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한효석-Crematorium-공중부양돼지

한효석  __  Crematorium-공중부양돼지
갤러리 아트사이드 4.10-5.1

전시장에는 얼굴 피부가 벗겨진 인물 초상화가 있고, 한켠에는 머리가 둘인 새끼돼지 형상이 금박이 된 채로 진열대 안에 설치되어 있으며, 아래층에는 덩치 큰 어미돼지와 새끼돼지들이 뒤엉킨 채로 공중에 매달려 있는데, 이 형상들은 그 크기와 색이 실제와 완벽하리만큼 똑같이 재현되어 있어서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다. 그는 혐오스러울 정도로 끔찍한 장면을 실제와 혼동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시장 입구에는 “나는 이번 전시를 통하여 불덩이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이 열정의 현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익명인이 잠시나마 욕망과 망각의 멍에를 내려놓고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마련하고 싶다”는 작가의 글이 쓰여 있다. 관람자로 하여금 자신을 들여다보도록 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라고 하기에는 작품을 처음 대할 때의 인상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고깃덩어리 초상과 돼지의 죽음 말고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다만 고깃덩어리로 묘사된 인물과 눈이 마주치면 마치 얼굴 피부가 벗겨질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약간의 감정이입이 가능한 정도이다. 자신을 들여다보게 한다니 그렇다면 저 끔직한 것들이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일종의 안도감을 갖게 하려고 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자행한 결과라는 것을 눈앞에 던져놓고서 우리에게 죄의식을 갖도록 하려는 것일까.
이번 전시는 <검증되지 않은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주제의 개인전 이후 작가가 5년만에 연 전시이다. 말하자면, 5년 동안 준비한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살덩어리 초상과 돼지 사체로 이루어진 전시는 그때와 구성이 비슷해 보인다. 다른 점은 이전 초상화가 동양인이 주를 이룬 반면, 이번은 서양인의 특성을 드러내고 있고, 조각에서는 돼지형상과 본인의 두상을 결합한 작품이 아닌 온전히 돼지 사체 자체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얼굴의 피부를 벗겨낸 초상화에 대해 작가는 인종이나 성적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없는 얼굴의 본질에 대한 묘사이며, 이는 인간 존엄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그 얼굴의 골격이나 생김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적으로 한갓 고깃덩어리여서 동양이든 서양이든 작가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에는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조각에서 본인의 두상을 제거하고 오로지 돼지 사체로만 묘사한 점은 큰 변화로 보인다. 예전의 작품이 동물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이나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번 작품에선 죽음을 직시하는 작가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괴기스러울 정도로 생생한 돼지사체를 만들어내기 위해 지난 시간 돼지농장에 작업장을 만들고, 번식을 위해 길러지는 모돈(母豚)이 죽거나 비좁은 우리에서 새끼돼지가 죽으면 바로 실제를 본떠서 작업을 했다. 모든 죽음은 인간이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최대이윤을 내기 위해 구축한 환경에 의한 것이다. 그는 돼지 사체를 통해 죽음을 얘기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인간이 자신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 자행한 비윤리적 행위에 대한 일종의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뉴스를 통해 동물을 ‘살처분’하는 끔직한 현실을 목격하면서도 먹거리의 풍족함에 대한 욕심을 포기하지 못한다. 고깃덩어리에 대한 연민에서 과잉생산의 욕망이 만들어낸 돼지사체라는 결과물은 우리에게 인간사회를 되돌아보게 한다. 사육당하고 살처분당하는 동물로부터 우리가 언제까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우리는 홀로코스트나 테러 등을 목격하면서 인간의 잔혹함에 대해 익히 알고 있다. 이러한 재난들은 비록 이데올로기에 의한 것이라 하더라도 자본주의가 그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대체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붕괴나 추락, 그리고 어떤 침몰 등 현대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잠재적인 것이 부분적으로 현실화되는 것이면서, 동물의 생매장과 홀로코스트의 유사성을 드러내는 징후일지도 모른다.
한효석의 작품은 지극히 혐오스럽고 끔직하다. 그는 “미술이나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 수 없는 것들을 끌어오는 데 집중한다”고 말한다. 현대예술은 아름다움이 예술의 고유한 미덕이라는 전제을 포기한지 오래다. 결국 자신의 피를 얼리거나, 동물을 산채로 절단해 박제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여기서 충격은 감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감상은 이제 이성이 아닌 감성의 층위에서 이루어진다. 돼지 사육은 단지 거기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다가올 재난의 암시일지도 모른다. 재난을 재현하는 것은  현대예술에서 금기시되곤 한다. 끔직한 현실을 재현하기에 예술의 모방적인 방식은 본질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난에 대한 암시는 예술이 해야 할 임무일 수도 있다. 현실을 직시하면서 예언할 수 있는 힘은 상상력에 의해 가능하기 때문이고, 상상력은 여전히 예술의 고유한 덕이기 때문이다. 한효석의 작품을 보면서 예술에 있어 재현에 대한 윤리를 생각해 보게 된다.

박순영・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