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FORUM 간판, 도시의 일상으로 들어오다

2008 Hypermarket 4

위 < The Advertisement > 단채널 비디오(1분30초) 사운드 2004 아래 < Hypermarket 4 > 단채널 비디오(6분20초) 2008

간판이 한국 도시의 속도성과 경관의 밀도를 반영한다는 필자의 두 번째 원고는 박준범의 영상작업을 매개체로 삼아 풀어냈다.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손을 도시의 형성과 변화에 일방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종의 리바이어던(Leviathan)으로 해석하는 바, 종교성과 신화적 의미의 집합체로서 도시의 소외 문제를 야기하는 상징과도 같다. 그래서 권력은 ‘어떻게’ 수행되는지에 대한 색다른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백승한 미술·건축비평

미니어처 모형과 거대한 손의 등장이 특징적인 작가 박준범의 2004년 작업 <The Advertise-ment>는 한국의 간판 현상과 도시 일상의 다층적 관계성을 생각하게끔 해 준다.1 <The Advertisement>는 2분 남짓 길이의 짧은 실험적 비디오작업이다. 본 비디오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것은 배경으로서의 가로 경관 이미지와, 그 위에서 퍼포먼스를 시작하는 (작가 자신의 것으로 추정되는) 양손이다. 비디오의 배경은 서울이나 한국의 여느 도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종류의 것으로서, 고층 아파트, 상업건물, 간판, 현수막, 종이포스터, 공사 가림막, 가로수, 도시 교회 첨탑, 도로변의 이동하는 자동차 등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일상적이고 진부하기마저 한 이러한 가로 경관은 거대한 손의 개입으로 인해, 일종의 비일상적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직사각형의 프레임 바깥에서 불현듯 등장하는 양손은, 그것이 연결된 신체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으며 미리 고안된 계획에 따르는 듯 퍼포먼스를 시작한다. 배경의 왼편에 위치한 일련의 상업건물들과 표면에 부착된 무수히 많은 광고들은 한국 도시의 속도성과 경관의 밀도를 반영한다. 한편 오른편 코너에 위치한 건물은 갓 시공이 끝난 것으로서, 아직 광고물의 침입을 받지 않은 비교적 ‘순수한’ 상태에 놓여 있다. 프레임 바깥에서 진입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거대하고, 움직이는, 확대된 신체 일부로서의 손은, 한국의 도시적 상황 속에서 상업건물 입면의 순수성이 지속 불가능함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그 거대한 손의 개입에 따라, 장식이 더해지지 않은 매끈한 건물 입면은 결국 주변에 위치한 여느 건물들과 다르지 않게 수많은 광고물로 빼곡히 뒤덮이고 만다. 그리고 본 작업은 명확한 퍼포먼스의 완결보다는 페이드-아웃 기법을 통해 느슨한 형태로 마무리되는데, 이는 관람하는 이로 하여금 일련의 광고물 부착 과정이 일회적이기보다는 보다 광범위하고 지속 가능한 것임을 생각하게끔 한다. 한 비평가가 박준범의 작업을 “비디오 형식주의”라고 부른 것처럼, 매체로서 비디오와 장르로서 퍼포먼스의 결합이라는 형식은 분명 그의 작업을 특징짓는 부분이다. 다른 한편, 박준범의 작업이 생성하는 것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힘들?흩뜨러진 소규모의 상업 행위와 또 다른 종류의 균질한 (듯 보이는) 힘의 외부로부터의 개입?이 충돌하는 혼종적인 도시영역이다. 전지전능한?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힘의 일상 도시공간으로의 침투와 지배와 같은 도식으로서 종종 이해되곤 하는 본 작업은, 사실 그 의미 해석에 모호함이 존재한다. 본 작업에 등장하는 분할된 신체로서의 거대한 손은 무엇인가? 배경으로서의 미니어처 도시경관은 단순히 양손이 수행하는 퍼포먼스의 배경일 뿐인가? 혹은 퍼포먼스와 배경으로서의 도시경관이 서로 얽히고설켜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도시적 특이성이 본 비디오에서 펼쳐진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있을까?
본고는 비디오 스크린 속의 확대된 신체를 절대적 능력을 지니는 ‘미다스의 손’이나 일상생활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구조’의 시각적 반영이기보다는, 주어진 세계와 조우하며 그럼으로써 예정되지 않은 힘과 긴장감, 그리고 도시적 분위기와 리듬을 생성하는 접점으로 바라본다. 비디오의 시작과 함께 퍼포먼스를 수행하는 양손은,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일상 도시조직을 시각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압도한다. 재빠르게 이동하는 손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전지전능한 힘(the heavenly action on earth)인 양 미리 준비한 계획에 따라 도시조직 형성과 변화에 일방향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듯하다. 겉으로 보기에 힘의 위계는 명확하게 설정된다. 그러한 위계에 따른 공간 변화는 도시화의 과정에서 비소통적이고 비민주적 힘의 개입, 그리고 그에 따른 도시소외의 문제를 생각하게끔 촉발한다. 