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유의 부정정신을 덮는 무력감

사유의 부정정신을 덮는 무력감

무빙트리엔날레 9.27~10.26, 부산비엔날레 9.20~11.22

문화산업이 되어버린 전시, 비엔날레 또는 트리엔날레는 예술의 저항성을 해체하고 상품화하고 작가를 익명화함으로써 자본주의 사회의 전형적인 상품화로 이끌려가고 있다. 그곳에는 동일성의 욕망에 빠진 익명의 상품들이 있을 뿐 개별자의 다양한 목소리는 묻혀버리고 없다. 동일화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개별성이 사라진 예술은 이미 예술로서의 어떤 존재감도 가지지 못한다. 이 시대 유일한 사회적 저항인 예술조차 상품이 된 전시에 그토록 목을 매는 기획자와 작가는 누구일까. 그 자신을 상품화하고 몸값을 올리려는 작자들이 아닌지. 한 시대를 저항으로, 지식으로, 감성으로 만나는 조망은 이미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은 한 시대를 사유하는 자가 아니다. 그저 장사꾼들이 예술작품인 척하는 시늉에 몸을 숨기고 있을 뿐이다.
기존 전시와 다른 길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무빙트리엔날레>는 저항의 한 형태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전시라는 구조 안에서 행사를 하겠다는 발상은 현실 추수(現實 追隨)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저항은 언제나 기성세력과 다른 의미 맥락과 전략의 전위성을 가져야 하는데 그에 미치지 못했다. ‘전시’라는 형태에 집착하고 기존 어법으로 대항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무빙트리엔날레>는 현실 추수와 현실 저항이라는 양면성을 가진다. 그런데 비하면 <부산비엔날레>는 전시라는 기존 시스템의 덕을 톡톡히 보는 입장이다. 비교할 수 없는 예산과 인력자원과 장소와 시간을 가지고 시작했고, 그 덕에 빠지지 않는 모양을 갖춘 셈이다. 이 대비야말로 오늘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다. 그러나 전위적 작품들의 시도마저 정비된 공간에 들게 됨으로 순식간에 전위가 제도화되거나 예각이 무뎌지는 경우를 목격하게 된다. 공장 일부를 빌려서 한 전시를 비롯해 비엔날레 본전시와 특별전은 밋밋하고 무미했다. 또한 작가나 작품은 전시 전체의 맥락에 묻혀 개별성이 드러나지 않고 볼거리로 내몰려 각이 선 사유는 지워지고 재미와 신기함으로 밀려나는 수모를 당하고 있다는 무력감을 떠안은 셈이다.
<무빙트리엔날레>는 <부산비엔날레>의 비민주적 전횡에 반발하여 만들어진 고통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이번 한 번이면 족하다. 그만한 대응도 없고 의미심장하게 우리를 돌아보게 하고 그 대항적 힘을 확인하게 한 것도 여태껏 없었던 일이다. 그런 면에서 이 행사는 돋보이고 한국 현대미술사에 한 점, 바둑판의 화점에 돌을 놓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전시가 대항이 아니라 새로운 힘과 조직이 되고 또 다른 권력이 된다면 기존 <부산비엔날레>와 다를 바 없다. 그들이 하는 전시 운영과 이념은 새로울 게 없다. 그저 또 하나의 전시를 만들고, 작품은 볼거리로 제시되고 예술이 가진 부정 정신을 부각시키기보다 기획자들이 이 전시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동의를 구하는 다급함만 보일 뿐이다. 문화연대로 힘을 보이려 한 탓인지 행사는 산만하고 더욱더 볼거리에 매달려 있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규모나 작가군이 다르고 장소가 달라도 여전히 기존 전시조직이 보여주는 권력에의 유혹과 다르지 않다. 단순하게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전횡을 용인하는 제도적 미비에 대한 대항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기술과 조직이 행사하는 지배의 규정들에 벗어나는 일로부터”((이순예《 아도르노와 자본주의적 우울》 풀빛 2005 p.309) 개별 주체의 인간성을 확보하는 것으로, 전시와 예술과 기획을 이해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다시 유사한 행사를 기획하거나 이를 기화로 다른 힘을 규합하거나 대항이라는 이름의 유사 국제전을 기획하는 주체로 작동하는 것은 옳지 않다. 