의 퍼즐과도 같은 작품을 보면서 특히 주목하게 되는 것은 ‘선’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벽면에 설치한 사각의 퍼즐이나 바닥에 놓아둔 입체에도 부각시켜 놓은 시각적 패턴이고, 나무판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놓은 건축적 덩어리에 장단의 흐름 따라 ‘드러내기/드러나기’하는 형태(形態)이다. 크거나 작은 돌기 모양의 원뿔이 깎고 깎이며 그 실체가 선(line)인지 형(shape)인지 혹은 선과 형, 그 어딘가의 중간지점에서 만나 회화가 조각이고 조각이 회화가 되듯이 나무의 결 따라 역동적인 리듬감을 ‘드러내기/드러나기’하고 있다는 것이 두 번째 느낀 감상이었다.
이러한 선과 형이 갖는 형태에 대해 좀 더 가까이 그리고 깊게 들어가 보자는 생각을 하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선과 형이 외적인 형식이지만, 작가는 소재의 내적인 고유성을 드러내기 위한 유기적인 곡선의 ‘드러내기/드러나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전시된 작품을 담아 와서 이미지로 펼쳐 보자니 작가의 드러내기는 선의 율동으로 시각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시각효과는 예민한 촉수가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서 드러나는 선, 재목의 편차가 생기는 측면(edge)의 울림이다. 이 측면의 울림인 선은 나무의 실체를 이루는 결이자 혼이고 미의 형식이다.
이렇게 마치 잠든 나무의 결을 일깨워 원뿔이나 버섯 모양의 형상 따라 나무의 형과 결을 발굴이라도 하듯 깎아내는 작가의 솜씨는 긴 노동의 시간과 반복을 통해 회화인 조각이거나 조각인 회화가 된다. 그것은 우연과 필연을 포개놓은 시공간의 만남이고 섬세한 선과 형이 교차하는 탐미의 순간이다. 이 탐미의 시간은 시·공간이 포개지는 지점에서 만나는 나무의 결, 뾰족한 돌기가 부분과 전체를 이루며 무심한 나열 같지만, 작가의 섬세한 감성의 결과 나무의 결이 조형적인 형태를 입고 만나는 조각적 풍경이 된다. 이러한 시각적 울림은 나무를 다루는 정교한 조각술(carving)로 직선과 곡선이라는 원석을 찾아 보석으로 가공하듯 형과 선의 폭과 넓이에 강약과 장단의 리듬감을 부여한 입체 도형퍼즐이고 빠른 속도와 힘이 반복적으로 가해지면서 액체가 굳어 고체화된 선형퍼즐이다.
크고 작은 전시를 감상한 뒤 나의 선입견을 얼마나 벗기는가에 따라 여운이 길거나 깊게 남는다. 전시를 보고 나서 종종 선입견이 주는 약과 독의 경계가 어디쯤일까 생각하게 된다. 이번 분도갤러리 차종례의 전시를 보고 나서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여운은 인공적 형상의 집요한 반복이 주는 시각적 리듬이었다. 그리고 난 그러한 여운을 따라 선과 형의 울림이 주는 여운을 잡고 있다. 무엇보다 작가 노트를 통해 선입견의 문을 열고 다른 곳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다시 생각해본다.
“나의 작업은 노동과 시간들이 쌓여 만들어진 작은 오브제들이 모여 전체를 이룬다. <드러내기/드러나기> 연작은 수동과 능동, 작가와 관람자만이 있을 뿐 주어진 정보가 없다. 그것이 무엇인가는 나의 제작 의도와는 상관없이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이 결정하길 원한다. 선입견이 배제된 상태에서 관람자가 맘껏 상상해 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일 수도 있고 자연일 수도, 우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이 일상적 오브제의 무심한 나열에서 대양(大洋) 한 지점에서 일어난 한 조각의 파도가 태풍으로 성장하는 에너지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술가의 손길이 지나간 흔적을 바라보는 감상의 자리는 ‘드러내기’를 위한 감성의 결 따라 ‘드러나기’로 만나는 곳일 것이다. 그 시간 그 장소에는 마치 수행하듯 ‘깎고/깎여서’ ‘드러내기’와 ‘드러나기’가 하나가 되는 시각적 울림이 있다.

김옥렬·아트스페이스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