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토탈리콜-기록하는 영화, 기억하는 미술관

토탈리콜  __  기록하는 영화, 기억하는 미술관
일민미술관 4.11-6.8

<토탈리콜전>은 미술관과 영화관이라는 장소의 맥락에 따라 보여주기의 제시와 수용에 어떤 차이가 발생하는지를 다룬다. 미술관과 영화관이라는 장소의 차이는 생산자(작가)에게는 형식의 가변성으로, 수용자(관객)에게는 감상의 자율성으로 요약된다. 이 차이를 좌우하는 것은 공간이라는 요소의 개입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전시의 관건은 작품 배치와 설치에 있어 공간이라는 텍스트를 해석하는 방식에 있다.
일단 블랙박스를 피하려고 한 미술관의 의도는 합당하다고 생각된다. 영상물로만 구성된 전시에서 공간의 분리는 이미지와 소리의 간섭을 피하는 손쉬운 방식이나, 영화관과 다른 종류의 지각 경험을 지향하는 기획 의도에 위배된다. 대신 주최 측은 공간을 터 작업 간의 간섭을 수용하되 이를 통제하는 쪽을 택했다. 이 경우 실질적 난점은 이미지보다 소리에 있다. 빛의 산란은 스크린의 방향을 달리함으로써 극복 가능하며, 시각의 인지 범위가 한정되어 있어서 타 작업의 존재가 감상에 실질적인 방해가 되지 않는다. 반면 소리의 중첩은 관람의 주요 방해물이다. 모든 작업에 헤드폰을 배치할 때 소리의 간섭은 사라지나 관람 가능한 관객의 수가 제한되고, 스피커를 선택하면 다수의 관객이 관람 가능하나 산란 효과가 극심하다. 미술관은 음향의 유무와 비중, 자막의 존재 여부에 따라 헤드폰과 스피커를 혼합 배치하는 방식으로 이 딜레마에 대응한 듯하다. 예를 들면 스피커와 헤드폰을 혼용한 <고진감래>(2014)를 음향이 없거나 헤드폰만 배치한 작업 사이에 배치해 소리의 충돌을 피하는 식이다. 하지만 대부분 음향이 있는 작업으로 구성된 2층의 경우 미술관 측의 고육지책에도 불구하고 소리의 방해가 현격해서 이 문제가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고충임이 드러난다.
한편, 개별 작업을 공간 언어로 풀어내는 방식은 기획 의도를 구현하려고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 작품 배치에 비해 미흡한 감이 있다. 이 전시에 참여한 9팀 중 미술계에서 활동하는 작가는 셋이나, 그중 상영이 아닌 설치라는 차이를 분명히 구현해낸 작가는 정윤석이 유일하다. 흰 벽 대신 나뭇결이 드러나는 거친 가벽에 투사된 영상은 흔들리는 화면 및 거친 숨소리와 함께 용산참사라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육화해낸다. 영화계 기반의 작업 중에서 영사기, 스크린, 관객, 공간이 만들어내는 상호작용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예는 이행준+홍철기다.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영사기 앞 아크릴판에 반사되어 산란되는 그림자는 빛이 만들어낸 환영이라는 매체의 근본 조건을 드러낸다. 같은 맥락에서 공간의 해석에 있어 의미 있는 시도는 단채널보다 다채널 설치다. 하지만 3채널 작업인 김소영의 경우 채널들의 이미지와 소리가 서로 조응하며 합을 이루기보다 연관된 작업 세 개가 병치된 쪽에 가까웠다. 양면 스크린을 활용한 배윤호의 작업 역시 양쪽 영상 간의 대조가 뚜렷하지 않고 음향의 차이도 모호해서 설치의 효과가 충분히 살아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상영 장소는 특정한 관례를 함축한 구축된 제도의 상징이다. 미술과 영화라는 별개의 영역을 가로지르는 이 전시는 융복합 프로젝트가 부상하는 동시대미술의 추세를 따르는 것이기도 하지만, 장르를 규정하는 규범에 대해 재고하는 자기성찰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도 하다.

문혜진・미술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