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후배 미술인들에게

후배 미술인들에게

한국의 현대미술 창작영역, 다른 말로 우리가 ‘미술계’라고 부르는 공간은 그것이 생겼을 당시(다시 말해 일제강점기)부터 지금까지 많은 왜곡과 결여를 드러내고 지녀왔으며 앞으로도 상당히 그럴 것처럼 보인다. 미술대학, 미술시장, 미술정책, 미술제도, 미술비평, 미술출판, 지역미술 등등 심지어 미술창작과 그에 대한 평가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문제점을 안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나는 이 문제점들이 가까운 시일 내에 전부 개선되거나 혁파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다만 현재의 지점에서, 이제까지 해 온 이야기들과는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최근에 한 가지 이슈가 거론되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전시에 참가하는 젊은 작가들의 ‘전시 지원비’에 대한 것이었다. 대안공간 루프 서진석 디렉터가 담당한 <제4회 공장미술제>(사진)에서 불거진 지원비 지급 여부에 대한 이슈는 처음에는 공장미술제라는 기획 자체에 대한 성토처럼 보였으나, 그 이후에 이어진 토론의 초점은 공장미술제를 넘어서는 범위의 것이다. 처음부터 ‘전시 지원비’ 정도가 문제 되었을 리 없다. 실은 기성세대, 나아가 사회 전체가 체계적으로 젊은 세대의 예술가들을 착취하고 이용하고 있다는 좀 더 광범위한 이슈가 제기된 것이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의 갈등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군대문화처럼 선배에서 후배로 이어져 온 몸에 밴 악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만 치부해버릴 수 있는가?
이번 논쟁은 마치 기업의 노사분쟁처럼 전개되었다. 회사 측 간부들이 노조 측 대표들과 노동조건 등에 대해 따져보는 것처럼 다뤄졌다. 다른 점이 있다면, 기성세대라고 토론에 나선 서진석, 김노암 등은 사용자라고 하기엔 턱없는 개인이고 젊은 세대를 대변한 이들 역시 연대를 자처할만한 뚜렷한 예술가 집단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서진석이나 김노암은 지난 15년여의 기간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 대안공간을 묵묵히 꾸려온 ‘자원봉사자’ 같은 인물들이다. 정부나 기업, 각 재단의 기금을 열심히 타서 자신들의 기획을 펼쳐온 것 외에 이들이 미술계의 해묵은 열악함의 원흉이 될 만한 이유는 없다. 이들의 활동이 비평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대체로 존중받을 만한 것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다른 독립 기획자들 역시 이들이 거쳐 온 경로를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영역은 아직 대안적 지점들에 머물러 있다.
<공장미술제>에 대해 말하자면 1999년 처음 시작할 당시에는 서울대, 홍대로 양분되어 있는 미술계에서 대학 간의 교류와 학벌을 탈피한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촉진한다는 것이 주된 이슈였다. 2012년에 이것이 다시 등장한 배경에는 젊은 세대 작가들의 과도한 상업화에 대응하여 실험적 작품들을 프로모션한다는 이슈가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대학 교수들로 구성된 운영위원회에서 큐레이터에게 실행을 위임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공장미술제>가 2회로 멈췄던 이유는 매우 많은 에너지를 소진하는 이 전시기획을 맡고자 하는, ‘총대를 멜’ 자원자가 없었고, 교수들 역시 너무나 피곤한 이 프로젝트에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프로젝트는 미술대학 교수연합인 ‘대학미술포럼’을 탄생시켰고 이후 ‘대학미술협의회’로 이어져 미술대학 간 연대의 기반이 되고 있다. 이번 논란 이후 공장미술제의 지속 여부가 시험대에 오를 테지만, 미술대학교육의 연장선상에서 공유 플랫폼으로서 어떤 방식이 좋을 지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리라 본다. 홍태림이나 안광휘 같은 젊은 미술인들이 촉발시킨 이번 논의가 전시 지원비나 부실한 전시기획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더 확대해서 미술에서 불합리하게 과대평가된 비합리적 가치들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들이 제기한 문제는 그물처럼 엮여있는 더 큰 문제들의 일부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허름한 신비주의로 포장된 예술의 가치나 의의에 대한 논의들, 교육 수혜자들의 수요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미술대학 교육 프로그램의 개선 및 평가방안, 비평에 요구되는 인정하기 어려운 도덕주의적 편견들, 근거 없는 복종이나 추종을 요구하는 선후배 관계나 사제 관계의 관행들, 타인의 노동에 대해 돈으로 표시되는 보상과 거래관계를 평가절하하거나 금기시하는 주제넘은 비난들, 예술가들을 우습게 여기거나 예술을 공짜라고 생각하는 저열한 관료주의, 주제를 검열하는 파시즘과 안 그래도 힘겨운 예술가들에게 현실정치와 창작을 반드시 뒤섞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죄의식을 조장하고 극단적 진영으로 나눠대는 정치적 징발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 조건들은 2014년 현재 예술적 중세를 지속하거나 재생산하는 핵심적 요인들이다.
나는 이들이 기왕 비평가로 방향을 설정했다면, 그리고 자신들의 세대를 구축하고 또래의 젊은 예술가들이 당대의 독자성을 실현하도록 하고 싶다면 전선(戰線)을 정확히 설정할 것을 권하고 싶다. 큰 전선들과 지엽적인 전선들을 구분하고 현재의 논의가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지를 가늠해야 한다고 본다. 이들은 평생에 걸쳐 동시대미술을 냉소의 대상으로 깎아내리려는 온갖 ‘무식한 자들(philistines)’과 싸워야 할 것이다. 미술계 내부에서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미술계 전체를 빈곤으로 몰고 가는 사회 전체의 무관심, 평가절하, 편견, 고립 등과 싸워야 할 것이다. 이번 <공장미술제>를 둘러싼 논의가 내포하고 있는 함의가 서진석과 같은 개인이나 공장미술제에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이 논의를 ‘먹고사는’ 문제로만 다루어서도 안될 것이다. 이것이 복지논쟁이나 노사분쟁 혹은 세대 갈등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이 모든 이슈는 예술적 ‘수월성’을 통해 어떻게 탁월한 동시대미술을 제공할 것인지, 그것을 통해 어떻게 미술 전반의 환경을 개선할 것인지에 대한 비평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이제 50대에 접어드는 우리도 더 치열하게 노력할테니 당신들도 노력하기 바란다.

유진상・계원예술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