본 작업의 거대한 손은 한편으로는 토머스 홉스가 말하는 절대권력의 상징 리바이어던에 비유될 수 있다. 구약에 등장하는 바다괴물인 리바이어던은 홉스에 의해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군주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사람 모양을 하고 머리에 화려한 관을 쓰고 있는 리바이어던의 몸통과 양팔의 표면은 300여 명의 개인으로 구성된다. 홉스의 1651년 저서 《리바이어던》의 표지에 등장하는 이 바다괴물은 한 손에는 종교의식을 위한 주교장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세속적 권력을 상징하는 칼을 쥐고 있다.2 리바이어던의 상반신은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의 아래로부터 등장하며, 그 앞에는 중세의 성곽도시와 드문드문 주택과 교회들이 위치한다. 성곽도시의 내부는 비슷한 형태의 저층 건물들로 구성되며, 그 중심에는 고딕 양식 성당을 연상시키는 높은 첨탑의 구조물이 자리 잡고 있다. 한편 리바이어던의 신체에 포함되어 있는 개인들은 머리를 뒤로한 채 리바이어던의 얼굴을 있으며, 그 리바이어던의 눈은 다시 정면을 향해 응시한다. 미술사학자 호스트 브레드캠프가 말하는 것처럼, 리바이어던의 표지 이미지는 국가가 필요에 따라 일상생활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중단시키고,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그럼으로써 명확한 힘의 위계를 재설정할 수 있다는, 간단히 말하자면 국가와 개인 간의 힘의 관계와 주권의 문제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3
본 이미지가 제시하는 것은, 평화롭고 안정화된 일상생활 영역은 항시 (전쟁이나 기근 등의) 사회적 불안정에 따라 국가권력의 개입을 허용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리바이어던에서 드러나는 개인과 국가의 관계성은 중세 성곽 도시에 대한 성찰에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정치학자 마이클 하르트와 안토니오 네그리가 지적하는 것처럼, 현대도시는 더욱 복잡해진 정치경제와 소비문화의 구조에 의해 작동함에 따라 예측 불가능성과 우발성을 포괄하며, 이는 리바이어던의 현대적 의미 해석에 신중히 접근해야 함을 함축한다.4 다시 말해서 박준범의 작업에 등장하는 거대한 손은, 리바이어던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것처럼 무수히 많은 개인을 일방적으로 그리고 갈등의 과정 없이 손쉽게 포괄할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러한 질문은 이분법적이고 도식적인 권력구조와 권력관계의 논의에 의해 손쉽게 비켜 날 수도 있겠지마는, 조금 거칠게 표현하자면 도시영역에서의 주체성과 힘의 문제라는 쉽게 단정지을 수 없는 주제 또한 복합적으로 생각하게끔 한다.
다른 한편 <The Advertisement>에서 수행되는 미니어처 광고물의 부착은 간판의 난립과 그에 따른 타락한 도시미관이라는, 근현대 한국 도시경관에서 미적 판단이라는 풀리지 않은 논쟁을 상기시킨다. 유동하는 비디오 화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거대한 손과 그에 대비되는 미니어처 가로경관은 이러한 견지에서 개념적이고 구조적으로 파악된다. 그렇게 파악된 박준범의 작업은 일종의 경화된 이미지 혹은 일상생활의 생생함과 깊이가 사라진 평평해진 스펙터클로 받아들여지며, 그러한 이미지화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시비평을 위한 손쉬운 출발점 기능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본 작업이 사진이나 회화가 아닌 비디오라는 매체에 기반을 두며, 의미 생성 또한 그러한 매체성에서부터 비롯한다는 사실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다시 말하자면 본 작업의 특징적인 부분은 시각적 대조와 충격으로 비롯하는 형태나 구조뿐만 아니라, 그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미시적으로 작동하고 관계 맺는 섬세한 방식들이다 (마치 작가 최정화가 플라스틱 사물로서의 “바구니 자체”보다 단위 개체로서의 바구니와 그것들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섬세하고 미묘한 “틈과 결”의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말이다).
본 작업이 적어도 2배속 이상의 빨리감기에 의해 상영되며, 화면 속 거대한 손의 허둥지둥대는 듯한 움직임이 자아내는 유머스러움, 확대된 손이 위에서부터 아래로가 아닌 ‘옆’에서 등장한다는 사실, 반복되는 듯한 미니어처 광고물 부착이 완벽한 반복이 아닌 차이를 수반하는 점들은, 정지된 장면의 시각분석으로는 파악되기 힘든 일상생활의 진동성과 역동성을 굴절적으로 반영한다.
박준범의 비디오작업이 촉발하는 도시공간의 권력과 일상생활이라는 문제는 따라서 손의 개입으로 대변되는 힘의 행사에 의한 결과로서의 도시 스펙터클보다는, 그러한 힘의 행사가 어떻게 미시적으로 작동하고 새로운 관계성을 생성하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질 필요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질 들뢰즈의 권력에 대한 언급은 흥미롭다. 미셸 푸코의 작업을 분석하면서 권력의 문제를 논의하는 들뢰즈는, “권력이 어디에서 생성되는가”보다는 “권력이 어떻게 행사되는가”라는 질문에 주목한다.5

