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최헌기 CUI XIANJI 1994-2015

성곡미술관 3.20~5.31

전영백 홍익대 교수
미술작업을 볼 때 작가의 개인사를 얼마나 고려해야 하는가. 이때 작가의 삶에 미치는 사회, 정치적 영향은 어떠한가. 사회의 체제에 따라 개인에게 미치는 정치적 영향력에 큰 차이가 있음은 당연하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서는 체제가 개인의 삶에 개입하는 정도가 크다. 중국 작가의 경우, 작가의 삶을 정치와 멀리 놓고 볼 수 없는 이유다. 그리고 그 작품에는 작가의 개인적 표현 및 취향보다 사회에 대한 내용이 많다.
1962년 태생의 최헌기는 중국 작가이나 한국인이기도 한 이산(離散) 작가이다. 두 문화 사이의 ‘경계인’으로서 자신의 체험을 표현한다. 소수민족이 겪는 정체성 갈등, 보이지 않는 구조적 불이익과 그에 대한 저항, 사회주의 교육과 그 이념적 혼란, 전통에의 향수와 급변하는 현재,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 등이 작품에 그대로 보인다. 한마디로, 체제가 강요하는 가치와 전통의 기준에 반발하는 저항정신과 도전의식을 거침없이 뿜어내는 작품들이다.
199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그가 전시에서 다루는 작업의 스펙트럼과 재료는 놀랄 정도로 다양하다. 중국의 다변하는 정치상황과 다름없다. 그러나 나는 그를 전형적인 화가라 본다. 1990년대 추상화는 그가 가진 화가로서의 진면모를 잘 보여준다. 풍경에 기반을 둔 그의 추상화는 강렬하면서도 정제된 색채감, 대담한 마티에르, 그리고 역동적 필력과 함축된 시적 공간을 표현한다. 체제에 억압된 작가의 저항력과 대륙적 기질이 서구 모던아트의 새로운 기운을 만나 벌이는 격렬한 몸부림인 듯하다. 유화의 표면은 격정과 희열, 그리고 갈등과 화합을 무겁게 담아낸다.
이렇듯 회화의 물리적 조건을 지키던 작가가 그 한계를 전격 벗어난 것은 대략 2007년경부터다. 그림의 평면과 프레임을 이탈하는데 그 방식이 무척 저항적이며 공격적이다. 회화의 추상적인 붓터치는 직설적인 말 낙서(‘狂草’기법)가 되었고, 그림의 은유적 공간은 액자를 벗어난 실제 공간으로 확장됐다. 그림의 틀과 면을 탈출한 광기를 보듯, 그가 화가로서 지켜왔던 ‘감각 논리’가 자체 발동한 셈이라 할 수 있다. 대형 설치작인 <붉은 태양>(2013)에서 그는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의 형상을 조각으로 만들고 낙서와 광초(狂草)를 허공에 갈겨놓았다.
그러한 일련의 실험적 설치작업은 본업이 화가인 최헌기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림을 둘러싼, 그림에 대한, 그림을 위한 그의 발언일 뿐이다. 고전 액자를 오브제로 활용, 여러 겹의 투명 사천으로 감싸고 그 위에 물감을 자유롭게 구사한다. 이렇듯 반투명한 초상화를 통해 그가 보여주는 것은 난독의 정체성이다. 문화와 문화 사이, 체제와 개인 사이 애매모호하고 불확실한 관계는 그 작업이 나타내는 난독과 불통의 내용이다.
그렇기에 대규모의 작품 <설국>(2015)에서 회화로 돌아온 작가의 ‘발언’을 본다. 작가의 실험적 광기는 다시 회화 면에서 안정을 찾은 듯, 평면을 이탈한 뜻모를 광기의 낙서는 무채색의 함축적 붓질에 잦아들었다. 시끄러운 몸부림과 질러대던 고함은 회화의 평면공간에 안착해 묵직한 음성으로 공명한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납득하려는 작가의 분투는 이제 미적 평안을 찾은 듯하다.

최헌기 <위대한 광초(Great Cursive Writing)> 혼합재료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