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REPORT | LONDON Dislocations Remapping Art Histories

지난해 말, 영국 테이트모던에서 열린 <Dislocations: Remapping Art Histories>는 근현대 아시아 미술사를 탈서구적 시각에서 보고자 기획됐다. 모더니즘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현실적인 대안, 즉 다차원적 아시아 미술의 양상을 들여다보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 총3부로 구성된 이 컨퍼런스의 토론 현장을 정리했다.

아시아 미술사 쓰기, 뒤집어보기, 연대하기

지가은 런던 골드스미스대학 비주얼 컬처 박사과정

서도호는 자신이 살던 집을 실물 크기의 천으로 본떠 모기장처럼 접어 가방에 넣고 세계 곳곳을 옮겨다닌다. 그의 서울집, 뉴욕집, LA집, 베를린집은 새로운 공간을 만나 매번 다시 지어진다. 때로는 복도나 통로를 따라 서울집과 뉴욕집 두 채가 나란히 이어지는가 하면, 한 집 안에 다른 한 집, 그 안에 또 다른 한 집이 들어앉아,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이 되기도 한다. 어린 시절을 보낸 한옥집, 유학 기간 생활하던 아파트, 해외 활동으로 머물던 스튜디오는 본래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와 전혀 다른 시공간의 지점에 안착하거나 연결된다. 반투명한 천으로 직조되어 집의 안과 밖을 구분해주는 경계와 조건들도 희미해진다. 이들은 집주인의 지극히 구체적이고 내면적인 기억으로부터 시작된 사적인 공간이면서, 새로 안착한 지점의 특수한 사회적, 역사적 맥락과의 관계 맺음과 대화를 촉발하는 상호적 공간이 된다. 또, 이를 마주하는 관객에게는 각자의 집에 대한 경험과 기억이 투영될 수 있는 보편적 공간으로 전치된다. 말하자면, 서도호의 이동하는 집들은 과거와 현재, 내부와 외부,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 문화와 문화, 나와 타자가 연결되고 교차하며, 그 안에 겹겹이 자리 한 무수한 이야기를 모두 담아내는 공간인 것이다.
지난 2015년 12월 3, 4 양일간 런던 테이트모던에서 열린 <전치: 미술사 지형도 다시 그리기(Dislocations: Remapping Art Histories)> 콘퍼런스는 서도호가 자신이 옮겨다니는 집 속의 집의 여정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 포문을 열었다. 바로 이 여정이 본 콘퍼런스에서 풀어놓고자 하는 이슈들의 실마리를 꿰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안과 밖, 중심과 주변이라는 이분법적 경계를 허물고 이를 뒤집어보는 일, 전치된 시공간의 이질적 요소들과 수평적인 관계 맺기를 시도하고 그 안에서 나 스스로의 이야기와 본질을 찾아가는 일, 한 공간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겹겹의 개인적, 공동체적 기억과 역사의 이야기 망들을 연결해 보는 일이다. 핵심은 근현대 아시아 미술사의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인 양상을 탈서구중심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고, 미술사 쓰기와 실천의 수평적인 연대를 고민해보는 데에 있었다. 총 3부로 구성된 프로그램은 (1)퍼포먼스: 확장된 영역(Performance: An Expanded Field), (2)아시아가 만나는 지점: 중심부의 탈식민화(Where Asias meet: Decolonising Centres), (3)동시대 미술과 사회(Contemporary Art and the Social)로 진행되었다. 특히, 20세기 아시아 지역의 퍼포먼스와 사회참여적 미술 흐름을 집중 조명하는 사례 발표가 이어졌다.
