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퇴폐미술

6.23~8.14 아트스페이스 풀

이채영 | 경기도미술관 책임 학예연구사

“기획전이 하나의 텍스트로 작동하면서 관객에게 적극적이고 전복적인 읽기를 강요하는 방식은 작가와 작품이 지닌 고유한 자율성을 큐레이터라는 개인의 사유의 틀에 근거해 재배열하고 재맥락화하는 위험한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우리는 전시 자체를 해석이 필요한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가-큐레이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큐레이터의 정치적인 의도 안에 포섭된 작가들의 작품으로 대중을 선동하려는 현대미술의 타락한 의도로 파악될 수 있다. 현재 아트스페이스 풀에서 진행되는 〈퇴폐미술전〉이 그러한데 기획자는 1931년 독일의 나치에 의해 개최되었던 전시를 레퍼런스로 이 시대가 마치 파시즘의 유령이 떠도는 시대인 양 그 제목을 그대로 차용하여 전시를 만들었으며, 작가들의 불온한 작품들을 기획자의 정밀한 계획 아래 배치해 놓고 작품을 냉소하고 비방하는 글로 전시장을 가득 채워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그래서 더욱 적극적으로 전시를 해석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오해 마시길. 위의 글은 80여 년전 나치가 개최한 〈퇴폐미술전〉에서 모더니즘 작품을 전시하고 비방했던 어법을 차용하여 아트스페이스 풀에서 진행 중인 〈퇴폐미술전〉 작품의 퇴폐성을 조목조목 언급한 안소현 큐레이터의 역설적인 서술 방식을 모방한 것이다. 위의 글을 다시 읽자면 이 전시는 큐레이터에 의해 의도된, 그리고 작가들의 지지와 공모로 만들어진, 정치적이고 비판적인 텍스트다. 관객은 좀 더 적극성을 가지고 작가와 기획자가 장치한 역설의 수사법을 읽어내야 한다.
전시의 해석을 작동시키는 레퍼런스는 1937년 나치가 모더니즘 작가들의 작품을 게르만 순혈주의에 위배되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그리고 퇴폐적이라 규정하고 전시한 〈퇴폐미술전〉이다. 오토 딕스, 코코슈카, 마크 베크만, 심지어 칸딘스키, 파울 클레, 피카소를 아우르는 이 전시에 걸린 작가들의 작품들은 전시 후 불태워지기도 하고 어딘가에 버려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 작품들은 아직도 간혹 발견되어 화제를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2016년 대한민국에서 ‘퇴폐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를 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사실 전시를 둘러싼 어떤 설명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전시 리플렛에는 참여 작가들의 작품이 왜 퇴폐적이며 왜 위험한지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물론 그것은 의도된 위악적인 설명이다) 옥인콜렉티브의 〈작전명  -  하얗고 차가운 것을 위하여〉에 대해 기획자는 이 작품이 포퓰리즘의 속성을 지닌 퍼포먼스이며 “우리가 무엇보다 경계해야 하는 것은 예술로 위장한 불온함이 미지근한 잔불로 남아있는 것이다. 예술적 의미는 당장 폭발하지 않더라도 적절한 바람을 만나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갈 수 있다”고 서술한다. 한국 사회에 팽배해 있는 타자에 대한 몰이해와 정치적 부패, 경제적 좌절의 기운 속에서 예술이 행할 수 있는 정치적 행위와 교란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역설적으로 설명한 글로 큐레이터는 현대예술이 일상 속에 내재한 권력에 반응하고 정치적 교란을 수행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된다.” “모든 문제에 불순세력들이 가담하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을 철저히 가려내야 합니다.” 최근의 박 대통령의 언급이다. ‘비정상’과 ‘불순세력’. 사회에서 그것을 가려내고 배척하면서 지켜내야 하는 것이 ‘민족’과 ‘국가’라는 불합리한 가치관과 “신비주의”로 대중을 선동하여 타자를 배척하도록 종용하는 사회라면, 대한민국이 파시즘의 기운에 사로잡혀 있다고 걱정하고 의심할 만한 합리적 근거가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는 이 전시의 의도를 읽는다. 전시는 경직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비정상’과 ‘불순함’에 대한 자기 검열이 상시화된 한국 미술계의 현실에 대한 자가당착의 고백이다.
파시즘을 역사적인 특정 정당의 행위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내재된 행동양식이자 언제든 발현될 수 있는 위험한 삶의 양식으로 파악한 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에 대한 분석은 파시즘을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괄호치지 않고 현재의 정치문화와 대중심리를 파악하도록 한다. 그는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파시즘은 정당이 아니라 인간, 사랑, 그리고 노동에 대한 특정한 태도와 특정한 생활개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파시즘은 실천적인 삶의 문제에 관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왜나하면 파시즘은 이데올로기의 범위 내에서만, 또한 국가 제복의 형상 속에서만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퇴폐미술전〉의 작품들에서 정치, 성, 기계문명, 정신세계에 작동하는 일상의 파시즘에 대한 경계를 발견할 수 있다. 권용주 작가는 ‘새누리당’, ‘음지에서 양지를 지양한다’는 안기부(현 국정원)의 구호가 적힌 조악한 기념비를 전시함으로써 국가기관과 그것이 표방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냉소와 권위주의에 대해 경계를 드러낸다. 김웅현 작가는 〈스페인스베다〉에서 9   · 11 테러 당시를 찍은 인터넷 동영상을 마치 게임 이미지처럼 변형한다. 현실과 가상세계의 경계는 겹쳐지고 흐려지면서 일상화된 테러와 죽음에 대한 불감증, 모든 것이 스펙터클로 전환되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이미지 소비 형태를 드러낸다. 오용석과 장파는 인간의 육체에 부여된 사회적 규범에 대한 거부, 패티시에 대한 집착, 관음증을 거부하는 왜곡되고 뒤틀린 여체로 성의 규범화에 문제제기한다. 전시는 작품을 신성시할 의도가 전혀 없어 보인다. 캔버스는 처박혀 있거나 겹쳐서 매달려 있고 조각들은 시선의 아래에 놓이거나 사각지대에 설치되어 있다. 의도적인 패러디이지만 역설적으로 ‘비정상’적이고 ‘불순’해 보이는 공간이 우리를 잠식하는 권위의식으로부터의 일탈을 꾀하기에 적절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