2011 to let

< To let > 단채널 비디오(8분20초) 2011

도시경험 층위의 생성과 소멸
절대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중세사회의 군주나 현대사회에서 거대기업의 권력 행사에 따른 힘의 원천을 찾는 것은, 사회와 개인의 관계와 구조를 탐구할 때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분석적 태도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그보다는 권력이 ‘어떻게’ 구체적인 일상생활의 상황들 속에서 흩뜨러지고, 확장하고, 교차하고, 진화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인다. 단일하고 조직적이며, 위압적이고 강력한 절대권력의 상징으로서 ‘미다스의 손’이나 홉스의 리바이어던 이미지는 일종의 신화이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전근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무수한 개인은 절대권력을 소유하는 국가에 완벽하게 규율되고 작동할 수 있음을 생각하게끔 한다. 하지만 그러한 이미지가 미처 담아내지 못하는 부분은, 그러한 절대권력이 ‘어떻게’ 수행되는가에 대한 것이다. 개인은 국가권력에 온전히 예속되는가? 그럼으로써 일상생활세계에서 개인의 힘이란 극히 미미하여 구조에 균열을 발생시키는 등의 유의미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가?
박준범의 작업이 적어도 2배속 이상의 빨리감기를 통해 상영된다는 사실은, 들뢰즈가 주목하는 일상생활에서의 힘의 관계성과 그러한 힘이 실천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 비디오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양손은 빨리감기를 통해 나타난다. 그것은 마치 시간에 쫓기는 것처럼 미리 제작된 미니어처 간판 이미지들을 화면의 오른쪽 코너에 부착하기 시작한다. 화면 속에 끊임없이 움직이는 손은 마치 광고물 부착의 순서를 계획하고 예상되는 입면의 시지각적 결과를 예측하듯 재빨리 움직인다. 한편으로는 비디오 화면 속의 양손은 명확하게 설정된 계획에 의해 퍼포먼스를 수행한다. 미니어처 간판들은 미리 정교하게 제작되어 있고, 퍼포먼스의 대상 건물의 크기와 위치에 부합하도록 짜여 있다. 그럼으로써 펼쳐지는 비디오 속의 이야기는 고안된 규칙과 그것의 부지런한 이행의 결과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움직이는 손은 실수를 일으키고, 때로는 머뭇거리며, 이미 부착한 미니어처 간판을 재배열하는 등의 완벽하지 않은, 다소 인간적인 순간들을 드러낸다. 또한 그러한 머뭇거림은 빨리감기를 통해 극적으로 나타나며, 규칙-따름이라는 개념적 틀에 완벽히 부합하지 않는 변화와 굴절의 순간들을 드러낸다. 갓 지어진 상업건물의 백색 표면은 금세 현란한 광고물들로 뒤덮이고, 광고물의 텍스트들은 부각되거나 위장하고, 그리고 흩뜨러지고 교차함으로써 도시공간의 역동성과 분주함을 반영한다. 위에서가 아닌 화면의 옆 혹은 아래에서 등장하는 양손은 여전히 화면 속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주체이다. 하지만 본 작업의 이야기 전개에 그러한 신체만큼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은 도시의 상업 일상을 상징하는 미니어처 간판들이다. 힘의 영향 ‘아래’에 위치하는 듯한 미니어처 간판들은 중첩과 집합에 의해 새로운 힘의 영역들을 발생시키고, 마치 거대한 양손의 퍼포먼스와 대등한 입지에서 도시 분위기를 형성하는 듯한 느낌마저 자아낸다. 다시 말하자면, 도시 조직에 관여하는 전지전능해 보이는 거대한 손은 사실 그 관여하는 대상을 완벽하게 통제하기보다는 결국은 그 대상과 얽히고설키는 마는 것이다.
규칙-따름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언급은 이러한 맥락에서 교훈적이다: “우리가 규칙을 따를 때, (그러한 따름의 결과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만의 규칙 속에서 얽혀버리고 말게 된다. 그러한 규칙 속의 얽힘이 바로 우리가 이해하고 싶은 부분이다.”6 들뢰즈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권력관계는) 매 순간 힘의 영역에서 한 지점에서 또 다른 지점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는 한 힘이 방향을 바꾸거나 (다른 힘의) 발자취를 따라감에 따라 굴절과 저항, 비틀림과 우회(의 순간들)을 발생시킨다.”7 물론 본 작업의 처음에 나타나는 백색의 건물 입면은 애초에 옆에 위치한 간판으로 뒤덮인 건물들처럼 될 운명에 놓인다. 