20세기 아시아 국가들은 지역마다 특수한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전통과 환경 속에서 급격한 변화를 거쳤거나,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변화의 소용돌이를 통과하고 있다. 전쟁과 식민의 역사와 잔재,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경제 이데올로기의 충돌, 독재정권과 민주화의 갈등 등 저마다 다른 조건에서 전개된 아시아의 근대화 과정과 근대성의 개념은 단일한 형식이나 범주로 묶어 설명하거나 서술할 수 없다. 영국의 피터 오스본(Peter Osborne) 박사는 《시간의 정치학(The Politics of Time)》(1995)에서 근대성과 근대화 담론을 규정하는 시간성을 설명하면서, 연대기적으로는 같은 시간대를 공유한다고 하더라도 지리적으로 차별적인 공간에서 나타나는 비동시성을 지적한 바 있다. 각 지역의 다양한 문화적 토양과 형태에 따른 시간성의 국면에는 어떤 질적인 차이가 있는지, 이를 역사화하는 관점과 서술 방식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비서구권인 아시아가 서구권의 후발 주자로서 근대화되었다는 인식, 문화적 우위를 점한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그 영향력이 옮아간다고 보는 인식, 식민지와 피식민지라는 관계 설정 안에서만 전자의 역사 서술이 가능하다는 논리는 기본적으로 동질성과 지속성에 기반을 둔 역사적 시간과 서술 구조를 가정하는 것이다. 이는 미술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그래서 예술의 중심부로서의 서구권과 주변부로서의 아시아라는 관계도를 탈피하고, 인과관계의 동질성이 아니라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지역과 미술의 생태적 관계도를 그리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이러한 위치 재편의 과정은 다층적인 아시아 미술 지형도의 파편적, 구체적인 편린들을 모아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콘퍼런스에서 다뤄진 사례들은 주로 구체적인 지역적 움직임들을 풀어놓았다. 1부 <퍼포먼스: 확장된 영역(Performance: An Expanded Field)>에서는 전후 아시아에서 일어난 사회 비판적 어조의 퍼포먼스 미술 동향을 살펴보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 이그나시오 아드리아솔라(Ignacio Adriasola) 교수는 아라카와 슈사쿠(Arakawa Shusaku)의 활동을 중심으로 1960년대 일본의 퍼포먼스 미술을 소개하면서, 초현실주의의 ‘objet’ 개념이 아닌, 적극적인 관객 참여와 각성을 주도했던 ‘obuje’의 사회정치적 의미를 분석했다. 미시간 대학 티나 리(Tina Lee)는 계엄령이 선포되기 직전의 1970년대 필리핀 미술계가 처했던 억압적 사회 분위기와 이에 도전한 필리핀문화센터의 개관 기념 해프닝 <Cassettes 100>의 기록을 추적했다. 뒤이어, 뉴욕 대학 리 앰브로지(Lee Ambrozy)는 2000년대 이전 중국 퍼포먼스 미술의 흐름이 정부 검열과 통제 속에서 어떻게 타지역과 다른 개념적 행보를 보였는지 그 독자성에 주목했다. 퍼포먼스 미술은 현장 에너지의 즉각적이고 융합적인 특징 때문에, 보다 능동적인 공론화의 장을 생성하는 힘이 있다. 각기 다른 특수성을 지닌 지역 사회의 변혁을 위한 목소리와 행위를 담아내는 직간접적인 그릇과 도구로써, 퍼포먼스 미술의 수행성을 조명하는 것은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그 사회의 내부에서부터 일어난 예술적 실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더불어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를 들여다보는 일 말이다.
이어진 2부 <아시아가 만나는 지점: 중심지의 탈식민화(Where Asias meet: Decolonising Centres)>는 특히, 20세기 유럽중심주의적 관점과 거리를 둔 아시아 미술사 읽기와 쓰기의 자생적인 담론 형성과 방법론에 대한 고민을 촉발시켰다. SOAS대학의 파멜라 코리(Pamela N. Corey) 교수는 캄보디아가 식민, 전쟁, 독재, 민주화 등 지난한 역사를 통과하는 동안 프놈펜이라는 도시가 겪어야 했던 무차별적인 서구식 근대화의 흔적, 이에 따라 파괴된 시민들의 삶과 도시환경을 기록한 사진들에 주목했다. 그 안에 스며든 집단적 기억을 소환하는 사진의 역할과 매체성도 함께 짚어보았다. 그다음은 인도로 이동한다. 워싱턴 대학의 소날 쿨라(Sonal Khullar) 교수는 인도에서도 전통적 성향이 가장 강한 도시인 봄베이를 중심으로 활동한 1960~70년대 화가와 시인들의 관심사가 도시 거리 자체의 풍경과 일상으로 옮겨간 현상을 포착했다. 