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윤동천 일상_의 Ordinary

4.12~5.14 금호미술관
현시원 | 독립큐레이터

왠지 윤동천의 전시를 다시 보는 리뷰에는 다른 미술사학자나 비평가가 쓴 문장을 끌어오고 싶은 충동을 내려놓아야 할 것 같다. 보리스 그로이스 (Boris Groys)가 쓴 ‘예술의 진리(The Truth of Art)’에 적혀 있는, 예술이 삶을 보다 나은 차원으로 끌어올린 오래된 문구를 꺼내 쓰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고 대신 나는 작가가 전시장에 올려놓은 여러 개의 질문과 샘플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전시장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축이 ‘질문하는’ 행위였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뒤돌아본다. 작가는 30년 넘게 현대미술을 하는 자신의 입장을 ‘질문하는 자’로 일관성있게 끌어온다. 동시에 일상의 사물들을 연장 삼아 미술 작품을 가지치기 한다. 거대한 사이즈와 색면 등 현대미술의 외양을 관습적으로 두르는 것으로서 관습을 파기하는 작품, 신발과 밧줄 같은 일상의 사물을 전시장 좌대 안에 결박시킨 작품들은 한 사람이 하지 않은 것 같은 여러 개의 미술적 자아를 보여준다. 그것은 작가와 미술이 단일한 주체임을 넘어서 여러 개의, 최대한 많은, 눈앞에 공존하는 것들을 바라보는 매개자가 되고자 하는 의지의 발현으로 읽힌다. 각종 미술담론에 부합하는 외양 안에 ‘미술적인 것’을 위반하고자 하는 내면을 가진 윤동천의 작업들은 한 작가의 미술보다 ‘일상’을 다시 보기를 권한다. 현대미술에 관한 독특한 학습법을 제안하는 텍스트 북이나 도판 같기도 하다.
작가는 먼저 도대체 삶과 부합하는 미술은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이 질문은 자기회기적이거나 자기반영적이지 않다. 대신 너무 많은 일상의 사물, 삶, 사회적 사건, 개인의 스마트폰에 깃든 기억들이 건조하게, 마치 시치미떼듯 전시장에 등장한다. 정확히 말해 전시장에 있는 그것들은 세속성이 아닌 범속성으로서의 예술이다. 윤동천의 개인전은 여러 개의 질문과 시간을 거닐며 타인들의 질문을 향해 나아간다. 전시장 입구 벽면에는 선언처럼 “일상은 모두에게 공유되어 특별함이 없는 것을 뜻한다”는, 1987년에 그가 쓴 문장이 붙어있다. 한편 전시장 종착지에서 내가 경험한 것은 ‘Q. 살면서 가장 감동스러웠을 때는?’이라는 질문에 덜 다듬어진 목소리로 내뱉는 이름 모를 이들의 목소리다. 목소리는 어떤 미술 재료보다 날것 상태로 들어와 있다. 작가는 여러 개의 Q를 자신의 작업을 통해 세계에 던진다. 작가가 타인에게 이렇게 난해한 질문을 던지는 의도는 무엇일까. 재기발랄하고 위트 있다는 수식어가 따라붙던 작가는 지금 세계를 올려다보고 또 내려다보는 악동일까 천사일까, 일상을 믿는 것일까. 배반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노란 방에 있는 노란 리본과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의 헤어롤 등의 사물, 그리고 〈위대한 퍼포먼스〉라고 명명된 한국 현대사를 구성한 강력한 정치사회적 증거들은 작가 윤동천이 본 집단 이미지이자 일상에서 집단의 삶을 가시화하는 역사가 되었다.
이 역사 앞에서 감각을 동원하려면 관람자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