트리엔날레가 기존 조직의 미비점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거나 불온한 의도로 만들어졌다거나 운영되었다는 지적이 아니다. 조직이란 언제나 같은 속성 안에서 움직이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조직 운영이 우선적이며 개별자의 배려보다 전체의 일관성, 동일성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 예술이 가진 근원적 속성인 개별성은 기존 행사와 마찬가지로 동일화의 추세로 이끌려나갈 수밖에 없으며 정작 우리가 주장하고 안타까워하는 예술성과 예술가의 이미지는 상품으로 세인의 입에 오르내릴 뿐이다. 그것이 가난을 무릅쓰고 작업장을 지키고 인생을 거는 이유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자본이 개인의 감수성을 통제하는”(앞의 책 p.311) 이 시대에 그것에 대항하는 것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비엔날레 등의 국제적 행사는 세계를 동질화하고 자본 예속으로서 제도에 종속되게 하고 있다. 부산비엔날레는 물론이고 트리엔날레 역시 국제전이라는 규모가 요구하는 자본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불문가지다. 예술은 이제 개별성의 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야 이 시대에 대항한 한 시대의 사유로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토록 자본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전시 형국은 결국 예술마저 자본재로 만들거나 그저 볼거리를 제공하는 업자들만 양산할 뿐이다
전시 역시 작품과 작가의 개별성을 부각하지 않는다면 어떤 의미도 생산하지 못하고 그저 상품시장에 내놓은 다른 전략일 뿐이다. “예술은 사회적 이성의 타락에 맞섬으로써 존재 의의를 획득한다.”(앞의 책 p.330) 그렇다면 유사한 전략으로 상대를 닮은 쌍둥이를 낳는 것은 올바른 저항의 형태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조직을 다듬기보다 다른 일에 매진해야 할 것이며, 상품화되는 세태에서 예술을 온전하게 작동시킬 수 있는 기획과 의지로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개별성은 사회의 거짓에 참답게 저항할 수 있는 근거지가 된다. 개별성이 참다울 수 있는 까닭은 아무리 사회가 거짓되더라도 개체가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나름의 모색을 하기 때문이다.”(앞의 책 p.340) 그래서 현실을 비동일성으로 사유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 역할은 당연히 예술의 몫이며 반성의 역할이어야 하는데 기존 비엔날레에서는 그런 기대가 불가능한 것 같고 트리엔날레 역시 그런 기대에 부응할 것 같지 않다. 아니 그 역시 자본의 한 축에 의해 움직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우려는 개인의 무능이나 전횡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를 놓치는 데 기인하는 것은 아닌지를 묻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예술작품은 반드시 모든 시대에 유효한 가치는 아니다. 특정 시대의 환경이나 작품을 ‘소비’하는 바로 그 사회집단에만 유효한 가치를 전달한다”(오스틴 해링턴, 정우철 옮김《 예술과 사회이론》 이학사 2014 p.34) 이 말을 되씹을 수 있다면 이 두 행사는 정말 누가, 어느 집단이 ‘소비’하는 가치일까. 여행은 완성을 거부한다. 곧 떠나야 할 것이므로 가능하면 몸을 가볍게 하고 짐을 줄이는 것이 원칙이라면 원칙이다. 사는 것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데, 그래서 많은 사람이 한번쯤 나그네 길을 권하고 인생의 짐을 가능하면 가볍게 하기를 체험해보기 권한다.
