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Review] 남계 이규선

남계 이규선(南溪 李奎鮮, 1938~2014)의 타계는 한국화 화단의 큰 아쉬움으로 남게 됐다.
추상적 한국화 작업을 지속해 온 고인의 발자취는 한국화를 바탕으로 한 세계 보편성 획득이라고 평가받는다. 그의 전시를 기획했던 필자의 글을 통해 남계의 작품세계를 살펴본다.

文人畵를 지향했던 추상화가

장준구  이천시립월전미술관 학예연구실장, 미술사
지난 9월 26일, 한국화가 남계 이규선(南溪 李奎鮮, 1938~2014)이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러웠기에 주변의 아쉬움은 크기만 했다. 작품세계 이상으로 인망이 두터웠던 고인이었기에 미술계를 비롯한 각계 인사들도 눈물을 훔쳤다. 올봄 고인의 전시를 기획했던 필자에게도 그의 부고는 충격이었다. 그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음에 마음 한구석이 저려왔다.
이규선은 20세기 한국화(韓國畵)의 추상적 흐름을 선도해온 대표적인 작가로 196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50여 년 동안 추상적 한국화를 독자적인 방식으로 개척해왔다. 그는 ‘동양의 미술은 전통적’이고, ‘서양의 미술은 현대적’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서는 대안을 모색했고, 그 결과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이고, 동양적이면서 서구적인 관점에서도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이규선은 서양화로 미술계에 입문했고, 1950년대 후반 국전에서 서양화로 여러 차례 입선할 만큼 학습기에는 서양화에 주력했다. 그러나 대학시절 스승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1912~2005)과의 만남을 통해 문인화를 접한 뒤 동양화로 진로를 설정했고, 대학 졸업 이후 일신미술가협회(一新美術家協會), 한국화회(韓國畵會) 등 젊은 미술가들의 그룹 활동을 주도하며 한국화가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이규선이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1960년대는 한국의 미술가들이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사이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이는 동양화의 재료와 기법 그리고 정신을 이어받은 한국화 작가들에게 더욱 직접적이고 첨예한 문제였다. 이규선 역시 이에 골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많은 작가가 전통적 방식으로 회귀하거나, 서구의 추상적 방법에 경도되었던 반면 이규선은 한국의 정체성 계승과 세계적인 보편성 획득이라는, 어쩌면 상반되고 이질적인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했다. 이를 위한 그의 방법은 단순히 한국의 전통과 서구적 요소를 종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 사이의 공통분모를 발견하고 그 지점에서부터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었다. 그의 추상화풍 한국화의 단서는 이렇게 마련되었다.
사실 1950-60년대 한국화단은 “추상미술이야말로 진정 현대적인 미술의 형태이며, 참신한 작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추상작품을 제작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있을 만큼 추상미술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이규선 역시 이러한 흐름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가장 두드러졌던 앵포르멜과는 거리를 두고, 기하학적 추상과 전통 문인화의 미의식 및 양식의 융합을 통해 자신만의 예술노선을 걸었다.
그는 1970년대 초부터 기하학적인 구조와 절제된 선, 강렬한 색채와 먹의 대비를 이용해 한국화에서 추상화 작업을 본격화했다. 이후 1980년대에는 검은색과 다양한 밝은 색의 대비 및 발묵 효과를 이용해 자연의 물상들을 연상시키는 따뜻하고 유쾌하며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추상화로,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는 동양화의 핵심인 검은색과 흰색의 조화와 대비를 정갈하고 담백한 구성 속에 녹여낸 작품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했다.
