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Topic] 이브 수스만 전

배명지 코리아나미술관 책임 큐레이터

리안갤러리 대구에서 열리는 <흰색 위에 흰색: 알고리즘적누와르>는 국내에 알려진 이브 수스만의 작업들과 명백한 간극을 보여준다. 영상의 출발점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회화 <흰색 위의 흰색>(1918)이다. <알카자르에서의 89초>와 <사비나 여인들의 약탈> 등이 과거 회화를 이미지의 차원에서 전유하면서 현재 시점에서 재맥락화하는 데 주목했다면, <흰색 위의 흰색: 알고리즘적 느와르>는 말레비치의 회화를 이미지-표상이 아닌 내적 의미작용의 차원에서 인용한다. 말레비치의 흰색 회화는 자연 대상을 초월한 순수한 ‘무(無)’로서 ‘유토피아’의 실재를 사각형 내에 응집한 것인데, 이브 수스만의 동명의 영상은 절대주의 회화가 추구하는 이러한 초월의 지대와 순수한 공간, 그리고 우주적 감성을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절대주의자의 급진적 정신을 환기시키기 위해 이브 수스만과 루퍼스 코퍼레이션이 찾은 영화의 로케이션은 유토피아적 기획이 ‘러시아 혁명’의 실행으로 옮겨졌던 소비에트연합(러시아)이다. 러시아, 카자흐스탄 등의 거리, 풍경, 인물들은 2년여에 걸쳐 촬영되었고, 구 러시아의 오래된 건축과 도시 풍경은 기존 영화에서 수집된 3000개의 영상과 80개의 보이스, 150개의 음악 등과 함께 영화 <흰색 위의 흰색: 알고리즘적 느와르>를 구성하는 주된 소스로 사용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영상의 모든 재료가 ‘알고리즘’의 메커니즘에 따라 유기적으로 결합된다는 사실이다. 작가가 ‘뜻밖의 행운과도 같은 기계 (serendipity machine)’ 라 명명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모든 영상과 보이스는 무작위적으로 결합되고 전시공간에서 실시간 편집된다.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각각 태그되어 있는 프로그램을 선택하여 랜덤으로 재생시키면서, 화면에 비치는 영상은 같은 장면과 사운드가 결코 반복되지 않는, 문자 그대로의 ‘네버 엔딩 스토리’를 재생시킨다. 따라서 영화 <흰색 위의 흰색: 알고리즘적 느와르>의 이야기는 기계에 의해 제어되고 관객에 의해 사후적으로 재구성된다. 볼 때마다 새로운 내러티브로 재구성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영화이면서 동시에 영화적 프레임 외부에 있다. 디터 메르쉬가 전자 코드와 상호작용을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의 매체론 신화의 토대로 지적했듯이, 여기서 모든 의사소통은 내러티브와 상징이 아니라 데이터의 변환에 의해 이루어진다.
eve3ok특히 영상 <흰색 위의 흰색>는 공상과학, 과학, 보이스(시), 철학, 미술사 등의 제(諸)학문적 전략을 작동시켜 상호텍스트적인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 영상은 공상과학 영화이기도, 고도의 심리극이나 정치극이기도, 한 편의 시적 영상이기도 하다. 또한 제학문적인 경계를 교차시키고 복잡하게 만듦으로써 연쇄적인 구문론을 제시할 뿐 아니라 하나의 결정된 메타포를 거부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의미의 혼돈으로 향하게 한다. 모든 의미는 정착되지 않으며, 알고리즘의 변형에 의해 끊임없이 유보되고 지연된다.
영원히 이어지지만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는 이브 수스만의 기이한 흑백 영화는 공상과학영화와 필름 누아르 사이에 놓여있다. 이 영화에서 제프 우드(Jeff Wood)가 분한 주인공 홀츠(Holz)는 지구물리학자로, 유정 시멘트 회사가 지배하는 City-A라는 메트로폴리스에 갇혀 있다. 미래 도시에 갇힌 홀츠를 향한 관찰과 감시로 영화는 이어지는 듯하지만, 무한히 이어지는 영상의 순환반복으로 인해 총체적 내러티브는 결코 파악될 수 없다. 외관상 관련 없어 보이는 대상들과 보이스는 서로 대비되면서도 미묘하게 연결되어 관객들을 영화적 환영에 빠져들게 한다. 또한 영화 전체를 감도는 어두운 색채와 흐릿하고 우울한 영상, 의혹에 잠긴 내러티브와 디스토피아적 감성은 필름 누아르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혼재된 공간과 시간
