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 자연 대 자연 송창&유근영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2014.10.17~2014.12.14

송창과 유근영의 <자연 대 자연>은 철학자들이(혹은 인류가) 자연을 인식하고 사유해 온 두 개의 신화적 사건을 배치한 것으로 읽힌다. 신화의 탄생지에서 신의 실체는 대체로 무수한 대자연의 사건과 인간의 사건들 사이에서 빛을 발한다. 엄청난 스펙터클의 자연적 사건들은(축복보다는 재앙의 경우가 더 많다) 나약한 인간으로부터 신의 절대성을 상승시키고, 반면 전쟁과 사냥에서 벌어진 인간적 사건들은 영웅을 탄생시켰다. 신의 절대성과 영웅이 혼합되고 묶이면서 ‘신화(神話)’라는 초현실적 서사는 민족지학의 방대한 뿌리가 되었다. 뿌리가 되면서 스펙터클의 자연적 사건들과 인간적 사건들은 둘로 구분할 수 없는 상태로 뒤섞였고, 자연이라는 ‘존재’가 인간의 사건을 초래하거나 인간이 스스로 자연의 사건을 생각하며 자연과 인간의 신화를 엮어내기도 했다. 아마도 바로 그즈음에서 인류는 ‘퓌지스(Physis)’라는 철학적 대상으로서 자연을 갖게 되었는지 모른다. 자연으로부터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사유’를 묻게 된 것이다. 자연철학은 그렇게 탄생했다.
송창이 그리는 자연은 무수한 인간의 역사적 서사를 함축하는 자연이다. 그의 자연은 오래전부터 우리 눈앞에 스스럼없이 현존해 온 본래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심지어 생래적이고 본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그의 화면에서는 미학적 의문을 제기한다. 저렇듯 아름답고 생기에 찬 자연이야말로 ‘스스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그리고 더 은유적으로는 저렇듯 아름다운 자연은 자연이 아니라 어떤 것들의 어두운 그림자일 수 있다는. 그렇다면 그 의문의 실체는 무엇일까? 우리는 우선 그가 그리는 풍경의 대상지가 한반도의 허리를 자르고 있는 비무장지대 접경지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소나무 숲이고 들녘이며 하늘이 아니라 한 국가의 분단을 ‘실체적으로’ 인식시키는 장소들에서 맞닥뜨리는 숲이고 들녘이며 하늘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그의 숲들은 해방 이후 그어진 38선과 6・25전쟁이라는 냉전의 제노사이드가 남긴 유령들일 수 있다. 그러니까 그는 한반도의 냉전 사건으로부터 자연과 인간의 존재사유를 묻는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1982년에 창립한 ‘임술년’ 멤버로 참여하면서 탄생시킨 자연은 단 한 번도 그러한 냉전신화의 자연으로부터 한 발짝 비켜선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냉전신화의 상징이라는 역사성을 더 구체화하는 쪽으로 작업의 방향을 옮겨왔다. 다시 말해 그가 최근에 그리는 자연들은 접경지의 풍경이라는 구체성을 더 좁혀서 실제적 사건들의 장소들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연철학이 궁극적으로 밝히고자 하는 존재론의 문제를 푸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유근영의 자연은 무엇일까? 그의 자연은 송창이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쪽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연철학자들이 사유했던 것처럼 자연을 자연으로서 본다. 이때 ‘자연으로서’라는 표현은 그가 ‘인간으로서’ 자연을 보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자연의 내부에서, 자연의 바깥에서 그는 한 존재자의 시각으로 자연을 톺아보는 순수의지를 발현시킨다. 즉 그가 마주하는 자연은 스펙터클한 자연적 사건은 아니지만, 자연이 스스로 현존하는 것에 대한 사건을 보여줌으로써 자연이 가진 미학적 숨결들을 화면에 배치하고자 한다. 그런데 유근영의 작품들이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은 작품 속 자연이 구체적인 현실 속 자연의 안팎이 아니라 유근영이라는 한 작가의 내면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자연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평생 자신의 내부에 회화적 자연이라는 정원을 가꾸어왔다. 물론 그것들은 우리 눈앞에 현존해 온 자연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 앞에 섰을 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이질성이 아니라 이국적인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유근영의 내부에서 화면으로 옮겨 온 그것들은 분명히 어딘가에 현존하는 자연으로 읽히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미학적 실체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자연 신화는 실재계가 아니라 상상계와 상징계를 혼합한 신화라는 것을. 송창이 실재계와 상상계를 혼합해서 상징계라는 미학적 화면을 구성했다면, 유근영은 상상계와 상징계를 혼합해서 오직 그만의 실재계를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실재계는 어쩌면 인류가 시나브로 상실했거나 파괴해 온 퓌지스의 존재사유일지 모른다.
자연철학자 김진에 따르면 퓌지스는 물질적인 존재들을 존재하게 하는 존재의 근거와 원인들에 관여하기도 한다. 자연은 우리의 존재사유를 밝히는 가장 근원적인 철학적 명제이지 않은가! 송창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인간 존재를 묻는 자연을 그리고 있다면, 유근영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자연 존재를 묻는 심연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 둘 모두 서로 다르면서 동일하게 이어지는 지점은 자연철학이 던지는 존재사유의 질문이다.
김종길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