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HIBITION TOPIC Пен Варлен

DF2B3668

위 <쉬코토프스키> 에칭 49×91.4cm 1964 아래 <화가 표트르 포민의 초상>(맨 왼쪽) 캔버스에 유채 80×60cm 1973

냉전과 분단에 가려 제대로 조명조차 받지 못한 러시아 국적 한인 화가 변월룡(1916~1990)의 작품이 국내 첫선을 보였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변월룡의 삶과 예술을 입체적으로 조명한 대규모 회고전(3.3~5.8)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마련되었다. 연해주에서 태어나 러시아 미술계에서 활동했던 그는 1953년 북한을 방문해 북한 미술의 토대를 세웠지만 이후 정치적 이유로 입국이 거부됐고, 남쪽에선 그 존재조차 몰랐던 ‘숨은 거장’이다. 이번 전시에는 초상화와 풍경화, 드로잉 200여 점과 아카이브 70여 점이 소개되어 특정 이데올로기를 넘어 한 작가의 풍부한 작업세계를 선보인다.

향수(鄕愁)가 기억으로 : 변월룡의 특별한 귀향

조은정 미술비평

유화, 드로잉, 판화, 포스터 등 다양한 유형과 인물초상, 풍경, 정물, 역사화와 선전화 등의 작품은 리얼리즘이라는 축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변월룡은 도구와 감상, 의무와 창작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림 그 자체의 모습, 날것으로의 회화를 펼쳐낸다.
러시아의 한 전시실에서 한눈에 한국인의 그림임을 알아보고 변월룡이라는 화가의 존재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연구자 문영대의 저서 《러시아 한인화가 변월룡과 북한에서 온 편지》(2004)의 발간은 답보 상태에 있던 월북 미술인과 북한 미술계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이후 간간이 변월룡이 제작한 초상화 몇 점이 전시되곤 했고, 그때마다 그의 사실적인 묘사력은 대중의 관심을 붙잡아두기에 충분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미술 100년전>에 김용준, 이기영의 초상화가 소개되었고, 이 두 점의 그림은 광복 이후 북한 미술계의 형성을 파악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이후 2013년과 2014년에 전북도립미술관의 <한국의 초상미술, 기억을 넘어서전>에서 한상진, 원홍구, 이기영, 어부 한슈라 등의 초상화와 최승희 드로잉, 동판화 <북한 어부>가 소개되어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한 변월룡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변월룡의 작품 세계를 가늠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정보였다.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보레이(Borey)화랑에서 그의 딸 올가의 기획에 의해 성립된 전시마저 <펜 봐를렌 에칭전>이란 제목의 판화 전시였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변월룡의 작품세계 전모를 추정할 수 있는 최초의 대규모 전시이자 형상을 확정할 수는 없지만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한 그가 조국에 전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디아스포라의 미술인이 경험한 북한에서의 배신이 뼛속 깊었기에 생전에는 결코 잘 알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조국에 그가 작품이나마 돌아오는 상황을 그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카레이스키’라 불리는 이역에서 떠도는 한국인들, 그 쓸쓸한 연해주에서 태어나 미술인으로 살아간 변월룡의 생애는 한국 근현대사의 압축판이자 디아스포라의 삶 자체를 축약하여 보여준다. 그의 할아버지는 가솔을 이끌고 연해주로 이주하였고 변월룡은 그곳에서 태어났으므로 이주 3세대이다.
1916년 9월 29일 쉬코토프키구 유랑촌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의 미술 재능은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고향을 떠나 미술학교에 입학하는 데 기꺼이 마음과 돈을 보태게 하였다. 3년 과정의 미술학교를 마친 후 그의 뛰어난 실력을 알아본 교수는 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레핀미술대학 진학을 추진하였고, 레핀에서의 졸업작품 <조선의 어부들>로 그는 대학원 진학을 권유받았다. 1951년 예술학 박사학위 취득과 함께 모교인 레핀미술대학 데생과 교수가 되었으니 그는 소수민족 출신이라는 한계를 넘어섰던 것이다. 그리고 1953년 변월룡은 평양미술대학 고문 겸 학장으로 추대되어 커리큘럼을 재구성하고 교재를 손수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교수들도 지도하고 여러 화가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전후 북한 미술계가 그의 손에 의해 재편된 것이다.
1년 정도 평양에서 활동하던 그는 곧 평양을 다시 방문할 것이라 믿으며 부인이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북한에 귀화를 거부했고 연안파를 숙청한 북한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던 변월룡에 대한 기억을 지워갔으며 그는 조국이라고 생각한 어떤 땅도 밟을 수 없었다. 그는 방학 때마다 연해주를 방문하여 풍광과 소나무를 그렸다. 농경지를 개간하고 삶의 자리를 구축했던 고려인들이 소련의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모두 떠난 황량한 곳이지만, 그곳은 그에게 조국의 대체장소였던 것이다. 연구자 문영대가 지적한 것처럼 그는 “74년이란 삶 중 단 1년 3개월 남짓의 고국생활을 제외하면, 소련 땅에서 그것도 온전히 냉전시대만을 겪다 생을 마감”하였다. 그에게 조국이란, 구체적인 장소로서의 국가가 아니었다. 정겨운 사람들의 움직임과 산천에 대한 그의 시선을 좇다 보면 마치 복숭아꽃이 만발한 무릉도원이 그런 것처럼 소나무가 위치한 언덕, 그곳에 조국이라는 이름의 이상향이 펼쳐지고 있다.