윤동천의 질문이 몸을 갖게 되는 것은 먼저 30년에 가까운 긴 기간 동안 작가가 ‘일상’이 무엇인지 질문하고자 한 것에서 획득되는 시간성이다. 미술로 삶에 대해 질문해온 역사가 작가의 작업 안에서 경로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전시장을 채우는 작업들을 보노라면 연쇄 작용처럼 사물과 사물, 질문과 질문, 연결어미와 어미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를테면 관람자로서 이런 유의 말장난, 미술하는 일상은 일상의 미술과 어떻게 다른가. 작가가 다루는 일상의 바운더리는 거의 모든 것에 가깝다. 윤동천은 의도적으로 작업의 대상을 선택하지 않은 채 ‘거의 모든 것’으로 확장하고 수용하는, 다소 무모해보이는 지속성과 확장성을 추구한다. 둘째 작업 과정과 선택의 방식을 그대로 작품 표면에 위치시켜 첫 번째 관객인 작가 자신과 관람객, 미술제도에 내보이는 투명성이 돋보인다. 〈길에서??????-????흘리다 연작〉(2016), 〈길에서-껌자국 연작〉(2016)은 작가의 내적 동기와 규칙에 의해 제작되는 추상회화를 시각적으로 연상시킨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제목이 이것은 일상에서 ‘생산’되었음을 증명한다. 그것은 흘린 것이고 껌자국인 것이다. 이일상의 단면을 미술로 내건 것은 작가지만, 만든 것은 삶이다. 벽면을 가득 채우는 아크릴릭은 〈우리-얽히다/고무줄 드로잉 1〉이라는 이름으로 관람객을 맞는다. 어떻게 봐야 할까? 이 두 단어 사이에 놓인 빗금(/)은 작가에게, 미술로 자신을 기만하거나 사기치지 않으려는, 불가능에 대한 군더더기 없고 매우 담백한 선언인 듯하다.
그의 전시에는 질문만큼이나 답변 또한 존재한다. 한 켠에는 작가가 2002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연 개인전에서 관람객에게 제공한 설문지가 놓여있다. 설문보다는 선문답에 가까운 내용이 담긴 이 하얀 종이들은 작가가 흑백사진으로 보여준 자신의 작업실(〈산실??-???문호리 54???-????4〉) 틈 어딘가에 자리하였던 것일 테다. 윤동천의 예술하기는 일상의 사물과 사건을 재료로 다루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의 예술 자체가 일상의 재료가 된다. 재료는 일상을 여백없이 꽉 채운다. 계속 질문하고 답하느라 미술을 뺀 다른 일상이 없을 것만 같다. 예술보다 일상이 보다 중요해지는 순간들이 전시장 지하 1층에서부터 3층까지를 채우고 있다. 전시장 전관을 둘러보는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개개의 작업들이 전관을 꽉 채우고 있으면서도 ‘꽉 찬 텅빔’을 느끼게 하는 힘의 정체다. 대한민국을 혼란의 도가니로 빠트린 각종 사물들이 유기견처럼 좌대 위에 올라와있는데, 여기에는 서정도 서사도 없다.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그물과 같다. 거대한, 끝없이 물결치는 파도 위에 몸을 튼 그물처럼 계속 이어져 반복된다. 보기에 편한 것만은 아니다. 촛불집회를 위대한 퍼포먼스로 부르는 데 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물이 대상을 순식간에 덮어버리듯, 윤동천의 질문은 관람객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들을 질문의 범위 안으로 포섭한다. 뒤통수를 후려치는 심각한 것들이 아닌, 너덜해진 일상의 겉옷을 입은 여러 가지 샘플들이 작가가 꺼내놓은 “일상(Ordinary)” 제제에 포괄되고 윤동천의 헛되지 않은 기대를 품는다. 미술을 잘 사용한 한 예로 꼬마 아이가 그린 그림 몇 점이 액자에 담겨있다. 종이 편지봉투 안에 가가호호 사람 넷이 손잡고 웃는 얼굴들이 그려진 그림.

위  윤동천 〈염치〉 캔버스에 혼합재료 193.9×259.1cm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