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rator’s Voice] 선무 개인전 – 홍·백·남(紅·白·藍)

선무 개인전  __  홍·백·남(紅·白·藍)

중국 베이징 원전 미술관 7.27~8.27 / 트렁크 갤러리 10.30~11.25

“나에게도 부모님이 주신 심장이 있다. 누군가 그 심장 위에 빨간 휘장을 달아주었다. …(그리고)… 누군가 달아주었던 내 심장 위의 휘장은 떨어졌다. …(지금)… 온전히 나를 위해 뛰는 심장이 나에게도 있다. 나는 선무다.”
2002년, 대한민국이 붉은악마의 물결로 일렁이던 해에 선무는 남한에 왔다. 마치 북쪽의 집단체조를 연상시키며 모두가 하나 되어 외치는 ‘대한민국’은 선무에게 너무나 익숙한 일상이었기에 북이나 남이나 별다를 것 없는 사람 사는 세상으로 비치기도 했다. 다만 감시하는 사람도 없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연습된 상황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북과 남 사이에 높게 쌓인 벽들이 서서히 선무의 눈에 들어왔다. 아직 대한민국에 초짜인 선무에게 한갓 볼 차기 게임을 놓고 밤새도록 광란하며 거리를 무리지어 싸돌아다니는 무정부 상태가 결코 옳을 수만 없는 일이었다.
선무가 북쪽을 벗어난 것은 세계가 세기말 몸살을 앓고 있던 1998년이었다. 남한 사회에서는 아직도 휴거(携擧)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있었으며, 외환위기로 인해 새천년의 기대감이 상쇄되던 때였다. 남한에 들어오기까지 3년 반 남짓한 시간은 선무에게는 암흑기였다. 아시아의 덜 성숙된 몇몇 국가를 표류하며 20세기 야만의 질곡을 벗어나지 못한 채 무지막지하게 팽창된 제도들에 의해 봉인된 삶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거울로 된 유리방에 갇혀 무수히 반복되어 반사된 헤아릴 수 없는 자신들에 의해 정작 나 자신의 실체가 실종되어버린, 기억조차 떠올리기 싫은 유치된 자아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에겐 동물처럼 오직 생존만이 중요했을 뿐이다. 아직도 이로부터 홀연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그의 인생에서 유리방을 빠져나와 거울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와 여유가 생긴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10여 년간의 남한생활이 30여 년의 북쪽생활을 지울 수 없다. 더구나 개인의 삶을 주체적으로 영유하며 보낸 시간이 짧은 선무에게 전체주의의 환영과 지배와 피지배의 틈을 교묘히 노리는 욕심들의 악취를 떨쳐버리기는 버거운 일이다. 그래도 남한에서의 시간은 여러 사람과의 상봉과 이별을 만들어주었다. 그 사이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수차례의 개인전과 각종 국제전에 초대되어 뜻하지 않은 외국여행의 기회도 있었다. 이제는 몰래 숨어들거나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예술가의 자격으로 국경을 넘나드는, 나름대로 지구인이 된 셈이다.
2014년 7월 27일, 선무는 또 하나의 소란을 겪었다. 베를린과 뉴욕 그리고 오슬로 등 외국 전시 및 행사에 초대된던 그가 올해에는 베이징의 한 비영리공간에서 초대전을 열 참이었다. 이를 위해 동료 작가들의 도움을 받아 봄부터 베이징에 들어가 이런저런 작업을 완성했다. 도톰한 도록이 인쇄되고 남북의 철조망을 재현한 공간 디스플레이도 끝났다. 천여 평의 전시공간에 울려퍼질 음향도 가수 강산에와 협업해 거칠지만 멋지게 제작되었다. 중국에서 붙여준 개인전 제목은 <홍·백·남(紅·白·藍)>. 남한과 북한의 국기에 들어간 세 가지 색을 상징으로 그 경계를 넘나드는 선무의 활동을 부각시켰다. 이미 여러 통로로 각국 관계자들에게 초대장도 발송했던 터라 선무는 뉴욕 개인전 때보다도 더 들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전시 개막일, ‘전시봉쇄’라는 생뚱맞은 상황에 맞딱뜨려 다급히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물론 전시 개막 전후로 남북한 관계가 하루가 다르게 경색되고 있어 중국의 정치적 입장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중국 비영리 미술관의 지원을 받은 순수 예술활동이고 중국 당대미술가들의 발언 수위도 만만치 않기에 전시가 이뤄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아예 접어두었던 참이다. 미술관 입구의 커다란 현수막은 공안에 의해 철거되었고 개막연에 참석기 위해 미리 방문했던 사람들은 조사를 받았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선무의 2014년 베이징 개인전은 중국 공안에 의해 전시공간 입구가 봉쇄되고 도록을 비롯한 관련 인쇄물을 압수당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 후 잠시 베이징 선무 개인전은 그대로 방치되었다. 