하지만 광고물 부착 전-후의 단순화된 도식으로는 감지될 수 없는 변화의 과정을 본 작업이 선보인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과정이 시사하는 힘의 다수성과 불안정성은 보는 이로 하여금 리바이어던이 그려내는 위계적 힘의 도식을 뛰어넘기를 촉발한다. 완벽하게 드러나지 않고 개념적으로 충분히 정의되지 않은 신체의 일부로서의 손, 그것이 선보이는 비디오 퍼포먼스, 그리고 그로 인해 펼쳐지는 역동적인 거리경관의 모습은 2차원적으로 재현된 도시 스펙터클 이상의 무엇이다. 되려 본 작업이 펼쳐내는 것은 실천 수법으로서의 비디오 퍼포먼스와 미니어처 거리경관 사이에서 생성하는 진동하는 도시 분위기, 지역적이고 세계적인 힘의 관계성, 그리고 일상생활의 규칙과 따름의 미세하고 미묘한 얽힘의 순간들이다.
예술작품으로서의 <The Advertisement>와 그것이 참조하는 실제 도시상황 사이에는 불가피하게 이해의 간극이 발생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본고는 그러한 간극을 인정함과 동시에 도시적 일상의 다층적 의미를 탐구함에 있어 박준범의 작업이 하나의 흥미로운 접점이 될 수 있음을 제시한다. 본 작업을 구성하는 장치들과 퍼포먼스의 구체적인 순간들은 어떻게 보면 개인적인 사유의 결과물이며, 도시라는 복합체를 생각할 때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되려 본고는 도시를 완벽하고 이상적으로 조망하는 것은 과연 가능한가 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사실 도시에 대한 이해는 많은 경우 개인적인 인지와 경험의 순간들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가? 도시라는 단어, 그리고 그것이 매개하는 무수한 역사와 담론의 층위를 생각함에 있어 한두 가지의 올바른 방법은 없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맨해튼의 쌍둥이 빌딩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스펙터클한 풍경은 도시에 접근하는 한 가지의 방법일 것이다. 다른 한편 느린 걸음으로 걷거나 자동차를 통해 이동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생생한 거리풍경은 그 역시 또 다른 도시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가지의 상반된 듯한 도시 경험의 방식 사이에는 예정되지 않은 도시 경험의 층위들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한다. <The Advertisement>가 도시 경험의 이해를 ‘위한’ 작업은 아닐 수 있지만, 동시에 도시 경험의 다층성을 생각하도록 촉발하는 계기일 수는 있다. 그러한 계기가 비록 간판이라는, 도시적 일상을 생각함에 있어서 이제는 (적어도 한국의 도시담론에서) 다소 고루한 측면으로부터 시작할지라도, 그리고 한 예술가의 개인적인 동기로부터 출발할지라도 말이다.●

1 작가 홈페이지: http://junebumpark.com.
2 Carl Schmitt 《The Leviathan in the State Theory of Thomas Hobbes: Meaning and Failure of a Political Symbol》 translated by George Schwab and Erna Hilfstein, Connecticut: Greenwood Press 1996, 18p
3 Horst Bredekamp <From Walter Benjamin to Carl Schmitt, via Thomas Hobbes> translated by Melissa Thorson Hause and Jackson Bond 《Critical Inquiry》(25(2) Winter 1999, 255p
4 Michael Hardt and Antonio Negri 《Empire》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1, 86p
5 Gilles Deleuze 《Foucault》 translated by Sean Hand,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88, 71p
6 Ludwig Wittgenstein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translated by G. E. M. Anscombe, Malden: Blackwell Publishing 2001 125p(필자 번역)
7 Deleuze 《Foucault》 73p(필자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