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윤종석 artist’s archive-나의 10년의 기록

5.13 ~ 6.6 충무아트홀갤러리

김최은영 | 미학

드러난 도상보다 더 궁금한 것은 화면의 속살이었다. 5cc 용량 주사기로 짜낸 점들이 모여 새롭고 흥미로운 형태를 이룬 윤종석의 작품엔 언제나 ‘노동’이란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은 거죽의 형상보다 속살의 집요함을 목격하려 든다. 호기심을 충족하고 난 후, 그제서야 제대로 보이는 〈어머니의 손〉과 〈처 할머니〉의 얼굴이다. 팽팽하고 윤이 나는 젊은 그것이 아닌, 반드시 세월을 거쳐야만 얻을 수 있는 주름과 결이 보인다. 기존 작품의 의류이미지와는 분명 다른 언어다. 똑같은 5cc 주사기의 점으로 표현했으나 이전의 것은 욕망에 대한 이중성을 위장하기 위한 방식으로서의 ‘점’이었다면 노경(老境-늙은 얼굴과 손)에서의 ‘점’은 세상의 욕망에서 벗어나 스스로 선택한 은자(隱者)적 삶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급하지 않고, 느려도 상관없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흘러야만 가능한 노경이다. 절대시간을 쏟아야만 가능한 노경을 점묘 작품으로 완성해내는 당연한 명분을 구성해냈다.
달라진 것은 대상뿐이 아니다. 점에서 선으로 작법이 변화했다. 주사기를 사용하는 방식은 같지만 점들을 나열하던 방식에서 흐르는 곡선을 차곡차곡 겹으로 쌓았다. 함축(含蓄)이다. 함축은 문학 언어의 특성 중 하나로 직선적, 평면적, 외연적(Denota-tion)이기보다 입체적, 고차원적임을 말한다. 은유인 동시에 내포(Intension)에 해당한다. 〈That days (20150219)〉는 이러한 함축의 속성을 화면에 고스란히 담아낸 윤종석의 신작이다.
“살면서 보고 느끼는 것들, 보게 되는 대상들, 만나는 대상들 사람들 이런 것들을 주로 그리고 있고 다시 그것들을 재조합해서 어떤 날을 만들어 보려고 하는 것.”- 작가 인터뷰 중
드러내기 위해 쌓는다. 깊게 이야기하기 위해 숨긴다. 오래 고민했기에 탄생된 굽은 선들의 함축은 조급함을 이겼고, 명백한 아름다움보다 한 수 위를 차지했다. 안으로 간직하는 것을 중시하는 동아시아 고전의 곡경(曲徑)과 유사하다. 윤종석의 선은 빠르지 않고, 온화하여 다른 색감의 선과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이 곡선들의 집합은 유형의 형상 배후에 깊이 숨은 의미의 세계가 된다. 즉, 작가 윤종석은 사람과 사물 등 다양한 대상의 DNA를 찾았다. 그리고 그 원초적인 성분만을 이용해 사람도 사물도 아닌 ‘어떤 날(That days)’을 레고블록처럼 쌓아버렸다. 익명의 얼굴은 어쩌면 ‘어떤 날’ 만난 사람일 수도 있고, ‘어떤 날’ 느낀 감정일 수도 있다. 윤종석은 진짜 말하고자 하는 ‘어떤 날’을 드러내지 않고 누군가의 얼굴 뒤로 감추고 숨겼다. 사실 숨김은 더 잘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더욱 깊고 그윽하며 아득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감춤은 더욱 분명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서 풍부하고 더 감동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분명한 것은 단 하나, 내면으로 향하는 작가의 정신이다. 차곡차곡 쌓인 선들이 만든 겹을 들춰 결을 마주할 때 윤종석이 말하고자 하는 ‘어떤 날’ 민낯을 목격하게 된다.
흐릿한 가운데서 찾아낸 아름다움은 투명한 미감을 이겼다.

위〈That days 시리즈〉 캔버스에 아크릴 130×162cm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