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백남준의 작품 이 던지는 화두들

김지훈 중앙대 영화·미디어연구 교수

2013년 3월 나는 스미소니언 미술관의 백남준 아카이브를 방문했다. 단 하루의 짧은 체류기간 동안 그곳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기록물은 수십 장의 천공카드(punched card)와 초기 컴퓨터 언어인 포트란(Fortran) 연산명령의 프린트물들이었다. 이것들은 백남준이 1966년부터 1968년까지 벨 전화연구소(Bell Telephone Laboratories)에서 방문예술가로 일하면서 수행한 컴퓨터 실험의 성과들이었다. 나는 이 기록물들이 지금까지 국내외 백남준 연구에서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벨 연구소에서의 작업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가설을 갖고 미술관을 떠났다. 그로부터 약 2년 후, 스미소니언 미술관은 아카이브에 보관된 백남준의 초기 컴퓨터 작업 3편이 기존의 작품목록에 등재되지 않은 작품들이라는 점을 공식화했다. 이 작품들 중 하나는 내가 백남준 아카이브에서 살펴보았던 천공카드와 프린트물들이 포함된 <에튀드 1(Etude 1,1967~1968)>이었다.
<에튀드 1>은 백남준이 벨 연구소의 아날로그 컴퓨터 GE-600을 사용하여 프로그래밍한 포트란 언어로 생성된 전자 드로잉을 포함한 미완성 작품이다. 백남준은 알파벳으로 이루어진 포트란 언어로 팩스용지에 네잎클로버처럼 생긴 네 개의 동심원을 그렸다. 이 네 개의 동심원은 “God” “Dog” “Love” “Hate”라는 네 개의 단어로부터 생성된 형상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이 작업이 백남준의 잘 알려진 비디오 및 인터미디어 작업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향후 연구의 몫으로 남지만 몇 가지 접근경로(access point)들은 확실히 눈에 띈다. 우선 백남준 본인의 의도를 따르자면 <에튀드 1>은 퍼포먼스와 비디오를 통해 현대음악을 혁신하고자 했던 그의 아이디어가 연장된 결과다(1960년 퍼포먼스 <에튀드 포 피아노 포르테(Etude for Piano Forte)>를 함께 떠올릴 수 있다). 백남준은 벨 연구소 방문을 위해 록펠러 재단에 보낸 편지에서 “음악사에서 최초의 컴퓨터 오페라를 작곡하는 것이 나의 야망”이라고 쓴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에튀드 1>의 동심원은 비록 무성이자 미완성이지만 백남준이 구상한 컴퓨터 오페라의 악보라는 의미를 갖는다.
또 다른 접근경로는 백남준의 벨 연구소 작업을 컴퓨터에 기반을 둔 실험 애니메이션과 확장영화(expanded cinema)의 맥락에서 평가하는 것이다. 내부에 필름 프로젝터와 드로잉 시스템을 구비한 아날로그 컴퓨터는 알고리즘에 근거한 컴퓨터 언어의 시각적 표현 가능성을 탐색하던 당대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도구였다. 1960년대의 벨 연구소는 바로 이 예술가들의 실험을 후원했다. 케네스 놀턴(Kenneth Knowlton), 스탠 반데르비크(Stan VanDerBeek), 마이클 놀(A. Michael Noll), 릴리안 슈워츠(Lillian Schwartz)는 바로 벨 연구소에서 컴퓨터의 코드를 추상적이고도 복잡한 형태들로 변환시키는 작업들을 만들어냈다. <에튀드 1>의 동심원은 바로 이들의 작품들과 닮아있다. 실제로 이 작품은 백남준이 컴퓨터의 숫자와 점들로 작업한 애니메이션인 <벨 연구소에서의 디지털 실험(Digital Experiments at Bell Labs, 1966)>과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이 두 경로보다 더 중요한 접근경로는 미디어 고고학적인 관점에서의 질문이다. 무의미해보이면서도 고도의 시각적, 언어적 유희를 포함한 이 동심원 형상은 백남준이 상상했던 컴퓨터와 디지털에 대한 관념들을 담고 있다. 이 관념들은 오늘날 컴퓨터 문화의 가능한 과거들에 대한 암시를 전해준다. 단순함과 복잡성을 함께 표현한 동심원 형상은 오늘날 컴퓨터 애니메이션의 과거를 비춰준다. 그러면서도 언어와 시지각의 유희를 표현한 이 형상은 백남준이 상상한 컴퓨터가 표준적인 컴퓨터와는 달랐음을 시사한다. <노베르트 위너와 마르셀 뒤샹>과 같은 글에서 백남준이 제시한 우연과 불확정성의 논리를 구현한 컴퓨터(즉 위너의 사이버스페이스보다는 뒤샹의 아이디어가 구현된 컴퓨터)라는 관념이 <에튀드 1>의 작업과정과 결과물에 표현되어 있다. 실제로 <에튀드 1>의 동심원이 뒤샹의 영화적 실험인 <빈혈증 영화 (Anémic Cinéma, 1926)>와 닮았다는 점도 이런 추측을 뒷받침한다.
이처럼 <에튀드 1>은 백남준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일련의 과제들을 제기하는 동시에 그의 비디오아트 및 퍼포먼스 작업들과의 새로운 접점을 마련한다. 이런 시사점들을 밝히기 위해서는 국내와 미국을 종횡하는 초국적이고 교차학제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이 연구가 실현될 환경은 불행히도 충분치 않다. 스미소니언 미술관에 백남준의 작업들과 문서들을 기증한 Nam June Paik Estate와 국내 백남준 관련기관과의 불편한 관계가 이런 사정을 낳았다. 국내 연구자들의 방문연구와 해외 연구자들의 국내 방문연구가 활성화될 때 백남준에 대한 연구가 현재진행형이 될 것이다. <에튀드 1>을 발견한 조지아공대의 그레고리 진먼(Gregory Zinman) 교수는 현재 존 한하르트(John Hanhardt)와 백남준의 글들을 모은 모음집을 MIT출판사에서 출간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국내에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위 백남준 <에튀드 1> 1967~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