후기식민지 사회의 이러한 변화는 당시 예술가들의 빈번한 교류에 따른 결과물이었고, 본래 지역사회의 일상적 면면으로부터 새로운 형식의 주체성과 공동체 의식이 발현된 중요한 계기였다고 해석했다. 한편, 칼턴 대학 밍 티암포(Ming Tiampo) 교수는 전후 시기 파리를 교류와 통로의 공간으로 보았다. 그는 파리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이주 아시아 예술가들이 어떻게 일방적인 오리엔탈리즘을 해체하고, 역으로 파리 미술계에 영향력을 미치며 새로운 추상세계를 구축했는지를 세계 지도의 확장된 지면 위에서 추적했다. 이들의 행보 속에서 초국가적인 지역주의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선두주자와 후발주자라는 위계에서 비롯된 타자화된 담론 대신에, 아시아 미술 서사들의 비동시성에 귀를 기울이고 이 다성적인 이야기들의 교차 지점을 연결해보는 ‘매핑(mapping)’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자생적이고 대안적인 담론들을 이끌어내보자는 것이다. 콘퍼런스의 컨비너 중 한 사람인 미시간대 조안 기(Joan Kee) 교수는 관성화된 양자 구도의 지형도에서 벗어난 도시와 도시 사이의 ‘이웃’ 맺기라는 연대 의식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는 서구와 비서구권 간의 상호 교류를 전제한 수평적 관계뿐만 아니라, 아시아 내 이웃한 미술 서사들 간의 교류와 연대를 포함하는 것이다. 내외부를 오가는 미술사 연구의 서로 다른 층위들을 병치하고 공유하는 기회 속에서 비로소 새로운 차원의 아시아 근현대 미술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매핑을 가시화하는 노력은, 끝으로 3부 <동시대 미술과 사회(Contemporary Art and the Social)>에서도 이어졌다. 중국 본토와 대만의 사회참여적 미술의 미묘한 관계와 차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독립 큐레이터 쑤웨이(Su Wei)는 중국 정부의 정치적 검열 안에서 미술비평의 자기성찰과 참여의 의미란 무엇인가에 대해, 대만의 미술비평가이자 큐레이터인 루페이이(Lu Pei-yi)는 후기산업화와 민주화 시기 대만의 사회정치적 기후를 비롯해, 2000년 이후의 중국-대만 관계를 반영하는 사회참여적 미술의 특징적 면모에 대해 설명했다. 한편, 홍콩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 쩡보(Zheng Bo)는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이념극 무대와 오늘날 중화권의 사회참여적 미술의 연계성에 대해 성찰하고 그 형식과 내용의 동시대적 의미를 되물었다.
여러 지역과 주제, 작품을 아우른 이번 콘퍼런스의 목적은 20세기 미술사 서술에서 고착화된 중심부와 주변부의 의미와 개념을 전치시켜보는 것이었다. 이어진 패널 토론에서도 무엇보다 아시아 미술을 바라보는 미시적, 거시적 관점과 방법론을 한자리에 모아 새로운 연결고리로 맺어보는 이러한 시도가 지속돼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결국 이러한 연대는 서구 중심의 모더니즘 담론을 뒤집어 볼 수 있는 아시아 미술의 전통과 정체성이 무엇인가, 탈서구화된 담론의 실천이 가능한가라는 난제에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일 것이다. 지역 단위의 작은 이야기들이 이웃한 또 다른 이야기들을 만나고, 지리적 경계를 옮겨다니면서 아시아 미술을 재맥락화하는 움직임이 가시화되려면, 매개체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매개체는 도시 사이를 활발히 오가는 연구자들의 활동이 될 수도 있고 이들을 이어주는 플랫폼이 될 수도 있다. 콘퍼런스를 주관한 테이트 아시아 리서치 센터(Tate Asia Research Centre)는 2012년에 설립되었다. 이후 이숙경 리서치 큐레이터를 필두로, 한국, 중국,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의 근현대 미술 연구와 교류 활동에 주력해왔다. 올해부터는 ‘아시아-태평양 리서치 센터’에서 ‘아시아 리서치 센터’로 공식 명칭을 바꾸고, 서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지역까지 그 활동 범위를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센터가 지정학적 공동체라는 아시아 개념을 넘어 다양한 지역, 시기, 주제, 현상, 방법론에 대한 확장된 연구과 연대를 매개하는 주요 채널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