<무빙트리엔날레>를 보다가 그런 생각을 한다. 몇 군데로 흩어져 있는 전시 장소를 찾아 나서면서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처음 본 연안부두의 작업들, 가방들은 그런 생각을 마구 쑤셔 넣고 마구 내놓는 그런 형용이고 보는 이의 인상도 그와 다르지 않다. 이동 가능한 작품들, 이동 가능한 전시, 그것은 이동의 용이성 때문에 많은 것이 용납되고 허용되고 용서되는 것을 의미한다. 완성도도 전시 방법의 임의성도 우발적인 재치도 그렇다. 단조로운 소재, 가방을 가지고 무빙 워커(트랙)를 따라 전개된 볼거리들은 비슷비슷하고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기획자나 전시 주체의 시선은 분명하지만 작가도 개별적 작품도 드러나지 않는 그런 전시이자 연출이다. 그리고 흔히 비엔날레나 외국 작가가 많이 참가하는 전시에서 목격되는 ‘놓고, 달기’라는 가벼운 편의성, 현장에서 수집하고 버릴 수 있는 소재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공중에 매달리고, 바닥에 널브러져 놓이고, 평면으로 공간을 차지하는 산개의 방법 역시 마찬가지다. 작품 관리 차원에서 주저주저 수동적으로 연출되는 관람객 참여라는 단조로운 방법들도 어렵지 않게 목격된다. 그리고 산만할 정도로 쌓아놓거나 평면으로 늘어놓기인데 무빙 트랙에 놓인 가방들 역시 이런 맥락의 재현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적당한 거리에서 보는 것, 현장성도, 개입도 없는 ‘보기’의 맥락에서 전개된다. 그래서 일상은 친근한 일상이 아니고 생활은 삶으로서 생활이 아니라 ‘보기’의 거리를 가진, 모더니즘의 재연이다. 작품 보호라는 명분이 이를 정당화한다면 그 역시 모더니즘의 맥락일 뿐 일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두고 보는 것이다. 지저분한 것들의 성스러움으로 전도된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사물들일 뿐이다. 복병산도, 노인정의 전시도 그저 봐왔던 미디어일 뿐 장소에 적절하거나 생활에 치중했거나 이미 거주하는 것과의 괴리를 없앤 것도 아니고 허술하다. 기상청의 계단은 그저 계단일 뿐 그곳에서 전개된 작품은 그런 기대와 급경사의 노역을 전환시킬 만한 작품이 아니다. 그저 그곳에 있을 뿐, 거기 있기 때문에 그곳이 보이는 것이 아니다. 장소로서 전시공간을 배려한 설치라고 보긴 힘들다. 골목길로 이어지는 전시 장소로의 이동이 도리어 새로운 장소에 대한 새로운 경험, 다양한 곡절의 공간을 체험하는 삽상함으로 이어진다.
급진적 전시, <무빙트리엔날레>가 구성한 이 다급함은 순수니 권위니, 완결성이니 하는 것과는 처음부터 거리가 있는 것이다. 어떤 완성도 거부하면서 질문할 뿐이다. 그러나 <무빙 트리엔날레>는 그저 말의 넘쳐남과 이미지의 궁핍을 보여줄 뿐이다. 시간, 장소, 예산상 어려움을 들어 몸을 피하고 싶다면 행사는 이미 처음부터 그른 것이다. 몸을 숨기지 말고 현상 자체를 직시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무빙트리엔날레>가 ‘부패한 욕망’과 만나지지 않기를 바란다. 기존 행사에 대한 저항과 반발, 민주적 운영의 새로운 모색이 곧 그들이 내세운 대의와 운영의 정당성과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동일시에 빠지거나 자위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적을 만난 꼴이다. 운영의 정당성은 때로 반드시 결실을 얻기 위해서 관료조직에 의존하는 데 너무 잘 길들어져 있는 부산비엔날레와 다른 논쟁점을 찾지 못하게 할 것이다.
<부산비엔날레> 역시 편집증적 징후로 여겨지는 전시 연출과 산만하고 상투적인 작품들은 격년으로 재연되는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맥락은 여느 전시, 여느 해와 다르지 않다. <광주비엔날레>나 <서울미디어아트비엔날레>, 베니스나 리옹 혹은 <휘트니비엔날레>나 <요코하마트리엔날레>를 눈여겨본 사람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뻔한 작품군의 맥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비엔날레는 그저 국제적 스탠더드일 뿐 어떤 전위적 의지도 없이 그저 상업화되고 있다는 비난을 받는 것이 아닐까. 거대한 흐름에 역주행하는 개체성이야말로 예술의 역할이고 작가의 존재 이유지만 이 전시에서 작가는 없어지고 전시만 남은, 그런 정도는 어렵지 않게 판단될 것이다. 게다가 사회 비판이라는 다급함에 몰린 듯 제의적인 연출과 작품들이 눈에 띄지만 느슨하기만 하다. 죽음, 고발, 고통, 소외, 축제들이 등장하지만 그것들은 폐쇄적인 공간에서 민족지적 관습에 의해 이해되기보다 색다른 볼거리로 강요될 뿐이다. 특히 사진 기법으로 재연된 표현과 이를 이용한 설치작업은 현장의 리얼리티를 묘사하는데 효과적이지만 벽면을 구성해서 현실감을 더하고 제의를 재연하는 연출은 일상에 근거하고 있다는 강압적 이해를 요구한다. 커다란 인화 가능성에 의한 작업들이지만 이미 낡은 내용이자 방법이다. 그런 것을 두고 문화의 다양성을 보여준다거나 생활에 근접한다고 판단한다면 보는 이를 난처하게 할 뿐이다. 장애인을 엿보는 장치나 단골 메뉴가 된 인터뷰와 밋밋한 영상, 사진의 합성 역시 구태의연하고 식상하다.
