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가면의 고백

가면의 고백

서울대학교미술관 7.10~9.14

“사실 고백의 본질은 불가능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진짜 얼굴을 차마 내놓지 못합니다. 다만 살까지 파고든 가면만이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 미시마 유키오
미디어시대에 고백의 의미를 짚어보는 <가면의 고백전>은 시작부터 다소 도발적이다. “불특정 다수에게 드러내는 ‘나’의 고백은 너무나도 유희적이고 가벼우며 공격적이다.” 혹은 “미디어시대의 고백은 진실한 내면은 감춰두고, 매끈하게 정돈된 모습만을 보여준다”라는 지적은 SNS 유저가 아닐지라도 전시장을 도는 내내 뜨끔거리게 만든다.
전시는 네 개의 섹션(프롤로그, ‘가짜 사건을 고백하는 자’, ‘고백을 엿보는 자’, 에필로그)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 중앙에 루이즈 부르주아의 작품이 걸린 작은 방이 위치한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줄을 치듯 가운데에 웅크린 채로 다른 작품들과 연결되어 있기에 거미 형상을 한 그녀의 대표작 <마망>을 떠올리게 한다. “전제군주”와도 같았던 아버지의 외도, 어머니에 대한 연민 등 자신의 상처와 대면한 자전적인 작업은 ‘고백 예술’이라고도 불린다. 그녀가 유년기의 상처를 자신의 옷과 사용하던 천을 잘라 아름다운 문양으로 풀어냈다면, 정문경은 누구나 귀엽다고 인정하는 천 인형을 뒤집어서 바느질의 너덜너덜한 부분을 내보인다. 단지 안팎만 뒤집었을 뿐인데 푸우와 도널드 덕은 공포영화의 주인공처럼 기괴하다. 만약 누군가의 고백이 아름답지 않다면 과연 우리는 그것을 마주하고 싶을까, 듣는 사람의 마음을 고려해 너무 무겁지 않게 정리된 고백이 꼭 질타를 받아야 하는 것인가. 정문경의 인형은 고백의 형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에 비해 사진을 조합해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보여주는 김아영은 고백을 듣는 자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모래 욕조 속에서 발견된 영국인 교사 2007.3.28>는 2007년에 일본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맨션의 베란다에는 모래가 담긴 욕조가 놓여 있어 마치 영국인 영어 교사가 살해당한 현장을 찍은 것처럼 보인다. 사진을 잘라 붙이고 미니어처를 만들어 다시 찍는 과정을 거친 가짜이지만 쉽게 읽고 버려지는 신문이나 인터넷 기사의, 그 소비성의 본질을 묻는다는 고발의 측면에서는 무엇보다 진짜다. 복잡한 과정을 거치고 시간을 들여 다시 무대 위로 불러온 사건을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마주한다.
고백의 미추(美醜), 진위 여부를 다룬 ‘가짜 사건을 고백하는 자’에 이어 ‘고백을 엿보는 자’에서는 인류가 흔히 앓고 있는 질병인 관음증을 다룬다. 잘못 보기만 해도 죄가 되는 시대에 파리 유학시절 맞은편 건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몰래 찍은 사진을 선보인 예기는 스토커의 형식을 차용한다. 그들에게 ‘쏘피’, ‘쎄실’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때로는 그들의 패션 감각을 칭찬한다. 그녀를 처음 보던 날을 떠올리는 편지 형식의 글을 읽다보면 스토커에 대한 공포보다는 매일 마주하더라도 단절된  관계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은 왜일까? KKHH(강지윤+장근희)의 영상 작업인 <Chasing K>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우리는 나흘째 K씨를 쫓고 있다”고 밝히며, SNS상에서 알게 된 사람을 오프라인에서 따라다닌다.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를 짐작해 보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사생활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지만 실제로 그를 얼마나 알고 있을지, 진심을 털어 놓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인지 하는 의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진실게임에서 진심을 가장 잘 전하는 자는 때로 대답을 하지 않고 벌주를 마신다. SNS상에서 드러낸 나의 모습은 타인의 눈을 의식한 편집된 내면이라는 <가면의 고백전>의 지적은 예리하다. 그렇지만 비단 SNS뿐만 아니라 실제 생활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로 날것 그대로의 고백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정제되지 않은 형식의 고백이 꼭 추구되어야 하는 것일까. 루이즈 부르주아가 자신의 고백을 기하학적인 형태나 추상적인 무늬로 풀어내어 많은 이와 교감했듯이 때로는 직접적이지 않거나 아름다워서 고백은 강해진다.
<가면의 고백전> 입구에 걸린 일본인 소설가의 문구를 읽으면서 처음 떠오른 것은 한국의 시인 황인숙의 말이었다. “솔직이란 옷을 입고 저의 삿됨과 속됨과 추함과 비천함을 발산할 것인가, 아니면 제 한 몸 솔직하기를 희생해서 인간 정신의 아름다움과 고귀함과 의로움과 비범함에 봉사할 것인가.” 시인은 라로슈푸코가 후자에 높은 점수를 줬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 역시 세상에 악취를 끼치지 않는 시를 쓰길 원한다. 그냥 가면이 아닌, 살까지 파고든 가면이라면 예술에는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할 그 가면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가면의 고백은 어떤 의미에서 예술의 고백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하자가 없다.

박현정・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