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도윤희 Night Blossom

갤러리 현대 6.12~7.12

배은아 독립 큐레이터

밤이 피어오르다. 밤의 개화. ‘Night Blossom’은 도윤희의 열여섯 번째 개인전 제목이다. 갤러리 현대, 4년 만의 개인전, 독일 작업실, 새로운 기법, 색의 출현과 같은 정보를 제치고. 엄습해온 것은 ‘Night’와 ‘Blossom’의 오묘한 조합이 만들어내는 파장이다. 일반적으로 작가가 영문에서 국문 번역 과정을 점프하는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다. 외래어가 가지고 있는 이국적인 느낌 때문이거나 그것이 차용된 명제이거나 혹은 ‘Night Blossom’과 같이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질서에 존재하지 않은, 번역 불가능한 어떤 순간을 드러내기 위함일 수도 있다. ‘Night Blossom’은 언어로 번역되기 이전에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지는 무엇이다. 그 무엇은 예측하지 못한 어떤 것이 저 문 너머에 있을 것 같은 설렘을 만들었고, 동시에 언어의 역할 그 자체를 의심하게 했다. 그 문 너머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색들은 여럿이자 하나가 되어 색이 아닌 무엇으로 다가왔고 그것은 몸의 한 기관을 자극한다기보다는 온몸에 내재하는 혹은 온몸 밖으로 벗어나는 무엇이었다. 그것을 울림이라고 해야 할지. 떨림이라고 해야 할지. 열림이라고 해야 할지. 그런 애매모호한 것이 되어 오히려 보는 이의 눈을 감게 했다. 나는 그 무엇을 그림도 음악도 언어도 아닌 일종의 ‘포에지(poésie, 시: 영혼의 기반을 움직이게 하는 예술 (Novalis, L’Encyclopédia))’라고 부르고 싶다.
그녀는 매일 아침 무엇을 읽을까. 그녀의 식탁 위에는 어떤 꽃이 꽂혀 있을까. 그녀의 창문 너머로 무엇이 보일까. 무엇이 그녀의 손가락 끝을 움직이게 하는 걸까. 그것은 물리적인 대상이 아닌 그 대상을 존재하게 하는 주체로서 에너지이다. 그것이 신문의 한 칼럼을 장식한 익명의 자살일 수도. 유리병에 꽂힌 작약일 수도. 창문 너머 보이는 하늘색 캐딜락일 수도 있다. 그 주체들은 유형이든 무형이든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나름의 생존방식을 가지고 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 존재 방식이 도윤희의 손가락 끝으로 전이된 것일까. 손가락 끝의 근육이 만들어내는 선, 색 그리고 형은 보는 이의 시각을 자극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우리의 감각체계를 통해 음악의 리듬 혹은 춤의 움직임과 같은 공명의 세계로 확장된다. 그 움직임은 즉흥적이면서도 의도적이며 특별하면서도 보편적이다. 이번 전시에서 도윤희는 붓이라는 회화의 전통도구를 내려놓음으로써 회화 밖의 언어를 습득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 언어조차 거부하고 마치 언어 이전의 존재를 마주하려는 듯 오로지 손가락의 움직임에 도취했음에 분명하다. 보이지 않는 것, 계산되지 않는 것, 말로 전달되지 않는 것, 그리고 해석되지 않는 것에 유난히 무감각해진 오늘날. 매일 아침 쏟아지는 전쟁과 부패, 분쟁과 대립 그리고 재앙과 질병 따위의 뉴스에 자괴감마저 드는 오늘날. 우리는 감히 무엇에 도취해 무엇을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 예술이라는 고독의 섬을 떠도는 한 예술가가 부조리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정의구현도 아니고 억압당할 수밖에 없는 자유의지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비굴한 삶을 존속하게 하는 생명의 담론, 카오스 그 자체이다. 너무 낭만적이거나 너무 아름답거나 너무 이상적이거나. 그것은 공유를 통해서 공감을 통해서 공명을 통해서 ‘포에지’의 중심에서 우리를 호출한다. 그 호출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타자를 존재하게 하고 타자를 받아들이고 그리고 비로소 자아의 현전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2층에 주르륵 나열된 캔버스들 앞에서. 초라한 벽, 빈약한 조명, 시크한 관람자들, 세속적인 대화가 공간에 울리면서 돌연 색의 향연은 예술(자본)의 틀 안에 갇히고 마는 것일까. 틀에 갇히기 이전에. 번역되기 이전에. 의미로 전달되기 이전에. 문장으로 완성되기 이전에 존재하는 혼돈의 상태. 그것이 그녀가 말하는 Night Blossom 일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색채’. 그리고 ‘밤이 되어서야 드러나는 세계’.

위 도윤희 <무제> 캔버스에 유채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