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오래된 것이 좋다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드는 요즘이다. 지금처럼 계절이 바뀔 무렵 풍경을 표현할 때 아주 적절한 수식어가 있다. 평소에 자주 쓰지는 않지만 조금씩, 틈틈이, 점차, 천천히, 차츰차츰 같은 뜻을 지닌 ‘시나브로’가 그것이다. ‘시–나–브–로’라고 발음할 때 오물거리게 되는 입술 모양새도 예쁘고 듣기에도 참 달콤하다. 받침 없는 글씨 또한 정감이 간다. 계절 뿐 아니다. 가끔씩 집에 있는 화분을 들여다보면 새로운 가지가 돋아나고 거기에 매달린 이파리가 미세하게 넓어진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고양이에게 시달리면서도) 요란하게 티내지도 않고 묵묵히 꿋꿋하게 시나브로 저 혼자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약하게만 보이는 식물의 생명력이야말로  웬만한 동물을 능가한다.
이렇게 ‘시나브로’는 무엇보다 ‘자연’의 법칙과 섭리를 설명해주는 적절한 말이다. 새삼스레  동아출판사에서 나온《   새국어사전》에서 ‘자연’의 뜻을 찾아봤다. “①사람의 손에 의하지 않고서 존재하는 것이나 일어나는 현상(산·강·바다·동물·식물·비·바람·구름 따위) ②사람이나 물질의 본디의 성질. 본성(本性) ③철학에서, 인식의 대상이 되는 외계(外界)의 모든 현상을 이르는 말”이라고 적혀 있더라. 나는 이런 자연을 동경하고 좋아한다. (다른 의미일지는 몰라도) 삶에 있어서도 자연스러움을 추구하고 자연스러워지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막상 세상을 살다보면 맘처럼 그렇지 못하다. 자연스럽기는커녕 부(不)-자연스런 경우가 훨씬 많다.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임에 틀림없지만 현실에서 인간은 자연을 거스르고 거역하며 파괴도 서슴지 않는다. 자연재해도 무섭지만 인간이 더 두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얼마 전, 인사동 밤거리에서 눈에 익은 건물 하나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1990년대 중후반 특히 동양화가들의 전시공간으로 각광 받았던 공평아트센터가 있던 건물이었다. 약간의 술기운도 있었지만, 불과 며칠 사이에 그 커다란 건물이 통째로 철거됐다는 사실이 새삼 충격적이었다. 서울에서 이런 상황이 비일비재 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지만 너무 쉽게 없어지고 너무 빨리 사라진다. 뭐든지 한곳에 진득하게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게 없다. 카페, 술집, 갤러리, 사람… 다 마찬가지다. 인사동에선 이제 관훈갤러리와 부산식당만 남아 있는 것 같다. 세상이나 사람이나 모두 자연처럼 시나브로 변해갈순 없는 것일까? 나는 오래된 것이 좋다.

편집장 이준희  dam2@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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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왼쪽 벽면 시계 없애주세요)김연수  소설가

소설가는 대개 부지런하지만 특히 성실한 작가로 알려진 그는 평소 문학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 장르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이번에는 안지미 이부록과 협업해 새로운 작업을 선보였다. 전시 오프닝에 맞추어 김연수는 모터사이클을 타고 갤러리를 방문해 깊은 첫인상을 남겼다. 디자이너 안지미와는 동갑내기로 1990년대 말《  출판저널》 기자였을 당시 안지미가 잡지 디자인을 맡으면서 알게 된 오랜 인연이라고. 대표적인 저서로 소설집《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등과 다수의 산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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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렬김옥렬  2014강정대구현대미술제 전시감독

적은 예산에도 불구하고 <2014강정대구현대미술제>를 알차게 이끌었다. 디아크 내부에 설치된 전시과정 소개 기록사진, 영상 속 작가와의 인터뷰 모두 발로 뛰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매사에 중립적인 편이지만 전시기획에서는 누구보다 열정적이다. 취재차 만난 그녀는 숨 쉴틈 없이 이번 전시기획에 대해 설명했고, 한국현대미술 현장의 이모저모에 대한 열변을 토했다. 그녀가 하는 미술이야기가 듣고 싶다면 전시를, 그리고 블로그를 방문해 보길 추천한다. 현재 아트스페이스펄과 현대미술연구소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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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홍구

강홍구  작가

사진작가이자 글 쓰는 작가.《  미술관 밖의 미술이야기1,2》 《  시시한 것들의 아름다움》외 꾸준한 저술활동을 해왔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언제 사라질지 모를 한국의 풍경을 렌즈에 담아 <녹색 연구>, <그집> 시리즈 등을 발표했고 수차례의 개인전을 열었다.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2014>의 ‘귀신, 간첩, 할머니’라는 주제어에 그가 먼저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고향인 신안군 섬마을의 추억을 담아 그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전시를 풀어낸 맛깔난 그의 글이 독자들과 교감될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