전통문화의 정신적 뿌리에 대한 고뇌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까지의 작품들은 이규선의 예술세계의 또 다른 국면을 보여주었다. 과거의 작품이 수묵 중심의 무채색 화면을 통해 동양의 정갈하고 고요한 미(美)의 세계를 제시한 것이었다면, 2008년을 기점으로 한 작품은 밝고 맑은 색면을 검은색, 흰색의 색면과 함께 조화로운 비례의 수직구성 속에 배치함으로써 아름다운 삶과 자연을 노래하는 듯한 뉘앙스(nuance)를 느끼게 했다. 색채와 구성의 조화에 의한 화면의 아름다움은 작가 특유의 탁월한 감각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가 의도한 것은 단순한 시각적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미를 스스로의 낭만적이면서도 사유적인 방식으로 표현해낸 것이었다. 이처럼 이규선은 일관성 있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자신만의 추상적 예술 노선을 걸은 흔치 않은 작가였다. 종이와 먹이라는 전통적 재료를 통해 동양의 정신을 구현하면서도 서구적인 조형 감각을 흡수하고 재해석함으로써 현대적인 화면을 만들고자 노력한 그의 열정은 진지했다.
“바르고 나면 뿌옇게 되는 동양화 재료에 불만이 많아 신문지에 유화물감을 짜서 기름을 뺀 뒤 바르기도 하고, 한지를 떠가며 붙이는 콜라주 형식도 적용해보는 등 그림의 소재와 기법 면에서 다양한 시도를 해 보았어요. 그렇게 현대화에 동참하는 입장에서 앞서 나아가고자 했지만, 전통 문화의 정신적 뿌리가 무엇인지도 함께 고민했기에 먹과 화선지는 버리지 않으면서 동양화의 특징적인 것을 살리고자 했습니다”라는 그의 대학시절에 대한 회상은 동양화를 현대화하고 개량하고자 했던 그의 의지와 노력을 보여준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지난 4월 이천시립월전미술관에서 열린 전시에서도 드러났다. 그는 전시를 위해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에 걸쳐 전통적 화제(畵題)에 기초한 <시창청공도(詩窓淸供圖)>, <서창청공도(書窓淸供圖)> 연작 총 21점을 새롭게 그렸다. 신작들은 그가 선비의 정갈한 마음가짐으로 바라본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과 거기에서 느껴지는 환희를 화면에 재구성한 것이었다. 작품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그가 전시 개막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완성한 600호 사이즈의 대작 <시창청공도12>였다. 이규선은 이 작품의 완성을 위해 밤샘 작업을 거듭하며 열정적으로 매달렸다. 76세의 나이로 쉽지 않았을 작업이었겠지만, 그는 투철한 작가정신으로 이를 극복했다. 이규선이 완성된 화면에서 창문 사이로 보여주고자 했던 이미지는 화가가 마음의 눈으로 바라본 아름다운 자연과 환희 그 자체였다.
그의 예술세계에서 결론이 된 ‘시창청공도’와 ‘서창청공도’ 연작, 그리고 그간의 오랜 예술여정은 결국 그가 지향했던 것이 최초 자신을 한국화로 이끌었던 문인화(文人畵)였음을 말해준다. 사생(寫生)이 아닌 사의(寫意)의 추구, 에스키스(esquisse) 없는 즉흥적인 작화 방식, 작품 제작에 앞선 인성과 지식의 수양과 이에 대한 강조, 상업성과 거리를 두는 자세 등은 필자가 느끼기에 전통시대의 이상적인 문인화가 못지않은 것이었다. 이는 이규선이 오랜 시간 추구해온 작품세계가 단순히 ‘추상화’라는 범주에만 한정지을 수 없는 것임을 알려준다. 앞으로 좀 더 긴 시간이 흘렀을 때 그의 작품세계가 21세기의 문인화로 평가될 수도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문득 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게 된다. 만나기로 한 찻집에서 그는 부인을 대동한 모습이었다. 이제껏 원로작가를 만나면서 접해보지 못한 다소 낯선 상황이었기에 잠시 당황하기도 했다. 이후 어디를 가든 항상 부부가 함께 하고, 정겹게 대화하는 모습은 한참 어린 필자가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그러한 그의 가정적이고, 다정다감한 성격은 전시준비 과정에서도 목격되었다. 전시 작품의 포장과 운송을 맡은 미술품 운송회사 직원 한 명, 한 명에게 친절한 배려의 말을 건네고, 또 식사까지 챙기는 모습은 뭇 예술가에게서 쉽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인격이 그 작품세계의 기반이 되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한 그의 인간적인 모습이, 마지막이 되어버린 지난 4월의 전시 이후,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던 그의 예술세계만큼이나 그리워질 따름이다. ●
이규선3
故 이규선(李奎鮮)은 1938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1961년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국전 특선 및 문화공보부장관상, 국무총리상, 추천작가상(1968, 1970, 1972, 1975)을 수상했다. 1967년 서울 중앙공보관 전시실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었고, 2014년 13번째이자 마지막 개인전을 이천시립월전미술관에서 열었다.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중앙미술대전 심사위원, 국립현대미술관 자문위원, 인도 트리엔날레 커미셔너 등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