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EFING

제품설명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이 말이 딱 와 닿는 요즘입니다.” 우리 책 교열을 봐주시는 선생님이 내가 보내드린 마지막 교열 원고 말미에 덧붙여 주신 글귀다. 그렇다. 엄동설한 동짓달 매서운 추위보다 이 무렵 꽃샘추위가 오히려 더 춥게 느껴지는 법, 특히나 올 봄은 이래저래 어느 해 봄보다 물심양면 더 추울 것만 같다. 가뜩이나 미술판에 재미있는 일이 통 없는 요즘, 시국마저 이 지경이니 마땅한 기삿거리 찾기가 녹록치 않다. 매달 초, 우리 기자들은 머리를 쥐어 짜낸다. 이런 와중에 이번달은 내가 자진해서 총대를 맸다. 기자들이 제안했던 기획안은 숙성시켜 다음 달 이후에 소개할 예정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얼마 전 술자리에서도 엉뚱한 주제로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다름 아닌 〈제품설명서〉와 〈사용설명서〉의 차이에 대한 것이었다. 얼핏 보면 그게 그거 같지만 작정하고 따져보면 둘 사이엔 적잖은 차이가 있다. 아무튼 그 자리에선 〈사용설명서〉가 〈제품설명서〉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이라는 데 의견일치 했다. 제품의 제원(諸元)에 대한 단순정보가 담겨있는 〈제품설명서〉와 달리 〈사용설명서〉는 제품에 대한 객관적 소개를 넘어 그 것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 또는 효용가치를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안내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품설명서〉를 〈사용설명서〉로 승화해서 활용하는 것은 사용자의 의지와 역량에 달렸다는데 공감했다. 이런 배경에서 이번 특집에 대한 〈제품설명서〉(절대로 〈사용설명서〉가 아니다)를 필자별로 구분해 아래와 같이 정리해봤다.

김권정 _ 태극기 역사에 대한 일반론적인 개론. 이번 기회를 계기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관람을 적극 추천 권장함.
목수현 _ 구체적인 문헌과 사료에 근거해 태극기의 역사를 서술. 한국 근대미술 전공자인 필자는 논문 〈일제강점기 국가 상징 시각물의 위상 변천〉 등을 발표했고, “미술을 단지 특정 영역의 것으로 한정하지 않고 시대의 정치와 문화를 통해 조망”한 성과를 높이 평가받아 2014년 김복진미술상을 수상했음.
노형석 _ 자칫 누락될 뻔 했던 해방공간 시기 태극기의 위상을 거론하면서, 태극기가 특정 세력의 독점물이 아님을 확인시킴. 이한열 영정을 그린 최민화 작가의 후암동 자택 모임자리에서 특집기획 얘기를 듣고 적극 참여의사를 밝히고 글과 자료를 보내왔음.
이경민 _ 10년 전 기획된 전시 서문임에도 불구하고 태극기를 둘러싼 표상의 정치학에 대한 논의가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시킴. 게재된 모든 사진은 정식 절차를 거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사용했음.
이경란 _ 6월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아 동분서주 바쁜 와중에도 “태극기 잘못이 아니야”라는 제목의 짧지만 깊은 울림의 글을 보내줌. 새로운 공동체 속에서 누가 상징에 의미를 부여하는지 누가 상징을 소비하는지 가려내자고 주장함.
노순택 _ ‘역시 노순택이야!’ 소리가 절로 나옴. ‘이미지 전쟁’이란 타이틀을 내세운 이번 특집의 의도와 내용을 이보다 더 시각적으로 명료하게 전달할 수 있는 작가는 없을 듯함. 2007년 3월 특집 ‘386세대 미술인의 지금 여기‘를 비롯해 2016년 12월 동상 특집에도 결정적 사진자료를 제공했음.
최 범 _ 태극기는 공화국의 국기로서 근본적인 한계를 지닌 기호라고 지적함. 도상과 신화로서의 태극기를 도상학/계보학/ 역사학 관점에서 분석하고, ‘태극기=대한민국’이라는 기호(기표와 기의의 조합)를 공유하면서도 이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데 이견을 제시함. 그러면서 태극기 신화에서 벗어나자는 다소 과격한(?) 주장을 펼침.

눈물 없이 볼 수 없다. 작은 글씨를 읽을 때 말이다. 그래서 자주 인공눈물을 주입한다. 그러면 잠시라도 눈앞이 맑아진다. 누진다초점 렌즈를 장착한지도 이미 오래. 큰 효과는 없다. 안경을 벗은 채 코를 박고 보는 게 차라리 편하다. 종합감기약 같은 약(藥)을 사면 들어있는 ‘사용상 주의사항’ 설명서나 보험약관 같은 글씨는 왜 그리도 작은지 불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 이유를 알게 됐다.

편집장 이준희 dam2@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