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불협화음의 하모니

아트선재센터 2.7~3.29

우리가 ‘아시아’를 얘기할 때, 식민과 냉전이라는 사회정치적, 역사적 경험들을 들어내고 판타지로서의 이미지로만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 장소와 문맥의 위아래로 지구화의 현재적 흐름들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현실 속에서 서구에 의한 타자로서의 ‘아시아’와 아시아에 의한 ‘아시아’는 어떻게 상상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시도하는 전시 <불협화음의 하모니>는 그런 측면에서 ‘아시아 상상’에 대한 새로운 모색과 희망을 제안한다.
독일문화원이 주최하는 이 전시는 한국, 중국, 일본, 대만 출신 큐레이터 김선정, 황젠헝, 가미야 유키에, 캐롤 잉화 루가 공동 기획했다. 네 명의 큐레이터는 ‘아시아에 대한 상상을 성찰’하면서 ‘조화’의 개념과 관련해 각자의 입장을 정교하게 드러내는 각국의 작가 12명을 한데 모았다. 이들이 ‘조화’의 개념을 선택한 이유는 유럽연합(EU)과 같은 아시아연대나 아시아연합 등의 최근 아시아 내부에서 상상하는 정치적 전략적 유토피아적 시도에서 비롯된다. 큐레이터들은 서문에 “아시아를 통일된 공동체로 보는 만연된 가정과 피상적 오해”가 조화라는 개념을 전제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이러한 상상을 동요시키는 것을 전시 프로젝트의 목표로 삼았음을 선언했다. 결국, 이 전시는 동일성보다는 차이의 인정이, 개념이나 이미지로서가 아닌 삶으로서의 정직한 조화임을 역설한다.
문자로 ‘한자’를 공유하는 한국, 중국, 일본, 대만은 각기 다른 식민의 시대와 냉전의 시대를 경험했고 포스트 식민 이후 전지구화의 현실 역시 문자인 ‘한자’처럼 동일하거나 이미지로서의 조화와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큐레이터들이 선택한 작업들은 각 국가의 정치적 기원과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역사적 조건의 차이와 불일치를 섬세하게 성찰한다.
특히, 홍콩 출신 작가 랑즈워의 <이야기적 사건>(2006)이나 중국 출신 작가 류딩의 <2013년의 카를 마르크스>(2014), 저우자오의 <중국어는 언어가 아닙니다! 존 핸슨 끼어들다>(2015) 등에서 집약돼 보이는 ‘언어’와 이를 둘러싼 말하기, 읽기라는 삶의 지형은 문자의 동일한 판타지적 이미지 차원에서 단순화 할 수 없음을 환기시킨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를 함께 경험한 바 있는 아시아에서 언어와 번역의 문제는 각기 다른 형태의 식민과 포스트 식민, 냉전과 탈냉전 시대를 경유하면서 열전의 시대 안에 놓여 왔다. 아시아의 공용어 ‘한자’라는 권력이 일본어의 ‘한자 번역어’에서 세계 공용어 ‘영어’로 위계 이동하는 상황 등도 그래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한편, 백인종이지만 그 정체성 규정에서 배제 혹은 소외된 자폐증환자, 게이, 레즈비언적, 퀴어적 관심사 등 주변성의 미학을 강조해 온 중국계 미국인 작가 우창의 작업 <In My Language>(2014) 역시 이러한 개념적 이미지적 정체성 규정의 위험을 슬쩍 경계하고, 차이가 동반하는 생생한 분열과 갈등, 불일치를 노출한다.
그렇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전시의 출발 지점에서 관객이 만나는 작품은 협업 작업인 일본 작가 다나카 고키의 <피아니스트 다섯이 한 번에 연주하는 피아노(첫번째 시도)>(2012)와 <도예가 다섯이 한 번에 만든 도자기(조용한 시도)>(2013)이다. 작가는, 각기 다른 개인 여럿을 특정한 하나의 집단으로 구성해 서로 다른 이들이 어떻게 ‘연대’하고 ‘협력’하여 조화를 이루는지를 시도하였다.
사실, 세계 공용어 ‘영어’를 기초로 한 영상설치, 퍼포먼스 비디오 작업이 다수인 이번 전시에서 큐레이터들의 기획의도를, 취미로서 시각예술을 기대하는 일반 관람객이 읽어내기란 그렇게 쉽지 않아 보인다.
2년간 계속될 프로젝트의 첫 시작이라는 이 전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이에 통용되고 보편화된 ‘아시아’ 담론들 사이에서 혹은 그 내부에서 이제껏 간과돼 온 장소와 목소리를 감지하게 한다. 더불어 우리가 상상하던 조화로운 ‘아시아’라는 개념의 기원과 성격, 그리고 불일치한 차이를 지닌 ‘아시아 상상’을 새롭게 희망하는 우리의 의견과 태도를 요청하고 있다.
김주원 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