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 Theme] 밖으로 나온 은둔의 문화재 왕국 간송미술관

봄과 가을 정기전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었던 간송미술관 소장품이 76년 만에 처음으로 바깥 나들이를 했다. 얼마 전 화제 속에 개관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리는 <간송문화전(澗松文華展)>이 바로 그것. 제1부 ‘간송전형필’(3.21~6.15)과 제2부 ‘보화각’(7.2~9.28)으로 나뉘어 열리는 이번 전시는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 선생이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를 지키려 고군분투해 모은 소중한 소장품 중 대표작을 볼 수 있는 기회다. 간송의 평생 업적이 모여 있는 전시장을 거닐어 본다.

밖으로 나온 은둔의 문화재 왕국 간송미술관

김태식  연합뉴스 문화부 기자

“평일인데도 관람객이 많네요?”
“예, 하루 평균 2000명 정도입니다.”
“관람료는 성인 한 사람 기준 8000원이지요? 유료 관람객 비율은 얼마인가요?”
“중고생은 4000원입니다. 99% 유료라고 보시면 됩니다. 우린 초대권을 안 뿌려요.”
<간송문화전>이 개막한 지 약 한 달 만인 4월 17일, 평일인 목요일 오후임에도 최근 서울시가 옛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으리으리하게 개관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한쪽 1485㎡(약 450평)의 제법 넓은 전시실엔 관람객이 적지 않았다. 아마도 간송 (澗松)이라는 이름과 그의 컬렉션이 토대를 이루는 간송미술관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반영하는 현상이 아닌가 싶었다. 취재차 현장을 둘러보고 관련 사진도 촬영하고 싶다는 전갈을 미리 넣고 들르니, 간송씨앤디(C&D) 큐레이터가 나를 맞았다. 그에게 관람객 현황을 알아보고는 운영 현황을 물어보았다. 그의 이야기인즉 DDP가 필요에 따라 간송 측에 제안을 해서 이번 전시가 이뤄졌으므로 별도 임대료나 대관료는 없다고 한다. 또, 간송이 DDP 배움터 내 디자인박물관(2층)을 3년간 사용하기로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대신 전시실 운영 전반은 간송 측에서 맡아 한다고 했다. 전시장 코너 곳곳에 배치된 진행요원들도 간송이 고용한다고 했다. 내가 들렀을 때 얼추 헤아려 보니 이런 진행요원만도 스무 명은 족히 돼 보였다. 적지 않은 운영비를 부담하는 셈인데, 입장료 수입과 도록 판매 대금으로 충당하긴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관전 치고는 ‘간송문화(澗松文華)’라는 다소 밋밋한 타이틀을 내건 이번 전시는 간송미술관이 근자에 보인 행보, 그리고 향후에 보일 행보와 관련해 여러모로 주목받는다. 그것은 무엇보다 ‘은둔의 문화재 왕국’이라 할 만한 신비주의 행보를 벗어버리려는 시금석으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호암미술관, 호림박물관과 더불어 국내 3대 사립박물관으로 꼽히는 간송미술관으로서는 1966년 개관 이래 이번 전시가 사상 첫 외부 나들이다. 물론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외부 기관이 간송 소장품을 대여받아 소개한 전시는 자주 이뤄졌다. 하지만 간송만을 단독으로 내건 외부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미술관 운영 주체로 지난해 8월에 출범한 간송미술재단은 이번 전시회 개최에 즈음해 언론사에 배포한 관련 보도자료에서 “(DDP 설립 주체인) 서울시가 우수한 콘텐츠를 확보하려는 의지가 강했고, 간송미술문화재단 역시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현대적 전시장소를 강력히 바랐다”면서 이런 자리가 “소프트웨어 파워와 하드웨어 파워의 절묘한 만남”이라고 자평했다. 그러면서 재단은 “이번 전시를 계기로 시대적 조류에 맞추어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다양한 기획전을 DDP 디자인박물관에서 계속해서 진행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앞으로 대중과 만나는 기회를 넓히겠다는 뜻이라 하겠다.
이번 전시가 어떤 과정을 거쳐 준비되었는지 나로서는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그 전조(前兆)라고 할 만한 징후는 여러 곳에서 감지됐다. 그런 움직임이 본격화한 신호탄이 지난해 재단 설립이다. 그 이전 미술관은 간송의 차남 전성우와 삼남 전영우 씨가 등록 없이 운영한 임시 조직에 지나지 않았다. 재단 설립을 발판으로 그 해 12월에 충남 부여에 소재하는 문화재청 산하 한국전통문화대학교와 전통문화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대학원 전문연구과정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이 협약에 따라 전통문화 관련 국내외 연구기관이나 산업체 등지에서 6개월 이상 전문연수를 해야 졸업논문 청구 자격을 부여받는 이 대학 산하 전문대학원인 문화유산융합대학원 재학생들은 간송미술관에서 그런 자격을 충족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나아가 간송미술관은 지난 1월에 네이버와 협약을 맺고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을 비롯한 소장 중요문화재를 온라인으로 공개하기 시작했다. 종래와 비교할 때 가히 광폭 행보라 할 만하다. 이번 DDP 전시도 그 일환이다.
간송미술관은 그 컬렉션 토대가 된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이 타계한 뒤인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 부설 미술관으로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서 시작을 알렸다. 주축 건물은 간송이 1938년에 지은 보화각(寶華閣)이다. 미술관은 발족 이후 1971년 봄 <겸재전(謙齋展)>을 시작으로 이 보화각에서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 각각 2주 가량 전시회를 열었다. 이것이 미술관이 대중과 만나는 유일한 통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정기전은 관람료가 없다는 점에서 국내 사립박물관계에서는 신선한 시도였고, 무엇보다 사유재산임이 분명한 소장 문화재를 대중에게 공개한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사회적 기부’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립박물관이라고 해도《훈민정음 해례본》을 비롯한 소장 국보만 12점에 달하는 곳이 상설전시실을 운영하지 않고(혹은 못하고) 극히 제한된 시기에 소장품 일부를 공개함으로써 그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송미술관은 신비에 싸인 곳이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심어준 것도 사실이다. 나는 간송미술관의 정기 기획전 방식을 보면서 매양 그 모델이 일본 나라(奈良)국립박물관에서 매년 개최되는 정창원(正倉院) 특별전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주지하듯이 정창원은 일본 고대 천황가의 보물창고로서, 그것을 관리하는 궁내청은 매년 가을 한 차례씩 2주가량 나라박물관에서 기획전을 열어 일반에 공개한다. 이와 같은 방식의 전시 역시 정창원과 천황가에 대한 신비감을 높이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그렇다고 나는 간송미술관이 반드시 일부러 신비주의를 채택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외부에서는 알지 못하는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더불어 그 컬렉션 창립자인 간송에 대한 대중 사회 전반의 이미지도 간송미술관에 대한 신비감을 더하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간송이라고 하면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반출되는 우리 문화재를 지켰고, 사재를 털어 반출된 문화재를 사서 들여온 문화재 수호자로서의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다. 이제는 중학교 1학년이 된 내 아들이 보는 위인전에도 간송이 실려 있을 정도이니 문화재 분야에서 이만한 대중성을 확보한 인물은 없다고 할 만하다. 요컨대 한국사회가 요구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표상으로서 간송은 우뚝 선 것이다.
나아가 간송미술관을 발화점으로 삼고 ‘진경산수화’라는 화살을 장착한 ‘간송학파’라는 용어는 특히 사학계와 미술사학계를 중심으로 하는 지식인 사회에서 간송의 이름을 우뚝 서게 하는 데 일조했다. 겸재 정선을 염두에 둔 진경산수화라는 용어는 이미 미술사학계를 평정하고 그 영역을 더욱 넓혀 일반화했거니와, 그에 더불어 우암 송시열을 필두로 하는 노론 중심주의 역사관을 견지하는 간송학파는 기존 남인 중심의 이른바 주류적인 역사관과 쟁투하면서 각종 논쟁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간송과 간송미술관의 명성을 더욱 높이는 촉매제가 되곤 한다.

