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Topic]Barbara Klemm

 1969 © Barbara Klemm  © Barbara Klemm

위 <제니스 조플린,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1969 © Barbara Klemm  아래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 베를린> © Barbara Klemm

Barbara Klemm.
Photographs 19682013

오늘날 포토저널리즘의 살아있는 전설인 바바라 클렘(Barbara Klemm, 1939-)의 작품세계를 되짚어보는 회고전이 마틴-그로피우스-바우(Martin-Gropius-Bau)미술관에서 열렸다.
<Barbara Klemm. Fotografien 1968~2013전>(2013.11.16~3.9)이 바로 그것.
300여 점의 작품이 출품된 이번 전시는 그녀가 특정 저널에 소속된 사진기자를 넘어 위대한 작가로 평가받는 이유를 말해준다.
《월간미술》은 바바라 클렘을 베를린에서 직접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굴곡진 세상, 그녀의 카메라에 포착되다

신원정  미술사

다곡진 독일 현대사의 격동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으로 유명한 바바라 클렘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 차이퉁(Frankfurter Allge- meine Zeitung)》(이하《 FAZ》’) 사진기자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포토저널리즘의 예술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받는다. 아날로그 미학과 흑백의 감성이 치열한 사실주의와 잘 버무려진 그의 작업을 기리는 전시가 베를린에서 열렸다.
마틴-그로피우스-바우 미술관에서 개최된 회고전은 제목에도 드러나 있듯 1968년부터 2013년까지 바바라 클렘의 사진작업을 집대성했다. 300여 점의 전시작에는 독일 보도사진의 아이콘이 된 유명 작품들은 물론 미공개 작업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개인적으로 찍은 예술가들과 풍경 사진들은 작가의 방대한 작업 스펙트럼을 증명한다. 포토저널리즘과 순수예술의 성공적인 접점에 자리하는 그의 사진이 가진 예술성과 매력을 확인하는 혹은 발견할 수 있었던 이번 전시는 특히 사진이 실린 신문지면을 함께 전시해 그림과 텍스트의 관계를 고찰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평생 자신을 사진기자로 생각해 온 작가가 은퇴 후 (타의로) 예술가의 위치로 포지셔닝되었다는 점에서 예술가의 호칭과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베를린에서 작가와 만나 인터뷰했다.

