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강승희

강승희

노화랑 11.12~27

급변하는 현대미술의 시류에 치여 점차 그 존재감이 희석되는 대표적 장르가 판화다. 이런 시점에서 강승희의 이번 동판화 개인전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가장 전통적인 제작 방식인 드라이포인트 기법으로 제작된 100점의 작품엔 25년 이상 활동한 판화가로서의 전문적인 노하우가 담겨 있다. 작가 강승희는 판화장르가 미술대중화의 선봉에 섰던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중반 전성기의 주역이다.
특히 제5회 공간국제판화비엔날레(1988)와 제10회 대한민국미술대전(1991)을 연이어 대상으로 석권한 이력은 그가 국내 판화계의 대표주자로서 얼마나 큰 주목을 받았는지 잘 보여준다. 더구나 가장 전통적인 방식을 줄곧 고수하면서도 표현 소재는 주변의 현실에서 찾았다. 이처럼 동시대적 감성을 자신만의 관점으로 재해석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주제의식을 이어온 점도 주목할 만하다.
강승희는 동판화 고유의 단색 톤을 고집하고 있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 역시 검은색의 향연이었다. 또 새벽풍경 일색이다. 새벽은 강 작가가 검은색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지를 잘 보여주는 중요한 모티프이다. 빛을 사로잡은 검은 장막이 아니라, 품었던 빛을 서서히 뿜어내는 새벽 기운의 색이다. 어둡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검은색은 아픔과 고독을 치유하는 힐링의 힘을 지녔다.
그런데 새벽풍경으로 포착된 장면들 중에 도심 언저리의 정경들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저 멀리 내려앉은 별꽃처럼 켜진 빌딩숲의 불빛들, 추수한 지 얼마 안 된 들판의 온기, 마치 사람처럼 고고하게 서서 지평선을 바라보는 소나무나 자작나무들…. 이는 서울 도심을 떠나 인접한 김포시에 자리 잡은 작업실에서 만난 풍경들이다. 비록 탁 트인 김포평야 혹은 원경의 시원한 한강하류 강줄기라도 왠지 모르게 사람냄새가 채 가시지 않는 이유 역시 작가의 숨은 의도인지 모른다.
제주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강승희의 감성은 어쩌면 서울이란 대도시를 커다란 섬으로 받아들이게 한 것은 아닐까. 바다에 둘러싸인 제주에서의 고독,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사람과 인공의 불빛 속에서도 떨칠 수 없었던 외로움의 무게, 이 둘은 너무나 많이 닮아 있었을 것이다.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의 실타래는 검은빛을 만나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그 어떤 아픔의 상처라도 부드럽게 감싸줄 것만 포근함을 지니게 된 것이다.
강승희의 작품이 보여주는 담백하고 섬세한 번짐의 매력은 수묵화 못지않은 호소력을 지녔다. 그 시각적인 표현들이 먹물과 여린 붓이 아니라, 강철 침으로 금속판을 긁어 만들어낸 결과라는 점은 놀라울 따름이다. 동판화 본연의 전통적인 특징을 유지하면서도 일반 노출부식 기법 이상의 작가적 노하우를 발휘한 회화적 독창성은 그를 지탱하는 중요한 경쟁력이다. 부식판화가 지닌 날카롭고 차가운 금속성의 선에서 더없이 부드러운 감촉을 이끌어내는 서정적인 감수성이 일품이다.
강승희 판화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요소 중에 탁월한 여백의 운용 능력을 빼놓을 수 없다. 화면을 장악한 색은 오로지 검은색이다. 정확히 말하면 검은빛을 발산하는 존재감이다. 어떤 작품은 백색이 여백인가 싶으면, 또 다른 작품은 흑색이 여백이다. 서로 반전과 충돌을 거듭하는 흑백의 묘한 여백 운용이 곧 작품의 생동감을 자아내는 에너지원인 셈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적인 감성이 녹아있다. 마치 자연의 너른 가슴에 안긴 도심은 외로운 고독의 섬이 아니라, 어느새 지친 현대인의 가장 평온한 쉼터가 됐다고 말하는 듯하다.

김윤섭·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