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임승천 – 네 가지 언어 The Omnibus

임승천  __  네 가지 언어 The Omnibus

성곡미술관 5.2-7.27

‘네 가지 언어’라는 부제로 열린 임승천 개인전은 4막으로 구성된 옴니버스식 연극 같다.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는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설명하려는 가설이지만, 사실보다 더 사실처럼 다가오게 하는 강력한 가설이다. 거기에는 문학이나 연극, 영화같은 서사가 있지만 그러한 시간적 형식이 공간적 형식으로 번역될 때 간극이 발생한다. 막과 막 사이에는 도약과 비약이 있는 것이다. 서사적 요소들은 선형적 배열이 아니라, 관객의 상상력에 따라 다르게 조합되어 읽힌다. 열린 이야기이긴 하지만 서사와 형상은 서로를 받쳐주기 때문에 의미의 방향타는 존재한다. ‘상실’로 이름 붙은 1전시실은 심해의 풍경처럼 연출됐다. 제 몸보다 작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려 애쓰는 큰 물고기는 비대한 욕망의 덩어리이며, 주변에 배치된 사실적 혹은 신화적 인물들은 이 괴물의 희생자다. 희생자들은 발이 묶여있고, 등골마저 빨린 상태이다. 전시실 앞의 여주인공은 손에 피를 묻힌 채 경고하고, 이 모든 광경을 숙고하는 눈이 셋인 괴물/선지자 캐릭터는 작가의 또 다른 자아이다. ‘노시보(Nocebo)’로 이름 붙은 2전시실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라 할 수 있는 남녀 사이의 거짓말이 야기하는 비극의 무대다. 여성의 거짓말로 남성이 거인으로 석화되는 신화적 장면이다. 욕망은 상징계, 즉 언어와 사회를 무대로 하며, 언어에 실린 욕망이 주체와 객체를 모두 상징적 구조의 노예로 만든다. ‘고리’로 이름 붙은 3전시실은 희로애락의 4개 가면을 쓴 무뇌인들이 발목이 묶인 채 줄줄이 연결된 군상의 무대다. 이 집합적 정체성은 실제로는 원자화되어 있기에 강제적 연결이 필요하다. 연결망은 자연에서 발견되는 생명의 그물 같은 멋진 생태계가 아니다. 이성 및 합리성과 거리를 두는 이 분열적 개체들은 연좌제처럼 죄를 공유하는 클론들일 뿐이다.
‘순환’으로 이름 붙은 4전시실에서 서커스 천막 안 4단 케익 같은 구조는 조트로프(Zoetrope)처럼 돌면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천막 안의 구조물은 위로부터 시스템의 지배자/관리자/향유자/파괴자 순으로 배열된다. 체제를 선전하는 요란한 깃발, 감시하는 시선, 캉캉 춤 같은 소비의 향연 아래에서 브랜드 로고가 새겨진 벽을 치는 노동자는 시스템의 최말단 희생자이자 그에 도전하는 세력이다. 빙빙 도는 이 순환적 구조는 이익을 창출하는 기술로 환원된 사회를 상징하며, 각 계층을 이루는 문화적 정체성은 권력이 동원하는 요소일 뿐이다. 작가는 막간극에 잠시 등장한다. 막과 막 사이의 공간에는 가면 쓴 얼굴과, 원근법의 소실점에 위치하면서 세상에 대한 궁금증으로 흐릿한 유리창을 손으로 닦는 자폐적 인물이 보인다. 그는 가면이나 층층의 구조 뒤에 숨어있지만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세상에 대한 관심을 표한다. 보이지 않는 구조는 주인공들 못지않게 힘을 발휘한다. 심해처럼 색을 칠한 <Missing>은 무의식과 상실의 무대를 말하며, <Nocebo>에서 멀리 마주한 남녀를 연결짓는 것은 언어의 망이다. <Link>와 <Circle>은 사회 속 인간들이 맺는 관계망 그 자체이다. 구조는 인간들 사이의 드라마를 만드는 주된 요소이다. 인간은 그러한 구조의 산물이며, 익명적 구조에 얼굴 표정을 부여한다. 거대 물고기는 촘촘한 비늘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만 제 몸도 못 가눌 정도로 굼뜨다. 목적을 상실한 채 스스로를 유지 확대하는 것에만 몰두하는 현대의 비대화된 관료제를 닮았다. 비슷한 것들이 줄줄이 엮인 4면상의 군상은 4지 선다형 문제를 푸는 학생처럼 주어진 것 안에서만 자율성과 자유를 구가할 따름이다. 임승천의 작품은 이러한 체계 속에서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나 내밀한 자아도 왜곡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이선영・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