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임자혁 조금 이상한 날

누크갤러리 6.25~7.23

정신영 서울대학교미술관 책임학예사

2002년 뉴욕 MoMA에서 개최된 <Drawing Now>은 드로잉을 주된 표현방법으로 사용하는 작가들만을 모은 대규모 기획전이었다. 개최를 전후하여 최소한 현대미술에서는 드로잉을 하나의 독립적인 매체로 인정하는 의식이 자리잡았다. 캔버스를 짜고 밑칠을 하는 과정이 생략되고 선적 요소만으로 화면을 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회화에 비한다면 드로잉은 보다 일상적이고 친밀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변적인 표현방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더 이상 밑그림이나 설계도처럼 타 매체에 연관지으며 의지하거나 도전하지 않는 새로운 드로잉이라는 장르는, 일상을 영위하며 수용하는 개개인의 시점을 반영하는 데 있어 최적의 매체로 보인다. 임자혁의 경우 다양한 현실의 단편들은 무엇보다도 시각적인 정보로 다가오는 듯하다. 삼청동 누크갤러리의 2개층에 걸쳐 전시된 총 108점 중 ‘오렌지 드로잉’으로 분류되는 54점의 드로잉은 임자혁이 지난 3~4년에 걸쳐 경험한 일상의 순간이나 사건들의 축적임과 동시에 색, 선, 형상, 구도 등으로 재구축된 현실의 기록들이다. <깃털>은 마치 참빗으로 긁은 듯 등고선이나 기압골처럼 촘촘한 줄문양으로 처리된 거대한 인물의 뒷모습에 흰 오리털이 한 조각 붙어있는 모습이다. <사죄>는 뉴스나 신문에서 접하는 전형화된 광경으로, 무릎 꿇고 깊숙이 고개 숙인 양복차림의 남성들이 줄줄이 열을 이루는 모습이 상하로 반전되어 마치 서로에게 사과하는 듯 코믹하게 배치되어 있다. 짙고 옅은 오렌지색의 유산지에 묘사된 이 같은 이미지들은 모두 작가가 경험한 현실에서 출발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단독 작품인 1층의 콜라주 역시 시각중심적(ocular-centric)이면서도 어떤 상황에 대한 비일상적인 면모를 감지해내 사건화하는 작가 특유의 예민함이 드러나 있다. <야유회>는 이제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한국인 중장년층의 등산복 애호에 대한 언급이다. 광활한 초록빛을 배경으로 울긋불긋 모자와 재킷이 일렬로 늘어서 나들이 풍경을 연출한다. <그룹 미팅>은 실내에 설치되어 있어야 할 소화기 여러 대가 야외로 옮겨져 붉은 펭귄처럼 옹기종기 한곳에 모여있는 모습이며, <어떤 덩이>는 지방도로의 목가적 풍경 속에 우뚝 솟은 장승 같은 거대한 비닐묶음들의 특수한 존재감을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1층의 작품들의 서술적 요소와 제목의 결합은 때로는 동화처럼, 때로는 난센스한 코믹삽화처럼 해석하는 즐거움을 주는데, 이뿐만 아니라 화면에 펼쳐지는 색, 선, 패턴이 주는 리듬감이나 장식성이 예사롭지 않은 디자인적 감수성을 제시하고 있다.
깨알 같은 잎사귀의 표현이나 원색과 중간색을 미묘하게 섞은 대담한 색면의 배치는 2층에 이어지는 <돋보기> 연작에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돋보기> 연작은 1층에 전시된 작품의 한 부분을 원형이나 길쭉한 타원, 평행사변형 등으로 도려낸 후 거대하게 확대하여 잉크젯 프린터로 출력한 작업들이다. 원작의 서술적 맥락에서 격리되어 새로운 화면으로 옮겨진 조형요소들은 급격히 추상화되어 있다. 대비되는 색상이나 불안정한 듯하면서도 숙련된 선들의 교차는 이미 북유럽의 패턴화된 디자인과도, 일본 디자인의 절제된 양식과도 또 다른 작가양식을 만들어내고 있다.

위 임자혁 <주홍색 드로잉>(왼쪽) 종이에 잉크, 총 54장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