 캔버스에 유채 115×200cm 1955

<조선의 모내기> 캔버스에 유채 115×200cm 1955

기억되는 사람들, 환기되는 장소
4개의 공간으로 구성된 덕수궁미술관의 구조에 맞추어 전시는 ‘레닌그라드 파노라마’, ‘영혼을 담은 초상’, ‘평양기행’, ‘디아스포라의 풍경’의 4개 주제로 구성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구소련 명칭인 레닌그라드는 우리가 익히 아는 사회주의 프로파간다 작품들이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암시한다. 계급투쟁 혁명을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 중요시하는 행복과 평등은 비참한 노동자와 농민의 모습과 대비된 환한 웃음으로 무장한 사람들 그리고 노동자 영웅으로 상징된다. 전형화한 포스터나 레닌을 주제로 한 일련의 판화는 그가 구소련에서 얼마나 활발히 활동한 작가였는지를 증명하는 듯하다.
위대한 예술가에서부터 학교 동료 교수에 이르기까지 그가 남긴 인물 초상화는 묘사력뿐만 아니라 그의 인물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사람의 앞모습을 보고 뒤통수를 그릴 수 있는 그의 데생실력은 인물에서 만개한다. 아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모자상의 현실적인 변주, 행복한 공간에 거주하는 소녀와 수많은 사회적 영웅은 그가 그린 집단 인물화들이 공공기관에 컬렉션된 이유를 알게 한다. 인물의 사회적 업무와 활동을 관계된 지물이나 그림 속 그림을 통하여 나타내는 아주 오래된 방식에 충실한 초상화는 그가 경직된 사회에서 활동하였음을 눈치 채게 한다. 그럼에도 작가의 다양한 변주는 인간 그 자체의 내면 표현에 집중한다. 예를 들어 《닥터 지바고》의 저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책상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있는데 한 손은 글을 쓰던 펜과 종이 위에 그리고 다른 한 손은 책을 지시하고 있지만 표정에서 우리는 고뇌를 감지한다. 석고상을 배경으로 하거나 파레트와 붓을 든 인물은 화가들이지만 그들을 표현해내는 변월룡의 붓질은 다양하고 표면의 마티에르는 더 이상 대상 인물의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길을 고정시키는 것은 휘슬러가 자신의 어머니를 그렇게 했던 것처럼 흰색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힌 그의 어머니를 화면 한가득 위치시킨 화포이다. 그럼에도 발길을 붙들고 변월룡이라는 작가에 대해 집중하게 하는 것은 그가 만난 월북 문화인들의 초상화들이다. 서울에 있는 아들인 원병오 박사와 북방 쇠찌르레기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조류학자 원홍구 박사는 박제된 새를 앞에 둔 채 다른 곳을 응시한다. 훈장을 주렁주렁 단 그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깊은 곳에서 쏟아져나오는 회한이 화포를 넘쳐 나온다. 무언가 말을 하고 있는 한설야, 생각에 잠긴 이기영, 한상진이나 이기영 모두 그 내면의 고독이 감지되는 것은 감상자의 센티멘털한 감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월북한 화가들 또한 더불어 귀향하였다. 황금색 스카프를 두른 채 그림을 들어 보고 있는 유화 속 김용준과 드로잉 안에서 파이프를 문 배운성에 이르기까지 분단된 조국에서 한쪽에서는 숙청되고 한쪽에서는 잊힌 그들이 아카이브라는 이름으로 유리진열장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화가 변월룡의 귀향에는 진심으로 그를 존경했던, 근대 잊혀가던 화가들이 동행했다. 파편화한 미술사의 어느 부분의 봉합이 이루어지는 순간인 것이다. 그리고 변월룡이 그려낸 조국의 모습이 그저 조국이라는 환상적 어느 장소인 것처럼 그들 또한 그렇게 미의 세계를 헤매고 있었음을 확인한다. 넘치는 사진자료와 꼭꼭 눌러쓴 정갈한 편지지 사이 공간에서. ●

사진(노란색파일)_08

변월룡은 1916년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의 후손으로 연해주 쉬코토프스키에서 태어났다. 러시아 최고 미술교육기관인 레닌 예술아카데미를 거쳐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1951년부터 35년간 모교 교수로 재직했다. 1953년 북한을 방문해 15개월간 평양미술대학 학장 및 고문을 역임하며 북한 미술교육 체계의 초석을 다졌다. 북한에서 소련파가 숙청된 이후 다시 북한 땅을 밟지 못했으며, 1990년 레닌그라드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