이브 수스만의 이 영화는 장 뤽 고다르의 영화《 알파빌(Alphaville)》(1965)에 대한 오마쥬와도 같다. 고다르 영화에서 알파빌은 이브 수스만 영화에서의 City-A와 유비적이다. 이곳은 러시아 아방가르드 작가들이 추구한 미래의 유토피아를 현시하는 공간이 아니라 황량한 폐허가 의미화하는 디스토피아를 현실에 투사한 곳이다. 이브 수스만과 루퍼스 코퍼레이션이 촬영한 유토피아를 향한 건축들이 21세기 폐허의 잔상으로 각인되는 것은 역설적이다.
사이먼 리(Simon Lee)가 영화 제작기간에 촬영한 사진작품들은 이러한 디스토피아적 감성을 전달한다. 사진 <카루셀>과 <파일론> 등이 보여주는 해질녘의 잔광, 버려진 회전목마와 송전탑, 비에 젖은 음습한 풍경은 어두움과 슬픔, 공포감을 전달한다. 이곳은 발전과 진보 세계관에 역행하는 무질서와 퇴보를 지향하는 엔트로피적 공간으로 읽힌다. 이브 수스만의 영상과 사이먼 리의 사진은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내세운 진보의 목표인 유토피아가 결국 허구의 세계임을 재단하는 듯 보인다. 발터 벤야민이 폐허를 언젠가는 붕괴될 역사에 대한 알레고리로 주목했듯이, 사진 속의 공간은 영원함에 반하는 일시성과 공허, 단절, 불안의 요소들을 담아내고 있다.
영원히 현존할 것 같은 소비에트 건축의 잃어버린 유토피아는 이브 수스만과 사이먼 리가 공동으로 제작한 시적 영상들에서 재생된다. <Seitenflugel(Side Wing)>, <겨울정원(Wintergarden)>, <미래와 과거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How to tell the Future from the Past)> 등은 모두 기하학적 형태의 특정 프레임-창문을 통해 보여진 일상의 풍경들을 제시한다. 사진과 영상의 경계에서, 정지된 듯 서서히 진행되는 영상 <Seitenflugel(Side Wing)>에서 창문 너머의 풍경은 익숙한 일상의 파편들이다. 관음증적 시선으로 바라본 일상의 풍경들은 그러나 실재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연출된 장면이다. 그러나 밖에서 훔쳐보는 듯한 ‘거리두기’의 시선은 내부 일상 풍경의 섬세한 알레고리를 모두 꿰뚫지 못한다.
3채널 비디오 영상 <겨울정원>에서 반복되는 기하학적 형태의 질서정연한 건축-창문 구조는 모더니즘 건축가가 꿈꾸었던 근대적 질서의 구현체이다. 이는 영화 <흰색 위의 흰색>에서 발견되는 20세기 중반 모더니스트들이 고안한 건축 형태의 동어반복이기도 하다. 1960년대 지어진 콘크리트 아파트 블록의 동일한 발코니를 보여주는 영상에서 발코니는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그 모습이 변한다. 동일한 구조 속에 여러 개의 다른 발코니 형상을 담아내는 것이다. 반복성과 동일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건축의 정치적 메타포는 소거되고, 대신 서서히 변화하는 영상의 시적 정취가 획득된다. 흔들리는 자동차 창문 너머의 풍경을 포착한 <미래와 과거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는 시간성이 혼재한 가운데 속도가 부여된 흔들리는 영상 이미지를 제시한다. 이러한 영상 이미지들에서 의미작용을 하는 두 가지 지점은 건축적 ‘공간’과 ‘시간’이다. 공간이 가지는 정치성과 내러티브는 과거와 현재가 혼재된 시간성에 의해 희미해진다. 이브 수스만의 영상에 내포된 느린 시간은 서서히 변화하는 모습을 짚어낼 뿐 아니라, 시간을 일시적으로 멈추게 하여 오랜 세월 그 건축에 깃든 삶의 겹들을, 기억들을 사유하게 한다. ●

eve2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