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임민욱 만일(萬一)의 약속

플라토 2015.12.3~2.14

이찬웅 철학, 이화여대 HK교수

소녀는 연약하다기보다는 취약하다. 키가 달라질 때마다, 지각이 또다른 높이에 도달할 때마다 새로운 비난과 슬픔에 속절없이 노출되기 때문이다. 이상한 나라에서 목이 나무 높이보다 더 길어졌을 때, 앨리스는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는다. “커다란 비둘기가(…) 날개로 앨리스를 세게 쳤다. ‘뱀이다!’” 작아진 앨리스는 쥐에게 여러 차례 사과하고 공감을 표현한다. “아, 미안해! 네가 고양이를 안 좋아하는 걸 깜빡했어.” 보통 키로 돌아온 그녀는 난폭한 여왕에게 단호하게 동등한 권리를 주장한다. “고양이도 왕을 볼 수 있어요. 책에서 읽었어요.” 키가 커지고 작아지는 미친 생성 속에서, 그녀는 낯선 척도의 세계를 목격하고, 이상한 풍경에 당황하고, 적절한 대응에 실패하고, 고양이를 지키려 하지만, 계속해서 사과하면서 슬퍼하고, 드물게 화를 내기를 반복한다.
이 이상한 공감 능력은 때로 조울증과 뒤섞인다. 버지니아 울프와 니체가 각자 보여준 것처럼, 조울증의 높낮이는 세계를 감각하는 새로운 관점들이기도 하다. 우울증의 슬픔은 세계의 부분들이 울고 있으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수면제가 인도하는
저 심연에는 세계의 칸막이들을 가로지르는 기이한 존재가 산다. “보이지 않는 적막이 문을 열고/ 세상의 모든 방을 넘나드는 소리의 귀신”(최승자). 임민욱 작가에게 미술은 이 넘나드는 귀신을 따라 가는 것이다(<포터블 키퍼>).
이렇게 따라갈 때 어떤 세상이 보이는 것일까? 소위 “풀의 삼단논법”이라고 알려진 분열증의 사고를 조금 고쳐서 이렇게 써보자. X는 운다, A도 운다, 따라서 X는 A다. 이것이 임민욱 작가가 세계 안에서 일의성을 발견하는 방식이다. 세계의 일의성이란 무엇인가? 모든 물방울은 그 크기와 형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바다 안에서 동등한 물방울이다. 작가에게는 울음이 모든 존재자를 은밀하게 잇는 일의성의 질료이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구체적으로 X와 A는 무엇인가? 2012년 <절반의 가능성>에서 북한은 남한이다. 2014년 광주비엔날레에서 경산/진주는 광주다. 오늘 이 전시의 동명 작품 <만일의 약속>에서는 헤어진 두 이산 가족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분할된 화면의 양쪽에 서로 닮은 형제자매의 모습을 보는 일은 거의 기적을 느끼는 체험을 준다. 한반도라는 영토에서 40여년의 시간 동안 멀리 떨어져 있던 두 개의 물방울이 가장 가깝게 모이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입자와 반입자처럼 거의 무한도의 속도로 두 사람은 이산가족 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울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시청자 역시 마음속에서 무엇인가 터져 나오듯이 감동하게 된다.
이것이 임민욱 작가가 엄격하게 소통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와 국가주의의 장벽을 넘어 언어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또는 느린 속도로 가 닿는 것 말이다. 그녀가 예술이 미디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러한 소통은 이산가족들이 미디어를 점령하면서 벌어진 지극히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미디어 역시 다른 무엇이 되어야 한다. 예술의 미디어-되기와 미디어의 토템-되기.
이렇듯 이중의 생성이 있고, 임민욱 작가는 이번 전시장의 두 방에 각자 하나씩을 배분한다. 후자에서 미디어는 원초적이고 관능적인 힘을 회복한다. 작가의 이전 작업과 비교할 때,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이번 전시는 확실히 새로운 지점이다. 작가는 비판적인 질문 옆에 이제 작은 소망을 붙여놓는 것일까. 한반도를 내려보던 작가는 이제 다시 소녀처럼 키가 작아져서, 기러기로 변한 열두 오빠를 위해 화형대 안에서 가시덤불로 뜨개질을 하는 것일까. 아, 그러나 동화처럼 제시간에 행복하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작품들의 재료는 겨우 존재하는 것들이고, 따라서 아마도 곧 사라질 것이다.
1983년 이산가족 상봉 방영 장면을 2015년 말에 불러오는 작가의 작품은 어떤 시대착오처럼 보인다. 그녀의 시선의 위치가 차라리 시간축을 따라 급격하게 움직인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이상한 시간 감각은 아마도 그녀가 1990년대 내내 한국을 떠나 있었던 사정과도 부분적으로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 시기에 한국은 문민정부 시대의 문화적 낙관주의와 IMF 구제금융을 받아야 하는 경제적 침통함을 차례로 경험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이 시기를 기원으로 삼고 있고, 1980년대의 정서적 공동체에 대한 감각은 거의 상실됐다.
시대착오적인 호출은 강렬한 정치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파커 파머, 김찬호 역,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글항아리, 2012) 같은 것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민주주의의 첫 번째 집” (101쪽)이며, 그것이 “사회적 품위를 지켜주는 규범”(113쪽)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이 정치의 영역이 되기는커녕, 위안의 소비 시장에서 헤매고 다니는 사정을 볼 때 이 질문에 답을 구하는 심정은 비참하다. 이 중요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업이 정치적 발언이 아니라 결국 예술인 이유는 항상 은폐되거나 방치된 쪽에 서고자 하기 때문이다. 현실 정치가 적군과 아군을 구분해서 우리를 구성하는 기술이라면, 예술은 그러한 행위의 정당성을 따져 묻는 것이다.
임민욱 작가의 이전 인터뷰들과 한 번의 대화에서, 직간접적으로 연상되는 사상가는 손쉽게 열 명이 넘는다. 그녀는 그것들을 대부분 체화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붙잡히지 않고 어디론가 달아나고 있는 것만 같다. 비평가들은 그녀로부터 원하는 누군가를 끌어낼 수는 있겠지만, 늘 충분치 않을 것이다. 그녀가 간직하고 있는 예술의 정의는 거의 흠잡을 데 없어 보인다. 실현 불가능할 것을 알면서도, 모든 규정으로부터 계속해서 진행형으로 벗어나고 있는 세계를 상상하는 것말이다. 문제는 이런 것이다. 이렇게나 많고도 깊은 슬픔을 원동력으로 삼는 예술의 방식을 얼마동안이나 한 정신이 버텨낼 수 있는가? 예술의 미래를 걱정하는 소리들 안에서, 주제넘지만 나는 이 예술가의 미래가 염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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