간송,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문화재 현황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간송 사후인 1960년대에《고 간송 전형필 수집 서화목록(故澗松全鎣弼蒐集書畵目錄)》 상·하권을 발행하고, 곧이어 소장품 중에서도 한적(漢籍) 2000여 질을 정리한《간송문고 한적목록(澗松文庫漢籍目錄)》을 간행했지만, 이것이 전모는 아니다. 그 정확한 컬렉션 규모는 공개된 적이 없다. 사립박물관에 모든 재산목록 현황을 공개하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다. 하지만 기존에 공개된 컬렉션의 양과 질이 이미 막대한 상황에서 간송미술관 수장고에는 공개되지 않은 더 많은 보물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다.
여하튼 여러모로 묘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밖에 없는 간송미술관이 마침내 은둔 혹은 신비의 이미지를 벗고 밖으로 나선 신호탄을 쏘아올린 자리가 이번 DDP 전시라고 할 수 있겠다. 이번 <간송문화전>은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라는 부제가 암시하듯이 간송이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었다. 간송미술관 측은 이를 위해 이번 전시를 2부로 나누었다고 밝혔다. 전시장을 두 부분으로 나눈 것이 아니라 순차 전시 방식을 택했다. 즉, 오는 6월 15일까지는 ‘간송 전형필’이라는 이름 아래 “주요 수집품을 중심으로 간송이 우리 문화재를 모은 이야기를 스토리로 풀어내는 전시”로 꾸미고, 7월 2일부터 9월 28일까지는 ‘보화각’이라는 타이틀 아래 “간송이 모은 미술품 중 백미라 할 수 있는 주요 소장품들을 장르별로 나누어 전시하는 명품전”으로 꾸민다. 이번 1부 전시에는《훈민정음 해례본》을 필두로 현재 심사정의 <촉잔도권>이 전면을 펼쳐 공개 중이며, 혜원 신윤복의《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에 수록된 풍속화 30점도 처음으로 전면 공개를 한다. 또한 1936년, 간송이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국제변호사로 활동하던 영국인 존 개스비(Sir John Gadsby)에게서 사들인 국보 도자기들인 <청자기린유개향로>와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 <청자오리형연적>,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 등도 전시한다.
이처럼 이 전시는 간송미술관의 첫 외부 나들이라는 의미 외에도 간송미술관 명품들을 한자리에 모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깊다. 더불어 전면 전시가 힘들었던 화첩들을 온전하게 펼쳐놓았다는 점은 신선한 대목이다. 반면 아쉬운 대목도 적지 않다. 스토리텔링을 기획했다고 하지만, 그런 점이 전시장에서는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박물관 전시에는 어울리지 않는 조명을 그대로 사용한 점은 향후 전시에서 대폭 손보았으면 한다. 이번 전시 소장품은 대부분이 회화와 도자기류다. 그에 맞게 조명을 해야 각각의 문화재가 제 가치를 발할 것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현재의 조명은 대낮과도 같다. 가뜩이나 백색 계통의 DDP 내부 환경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 반사가 극심해 관람과 감상을 방해한다. 이런 점들에 대한 개선을 기대해 본다.●