. 시작은 우연에 가까웠다. 그곳의 인쇄용판 제작부서에서 일하다가 정식 사진기자로 자리 잡게 된 거다. 거기서 오래 근무한 건 사진기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사측의 태도와 특히 훌륭한 동료이자 멘토였던 볼프강 하우트와 함께 일할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부모님께서《      FAZ》를 구독하셔서 어릴 적부터 그 신문을 접해왔고, 기사보다는 사진에 훨씬 흥미가 가면서 나도 나중에 이런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서서히 갖게 되었다. 사진으로 진로를 정하고 인물사진 전문 사진관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사진에 대한 갈증은 더 심해졌다.
가까이에서 본 당신은 ‘보수’와는 거리가 먼 사람처럼 느껴지는데 《FAZ》의 보수적인 성향과 논조가 거슬린 적은 없었나. 당연히 거슬렸지!(웃음). 하지만 나는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내 사진의 인쇄를 허용했다는 점에서 그 정도의 진보성은 가진 신문이었다고 본다. 글로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 없을 때도 있는데 그럴 때 사진의 역할은 정말 크다. 독자들은 사진을 먼저 보기도 하고 기사를 먼저 읽기도 한다. 간혹 기사 내용과 사진 사이에 간극이 생길 수도 있지만 해석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이다.
자신의 사진과 기사 사이의 괴리를 실제로 느낀 적이 있나. 내가 찍은 사진이 특정한 메시지를 가진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어떤 사건 현장을 보고 셔터를 누를 때면 항상 나의 개인적인 인상을 최대한 생생하게 담으려 노력했기 때문에 그렇게 탄생한 결과물이 주관적인 건 당연하다. 하지만 매번 소위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자부한다. 때로 신문에 실린 사진과 그 옆에 자리한 기사 내용이 어울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전적으로 독자의 자유이다.
플래시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아마 평생 두세 차례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 기억나는 건 솔리다르노시치(자유노조, 역자 주)와 정부 간 원탁회의 취재차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다. 입국했을 때 문득 폴란드의 하늘이 우중충해서 일광만으로 찍기엔 무리라는 생각이 들더라. 공항에서 서둘러 플래시를 구입했는데 정말 유용했다.
플래시 사용을 꺼리는 건 미적인 이유에선가. 아무래도 그렇다. 플래시를 터뜨린 사진 특유의 차가운 분위기를 싫어한다.
등장 인물들이 자신이 찍히는 걸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듯 보이는 사진이 많다. 기자로서 존재감을 조절하는 특별한 비법이 있었는가. 아무도 나를 못 보는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를 종종 듣곤 했다. 물론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커다란 카메라를 눈앞에 대고 있는 사람을 어찌 못 볼 수 있겠는가. 그런데 공간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주목받는 정도의 차이가 발생한다. 자신의 존재가 잊힐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내 존재에 익숙해져 더 이상 내게 관심을 두지 않는 순간이 오면 비로소 그때 셔터를 눌렀다.
당신의 사진에서는 냉정하고 엄격한 시선과 어떤 요소도 빠짐없이 다 통제하려는 의지가 읽힌다. 그래서 참 독일적이라고 느꼈는데 이에 동의하는가. 정말 흥미로운 질문이다. 그런 걸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내가 주로 고민했던 부분은, 아무래도 정치가 오랜 기간 내 작업의 중심을 이루다보니 내 사진이 외국에서도 수용될 수 있을지 여부였다. 프랑스나 영국 혹은 이탈리아인들이 전시장에서 내 사진을 보았을 때 과연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을까, 흥미를 가지게 될까 하는 것.
그럼 독일적인 작가라고 불려도 괜찮다는 건가. 그렇다. 어차피 나는 독일인이니까. 아마 내가 2차 대전을 직접 겪은 구세대에 속해서 내 작업이 더 그런 느낌을 주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줄곧 전쟁이 초래한 결과와 특히 독일이 저지른 잘못을 성찰해왔다. 항상 날카로운 시선을 유지하고 역사가 남긴 교훈을 절대 잊지 않으며 무엇보다 다시는 같은 실수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진기자도 예술성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
사진을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녔는데 혹시 한국에도 와본 적이 있는가. 어쩌다 보니 이번 전시에는 빠졌지만 한국 사진도 있다. 좀 오래되기는 했지만. 서울올림픽이 개최되기 1년 전쯤 현지의 인상을 전하고자 2주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해서 부산까지 갔었다. 거대한 불상에 압도당했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전시 얘기를 해보자. 1968년을 시작 시점으로 잡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1967~1968년 즈음에 학생운동이 발발했다. 당시 나는 인쇄 부서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이에 자극받아 사진기자의 길을 걷는 걸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2010년 카를스루헤 시립미술관에서 큰 규모의 회고전이 열렸다. 그와 비교했을 때 베를린 전시는 어떤 점이 다른가. 가장 큰 특징은 처음으로 내 사진이 실린 신문 지면을 전시했다는 것이다. 그 외 일부 작품들은 베를린에서 완전히 다르게 배치되었다. 칼스루에의 전시장소가 다소 외곽지역이었던 반면 마틴 그로피우스 전시관은 베를린의 중심부에 위치해서 만족스러웠고 더 여유 있고 흥미로운 공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다.