미술관이 폐쇄된 상황은 아니었으므로 전시를 보았다는 사람도 몇몇 있었으나 미술관 측은 곧 다른 전시로 대체했다. 그리고 연일 중국 인터넷에서는 작가 선무에 대한 조회수가 부쩍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 주변 정황을 정리해보니 정작 문제가 된 것은 선무의 작품이라기보다는 ‘탈국경자’라는 신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베이징에는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 사람들도 살고 있다. 선무 또한 이미 북한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전에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작업을 했다. 그래서 순탄치 못한 자신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좋지 못한 기억들을 되도록 제어하며 차가운 과거가 아닌 지금과 미래를 살아가야 하는 남북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주제로 개인전을 준비했던 것이다. 누구보다도 이데올로기의 함정에 빠져 더 많은 삶의 기회를 놓쳐버리는 실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선무인 까닭이다.
아직까지 선무의 작품은 베이징에서 발이 묶여있다. 전시를 주최한 중국의 미술관 및 남한의 외교부나 통일부에서도 별 대책을 내놓지 못한 채 남북한 교류는 더욱더 아슬아슬한 살얼음 질곡을 디디고 있다. 선무 입장에서는 답답한 노릇이나 그 또한 막연히 기다리는 수밖에 별 방도가 없다. 다행히 중국 공안도 선무의 작품에 대해선 가타부타 간섭하지 않았으며 다만 ‘북한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 돌연 전시행사만 봉쇄했을 뿐이다. 어찌되었든 선무의 작품이 압수되거나 손망실되었다는 소식은 아직 없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인천아시아경기대회에 북한 응원단도 오지 않은 뒤숭숭한 시점에 선무는 늦었지만 <귀국보고전>을 트렁크갤러리에서 연다. ‘탈북자’도 ‘새터민’도 아닌 ‘두 개의 심장을 가진 사람새끼’로서 말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반만년 오랜 역사에 /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슬기론 인민의 이 영광 /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 몸과 맘 다 바쳐 이 조선 길이 받드세 /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오락가락이지만 두 개의 심장을 가진 선무가 술 취해 부르는 애절한 애국가다. 특히 올해 베이징 전시를 준비하며 오가던 중 베이징 서우두공항에 나란히 서 있는 대한항공과 고려항공 비행기를 보면서 이 요상한 애국가에 대한 감정이 더 애틋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베이징 전시에 출품할 작품으로 비무장지대에서 가져온 녹슨 철조망을 줄기 삼아 남북의 국화 및 야생화가 피어있는 꽃꽂이 작품 및 남북의 국기가 실루엣으로 엉킨 작품 등이 준비된 바 있다. 이미 탈국경자로서 그리고 한 명의 예술가로서 낡은 국가체제에 대한 애증이 증폭되었던 것이다.
전쟁을 직접 겪지않은 세대들에게 민족분단을 초래한 엄청난 이데올로기 대리전은 괴상하게 부풀려지면서 실제 전쟁 경험보다도 더 두렵고 무서울 수도 있다. 누구에게는 망각되거나 무시될 수도 있겠으나 아직도 일상이 자유롭지 못한 선무에게는 민족분단 해소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은 채 점점 안락에 빠져드는 자신의 삶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그렇다고 창백한 분단 상황에 휘말려 소모적인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더 끔직한 일이다. 더구나 지금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새로 꾸린 단출한 식솔과 동료들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태도 외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선무는 잘 알고 있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그것이 행복이라면 행복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이 전부라면 살 생각이 없습니다. 그것이 아닌 나를 알았습니다. 이제 세상에 대고 소리칩니다. 나는 선무라고”

최금수·이미지올로기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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