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잭슨홍 Cherry Blossom

시청각 3.19~4.26

방혜진 미학
<Cherry Blossom>의 천태만상 인물들은 다양성과 생생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이라기보다는 일련의 유형으로 재빨리 분류된다. 구분점은 노동과 여가, 생산과 소비의 행동 양식. 철저히 차별주의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의 위용은 이 소박한 한옥 내에도 어김없이 무차별적이다.
그러나, 인형 눈을 붙이고 있는 뒷방 할아버지에게 애틋함이나 경의를 품고, 만화책을 끼고 누운 남자에게 분노나 경멸을 품을 필요는 없다. 이를테면 17세기 네덜란드 장르화의 현대판이라 할 이 군상을 도덕적 메시지로만 해석하는 것은 (어쩌면 이 전시가 벗어나고자 하는) 폐쇄적 시야일 것이다. 단적으로, 이 일련의 인물 묘사는 명백히 노동의 경건함만큼이나 빈둥거림의 유쾌함을 예찬하고 있다.
시트콤의 한 장면처럼 왁자지껄 펼쳐진 이들을 공간 내 위치로 분류해보면 어떨까.
1) 한옥 실내에 자리 잡은 셋(할아버지, 슈퍼맨 복장 아이, 속옷 차림 남자), 2) 마당과 마루에 걸쳐, 즉 실내/실외의 전이 공간에 위치한 셋(야쿠르트 아줌마, 발버둥치는 아저씨, 운동복 차림의 여자), 3) 실외에 선 택배기사와 선녀. 여기에 번외로, 우리의 현실을 관망하고 있는, 저 높이 걸린 ‘조상님’의 사진.
시선의 문제는 사진 속 인물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이 공간을 재분배하는 것은, 언뜻 무작위처럼 보이지만 정교하게 인물들을 가로지르는 시선 교량술이다. 1)의 시선은 각자의 물건에 집중돼 있다. 세상은 그 물건 속에 매개된다. 2)의 시선은 실내/실외의 교차로 요약된다. 실내에 머무르려는 남자와 그를 끌어내려는 아줌마의 힘겨루기(어쩌면 그녀는 노인과 더불어 이 집안의 생계를 짊어진 어머니일지도 모른다)가 그렇듯. 또한 이 소동에는 무심히도, 다만 외부에서 당도할 상품을 반기는 젊은 여성이 그렇듯. 3) 한편 그녀의 시선을 받고 있는 택배기사는 정작 옥상에 강림한 선녀에 홀려 있다. 선녀의 눈길은 이 실외의 바깥, 한옥 너머로 향한다.
오래된 주택가 한옥에 터를 잡은 시청각은 그간 휴먼스케일의 건축물이 갖는 조건을 활용하거나 희석시키는 전시를 펼쳐왔다. 공간의 특성은 부득불 작품의 물리적 크기와 배치는 물론, 높낮이가 각기 다른 댓돌과 문지방을 통과하는 관객의 호흡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역과 건축물이 환기하는 역사성은 장소특정성을 시청각 전시의 전제이자 제한처럼 만들기도 했다. 바로 여기, 잭슨홍은 장소성을 확인하고 확장하여 역으로 공간을 회복시킨다. 최근 에르메스 매장의 디스플레이 작업에 주력해온 그는 (납작한 쇼윈도와 대구(對句)를 이루듯) 과장된 부피와 조야한 색채의 인물들을 시청각 공간에 디스플레이한다. 과도하게 구체적인 인물들이 진입하자, 즉 거주지로서의 성격이 극단에 이르자, 과밀한 공간은 도리어 여백의 추상성을 복구한다. 쇼윈도 디스플레이가 매장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 위치한 채 외부의 행인들을 내부로 유인하거나 적어도 욕망하도록 만든다면, <Cherry Blossom>의 인물상은 시청각을 한옥 주택으로 읽으려 드는 관객에게 장소의 내밀함 너머를 그리도록 이끈다.
결국 관객으로 하여금 전시장 입구에 선 택배기사의 뒷모습으로부터 관람을 시작하게 만든 것은 중요한 전략이었다. (노동/여가의 분류 역시, 그의 작업복이 출발점이었다.) 박스 하나를 들고 허겁지겁 들어선 외부인, 이 한옥의 일상이 낯선 이를 따라 집안 풍경을 둘러본 관객은 그의 시선이 머문 옥상으로 향한다. 바깥을 조망할 수 있는 곳. 바로 시청각의 첫 번째 전시에서 비가시적 인왕산을 향해 잭슨홍이 배를 띄웠던 그 장소 말이다.
<Cherry Blossom>이 구축하는 인물과 공간 역학은 현실과 미술계를 재조망하려는 시도가 되며, 잭슨홍과 시청각의 지정학이 된다.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치열한 망상이다.

위 시청각에서 열린 잭슨홍 개인전 <Cherry Blossom> 광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