사진과 실제로 그 사진이 실린 신문의 지면을 같이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그건 정말 중요했다. 신문을 함께 전시함으로써 내 사진들이 의뢰 작업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내가 단지 예술을 하는 즐거움을 위해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특정 신문을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는 점 말이다.
전시 준비에 어느 정도로 가담했나. 기획의 전 부분에 걸쳐 내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전시작 선정과 배치에서 내 의견이 절대적이었다. 한편 건축가로 수십 년간 이곳에서 근무해온 직원의 도움도 컸다. 그림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어서 우리는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었다. 현장에는 절대로 혼자서 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전시작 선정 기준은 무엇이었나. 회고전이었기에 가능하면 모든 종류의 작업을 다 조금씩 선보이고 싶었다. 그 결과 스포츠 분야만 제외하고는 – – 사실 간간이 운동 사진을 찍었음에도 불구하고 – -모든 주제를 전시했다. 유명한 작품들이 포함되는 건 당연하다. 한 번도 공개하지 않은 새로운 작업들도 선보이고 싶어서 소장 자료를 열심히 뒤졌는데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생각보다 많이 찾지 못했다.
지난 2010년 프랑크푸르트 시에서 수여하는 ‘막스 베크만상’을 수상했다. 회화, 조각, 그래픽, 건축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이에게 수여되는 이 상을 사진작가가 받은 건 당신이 처음이자 현재까지 유일무이하다. 정말 감동적이었다. 아직까지 실감이 안 난다.(웃음)
수상자로 선정된 이유 중 하나는 회화적 예술성과 미학을 사진 특유의 사실주의와 훌륭하게 접목시켰다는 것이었다. 사진기자에게 어 예술가적 자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가. 미적 의식을 바탕으로 탄생한 사진은 강한 힘을 가진다. 훌륭한 조형미와 구도를 갖춘 사진은 그에 담긴 내용과 관점을 훨씬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도 메시지를 더 빠르게 파악할 수 있고, 보는 즐거움이 있다. 그런데 디지털카메라가 널리 보급된 오늘날 심미적인 안목이 점점 더 쇠퇴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쉽게 결과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사진을 찍는 순간 구도가 좋은지 또는 예술적인지 주의를 기울이길 소홀히 하게 된다. 너무 많이 찍다보니 점점 덜 집중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완전히 다른 성향과 방식의 사진 찍는 법이 어느새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어쨌든 사진기자들도 예술성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첨단기술의 카메라가 보편화된 현재가 사진을 직업으로 삼는 이들에게는 경제적으로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지만 매체의 민주화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부분도 있는 것 같다. 그런 시각도 가능하겠지. 그렇지만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이들에게 현재의 상황은 재앙에 가깝다. 우리 사회를 위해서도 이런 현상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현대의 인간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카메라에 담으려 한다. 심지어 사진이 남지 않으면 현장을 직접 경험한 게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간에 눈은 항상 카메라나 휴대전화에 고정되어 있다.
남성의 비율이 압도적인 분야에서 성공한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젊은 시절의 나는 매우 수줍음이 많고 소극적이었다. 다른 이들은 그런 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그건 사실 아주 환상적이었다. 주목과 견제를 받지 않아 내 할 일을 맘껏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다가 내가 알려지고 나를 경계하는 이가 많아지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사실 어느 정도의 싸움은 각오해야 한다.
뻔뻔하고 다소 무례한 태도도 거기 포함되는가. 난 그렇게 막돼먹지는 않았다. 최대한으로 꼽아도 한 서너 번 정도?(웃음).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행동하는 게 중요하다.
사진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당신의 사진들이 사람들의 눈과 시각을 조금이나마 바꾸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 자부심을 가지는가. 물론. 이번 전시에서 많은 젊은이가 내 사진을 정말 자세히 들여다보는 모습을 보고 진심으로 기뻤다. 전시를 본 관람객들이 다른 나라의 빈곤 상황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기를 희망한다. 거창하고 성대한 작업이 아닌, 내 사진처럼 작고 소박한 작품도 사람들의 의식을 자극하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는 걸 확인해서 기쁘다.  ●

 1993 © Barbara Klemm

<모스크바, 러시아> 1993 © Barbara Klemm

mgb13_p_klemm_21_portrait바바라 클렘은 1939년 독일 뮌스터에서 태어났다. 사진기사 견습 직후(1955~1958)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 차이퉁》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이후 정치·문화부 사진기자로 활동했다(1970~2004). 1992년 베를린 예술아카데미 회원으로 추대되었고 2000년 다름슈타트 전문대학 사진학과 명예교수로 초빙 받았으며 2011년에는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받았다. 독일 사진협회에서 수여하는 ‘에리히 잘로몬 박사상’(1989), ‘헤센문화상’(2000), ‘베스트팔렌 미술상’(2000), ‘막스 베크만상’(2010), ‘라이카 명예의 전당상’(2012) 등 다수의 수상 경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