심사정  종이에 담채 58×818cm 1768 간송은 훼손이 심했던 이 그림을 당시 돈 5000원에 구입하였고 수리비로 6000원을 지불하였다

심사정 <촉잔도권(蜀棧圖卷)> 종이에 담채 58×818cm 1768 간송은 훼손이 심했던 이 그림을 당시 돈 5000원에 구입하였고 수리비로 6000원을 지불하였다

장승업    (왼쪽부터) 38×159.5cm(각)

장승업 <호치비주(豪馳飛走)> <몽니정관(蒙泥靜觀)> <종미환행(從尾環幸)> <어자조련(御者調練)>(왼쪽부터) 38×159.5cm(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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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om in  간송미술관의 옛이름 보화각(葆華閣)

“간송미술관 소장품, 76년만의 외출”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이하 ‘DDP’)가 최근 개관했다. 외관이 마치 우주선을 닮았다고 해 화제를 모은 이 건물을 더욱 이슈의 중심에 서게 한 전시가 열리고 있으니, 바로 <간송문화전>이다.
알려진 바대로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 1962)은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 약탈과 말살에 맞서 이를 지켜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 전영기(全泳基)는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을 지내고 가업인 미곡상을 운영한 거상이었다. 휘문고보와 일본 와세다대 법과를 졸업한 전형필은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춘곡 고희동, 김용진 등과 교유했다. 당시 우리 문화재는 약탈과 밀거래의 대상이었는데 도굴된 문화재임을 공공연히 밝히며 거래되는 경우까지 있었다. 간송은 이에 맞서 우리 문화재 유물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전형필은 1938년 성북동 북단장에 보화각(葆華閣)을 건립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이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보화각은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란 뜻으로 그 설립은 여러 의미를 지닌다. 당시 사립박물관은 조선의 생활자기를 수집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세운 조선민족미술관이 유일하였다. 보화각은 소장품의 질과 수에 있어서 최고로 평가받았다. 또한 보화각은 삼국시대부터 근·현대까지의 우리나라 고미술이 보존되고 연구된 고미술사학의 중심지였다. 또한 오세창, 고희동, 삼불 김원룡, 혜곡 최순우, 수묵 진홍섭, 초우 황수영, 박길룡, 청전 이상범 등 우리나라 근대기에 문화·예술계의 중요인사들이 모여서 사상과 세계관을 교유하던 곳이기도 했다. 1962년 간송이 타계하자 그 후손과 후학들은 1966년 북단장에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 보화각을 간송미술관으로 개명하고 봄, 가을 정기전을 개최하면서 《간송문화(澗松文華)》를 펴내고 있다.
DDP에서 열리는 <간송문화전> 2부의 타이틀은 바로 ‘보화각’이다. 7월 2일부터 9월 28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에는 불상, 도자, 회화, 서예, 전적 등 분야별로 간송미술관의 베스트 컬렉션이 선보인다. 불교미술로 <금동삼존불감>,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     <금동여래입상> 등 7세기 불교미술을 일견할 수 있는 유물이, 또한 조선 초기 문법서 《동국정운》과 거문고 악보인 《금보》 등의 진적이 전시되어 당시의 문화정책과 사상을 살펴보는 자리가 마련될 예정이다. 회화로는 정선의 <풍악내산총람>, 《경교명승첩》 속 <압구정>, 김홍도의 <황묘농접>, 김득신의 <야묘도추>, 그리고 신윤복의 <미인도> 등이 선보일 예정이다. 서예는 안평대군, 한호, 김정희 등의 글씨가 출품된다.