음식상에 오른 사진작업이나 사진작업으로 가능한 활동사진 등은 디지털 작업을 통해 움직임을 얻고 그 움직임은 가상적 공간을 현실적 공간으로 번안하면서 새로운 실제, 가상실체를 만들고, 현실과 무관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저항의 의미를 새긴다. 그러나 이런 설치들과 구성은 영상기기를 사용하면서 폐쇄적인 공간을 반드시 요구하는 듯하고 그 요구만큼 현실과 거리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그 폐쇄적 공간은 사적 공간을 요구하고 영화를 보듯 어두운 공간에서 여러 사람이 있으면서도 각자의 공간으로 여기는 장소를 만든다. 이런 맥락의 전시들은 소리, 영상과 더불어 이미 익숙하지만 분명 새로운 미술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한바탕 연극적인 소품들로 이루어졌다는 인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예술과 삶의 거리는 그곳에서 또 한 번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관조의 거리라고 말한다면 생활 속에 거주하기라는 언술은 자기모순적 발언에 지나지 않는다.
설치와 영상, 오디오를 이용하는 미디어작업은 전시장 안에 또 다른 방을 구성해야 하고 결국 인간을 철저하게 개인화시키고 전체적 맥락보다 개별적 만남을 만들고 총체성을 얻기 힘들게 한다. 전시 구성의 편의성이 전시의 특색이 되고 국제전의 한 경향을 주도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가까운 것에서 거리를 만든다. 일상과 예술은 언제나 그런 정도의 거리에서 만나지 못한다. 혹 그것을 시각예술의 속성으로 거리를 확보하는 당연한 결과나 한계로 오인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시각이란 언제나 보는 이와 일정한 거리를 가질 때 제대로 보인다. 그 거리야말로 모더니즘의 온갖 장점과 문제점을 만든다. 삶과 유리된 예술, 상층부의 취향이 된 고가의 예술품, 그리고 전시공간의 제의성 등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거리란 볼거리로 취급되는 일상을 말하는 것이다. 일상의 거주는 거주가 아니라 언제나 볼거리의 거리를 만들어줄 뿐이다. 비엔날레의 이런 전시 구성은 상투적이다 못해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사유가 아니라 볼거리의 제공에 지나지 않으며, 영화를 보듯 전체 공간 안에서 개인적 공간, 개인적 만남으로 가능한 즐김의 형식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삶의 사유가 아니라 개인적 즐거움을 유도하고 전체를 잃게 한다. 생활 속에 거주하기란 즐김 속으로 관객을 유도하고 고통조차 즐기게 한다. 관객은 소비자일 뿐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를 받치고 있는 자본주의적 개인주의를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부산비엔날레>나 <무빙트리엔날레> 모두 그저 국제적 양식의 스탠더드를 꿈꿀 뿐 어떤 새로운 사유도 찾아보기 힘들다. 볼거리로 제공된 것들을 즐기고 있으면 된다는 투다. 즐김은 스펙터클이고 스펙터클은 내용보다 현존하는 효과에 주목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예술은 오늘날 즐기는 것이 되고 말았다.
“즐긴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것, 고통을 목격할 때조차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즐김의 근저에 있는 것은 무력감이다. 즐김은 사실 도피다. 그러나 그 도피는 일반적으로 얘기되는 잘못된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마지막 남아 있는 저항의식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오락이 약속해주고 있는 해방이란 ‘부정성’을 의미하는 사유로부터의 해방이다.”(Th.w.아도르노, M.호르크하이머, 김유동 옮김《 계몽의 변증법》 문학과 지성사 2001 p.219)

강선학·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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