황석권 수석기자

이마동이 1956년 보성학교 개교 50주년을 기념해 그린

이마동이 1956년 보성학교 개교 50주년을 기념해 그린 <간송 전형필 초상>

 왼쪽·피난 중(1951)에도 자녀를 데리고 석굴암을 답사했다. 앞줄 오른쪽부터 전영우, 간송, 뒷줄 오른쪽부터 전성우, 서원출 보성고 교장, 전성우 친구

왼쪽·피난 중(1951)에도 자녀를 데리고 석굴암을 답사했다. 앞줄 오른쪽부터 전영우, 간송, 뒷줄 오른쪽부터 전성우, 서원출 보성고 교장, 전성우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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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간송미술관 관장 전영우

“간송은 한마디로 ‘정말 착한 분’”

_MG_1282소장품이 간송미술관을 떠나 열리는 최초의 전시다.  매년 봄과 가을 정기전을 통해 43년 동안 86회의 전시를 열었다. 처음으로 외부에서 여는 전시라 크게 이슈화된 것 같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이하  ‘DDP’)라는 초현대식 건축물과 전통 유물이 조우해 어떻게 비칠지 많은 고민을 했다.
간송미술관과 DDP에서 여는 전시를 비교한다면?  그간 간송미술관이 너무 비좁아 관람객이 길게 줄을 서서 전시를 봐야 했다. 관람객에게 죄송하고 뭔가 이런 상황을 개선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DDP가 건립되어 전시를 열게 됐다. 전시장이 비좁아 관객들이 입장을 하고서도 어깨너머로 유물을 보지 않게 되어 좋다.(웃음)
간송 전형필 선생을 지근거리에서 봐오셨던 분으로서 “간송께서는 이런 분이셨다”는 한 말씀 부탁드린다.  돌아가실 때까지 옆에서 모시고 살았으니. 두 가지 측면에서 간송을 말하고 싶다. 인간 간송, 아버지로서 간송. 인간 간송은 70여 년을 살면서 가장 겸손하고 검소하고 한마디로 정말 ‘착한’ 분이셨다. 아버지로서는 옛날부터 부모님을 표현하는 말 중 ‘엄부자모(嚴父慈母)’가 있는데 우리 집은 ‘자부엄모(慈父嚴母)’라 할만하다.(웃음) 아버님은 평생 매 한 번 드신 적이 없었으니. 또 ‘내유외강(內柔外剛)’이란 말을 쓰는데 간송 선생은 ‘외유내유(外柔內柔)’였다.(웃음) 겉도 부드러우셨지만 속도 부드러우신 분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격동의 근대화를 거친 이로서는 갖기 힘든 성품을 지니셨다.
간송의 의외의 모습을 본 적이 없나?  조용하고 올곧은 사람도 과음으로 실수를 하고 간혹 일탈스러운 행동을 하지만 간송은 한 번도 그러시지 않았다. 재밌는 일화가 있다. 간송은 영화를 좋아하셨다. 당시 극장이라는 곳이 지정좌석이 없었는데 줄을 서서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보는 형식이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섰는데 저녁이 되도록 오시지 않았다. 어찌된 일이냐고 물으니 맨 앞자리에서 영화를 보시다가 다음 회에 몰려든 인파를 미안해서 헤치지 못하고 3회를 보셨단다.(웃음) 그게 간송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일화다. 일전에 어느 인터뷰에도 밝혔지만 간송은 좋은 도자기를 담는 오동나무 상자 같은 분이셨다. 웬만한 자기 보관함이 대부분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것은 무르기에 쉽게 상처가 나지만 충격을 흡수하고 방충작용을 해서다. 이렇듯 귀중한 우리 미술품을 곱게 간직한 간송은 오동나무 상자와 같다고 생각한다.
간송미술관은 특히 학술기능이 특화되어 있다고 본다. 이른바 ‘간송학파’가 그 중심이 되고 있다. 특히 전시 때마다 펴내는 《간송문화》는 미술사 연구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  어느 미술관이라고 학술기능의 중요성을 모르겠는가? 그런데 우리 미술관의 자랑인 학술적인 성과는 아이러니하게도 ‘가난해서’라고 생각한다.(웃음) 우리는 모든 일을 우리 힘으로 하다보니 식구 같은 연구위원들의 자생력이 생겨 우리 학예연구실의 학적 토양을 비옥하게 하지 않았나 한다. 적당히 가난해야 좋은 작업이 나오는 것과 같다.(웃음) 미술관의 적당한 궁핍이 오히려 학문적 순결과 학구적인 분위기를 형성해 곁길로 가지 않고 다소 엉뚱한 결과를 낳았다고 본다.(웃음)
그간 전시 중 기억에 남는 전시가 있는가?  한 번도 거르지 않은 정기전을 준비하면서 힘들고 어렵고 시행착오도 겪고 속상한 일도 있었다. 정말 전시가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오듯” 했다. 기억에 남은 전시는 1971년 가을 제1회 전시로 열렸던 <겸재전>이다. 《간송문화》를 제작하려 인쇄소에서 밤을 새던 일도 기억난다. 그런데 첫 전시는 일반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애호가나 학문을 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당시 미술사에 대한 저변이 없었으니깐. 과연 몇이나 올까 했다. 그게 엊그제 같은데 관람객이 입장하려 100~200미터 줄을 서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이다. 또한 2012년 <간송 50주기 추념전>을 열었는데 감개가 무량했다. 간송 임종 후 반세기가 흘렀다니! 간송 50주기라는 타이틀에서 가슴이 미어졌다.
간송미술관 관장으로서 간송미술관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간송미술관은 ‘간송을 닮은 미술관’이라는 것. 간송은 남에게 드러내거나 자랑하기 좋아하는 성품이 아니셨다. 욕심을 드러내 남에게 보여주려는 미술관이 아니다. 조용하게 우리 민족미술문화를 사랑하는 여러분께 다소곳이 다가서는 문화공간이다.
그간 간송미술관은 소유주가 드러나지 않는 행보를 보였다. 간송 선생과 유족의 의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라 하겠다.  간송미술관은 간송의 DNA를 물려받아 여유롭고 호화로운 분위기는 바라지도 않고 향유하지도 않는다. 다만 쾌적하게 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는데. 지나고 나니 이것도 하나의 개성처럼 되어버렸다. 그런데 간송이 살아계셨으면 아마 이보다 더하면 더했을 것이다.(웃음)
개인적으로 유독 끌리는 소장품이 있다면 무엇인가?  흔히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짓궂게 하나만 골라라 하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가 돼서가 아니라 간송도 큰 애정을 갖고 평생을 아끼셨고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이 깃들어 있는, 세계 어느 문자보다 과학적인 한글의 창제 정신을 담은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간송컬렉션의 백미라 할 만하다. 사실 DDP 전시장을 설계할 때 맨 처음 입구에 들어서면 《훈민정음 해례본》을 만나도록 했었지만 사정상 변경했다.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다. 후학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학생에게 늘 하는 말이 있다. 어떤 전공이든 조형예술을 업으로 삼고 평생 그것에 임해 살겠다고 작정을 했다면 끊임없이 작품을 접하라고. 항상 그것을 염두에 두는 생활패턴을 가져라. 그러다보면 무엇인가 보인다. 박물관과 미술관에 자주 가라. 무엇인가 눈에 보면 느끼게 되고 애정이 생기고 일상에서 표현이 되는 법이다.
이번 전시를 간송미술관의 대외 행보 변화의 신호로 봐도 좋겠는가?  미술관 공간이 협소하고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다는 이유로 그렇게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간송미술관의 정기전은 계속된다. DDP전시는 대중적인, 대중친화적인 전시, 간송컬렉션 중에서 잘 알려지고 인구에 회자되는 유물 위주로 개최하고 간송미술관에서는 학문적인 체계를 이어가는 전시를 개최할까 한다. 지역분관도 생각하고 있다. 많은 제안이 있었고. 진행 중이지만 확정된 것은 없다.

황석권 수석기자

전영우 관장은 간송의 3남으로 상명대 미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간송미술관 관장직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