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SHIN'S DESIGN ESSAY 12

임산부를 보호하고 태극기를 휘날려라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지난 7월 말부터 서울시 지하철 열차에 임산부를 위한 별도의 배려석이 마련되었다. 이름도 ‘임산부 배려존(zone)’이라고 한다. 인터넷 사진으로 보니 눈에 번쩍 띄는 핑크색으로 의자를 칠했고, 의자 윗면부터 의자, 그리고 아래 바닥까지 핑크색이 이어졌다. 의자 위 핑크색 면 안에는 “내일의 주인공을 맞이하는 핑크카펫”이라고 쓰여 있다. 바닥에도 비슷한 문구가 있다. 이런 고마운 뜻을 모른 채 순수하게 이 디자인을 평가한다면 정말 최악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기사의 사진을 보면, 무슨 어린이를 위한 유치한 이벤트 객차 인테리어 디자인으로 착각할 정도다.
아니 이렇게까지 유별나게 디자인을 해야 하나? 이 말은 사람들이 이제 웬만해선 노인이나 장애인, 임산부를 눈곱만큼도 염려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 또래 사람들은 누구나 알듯이 옛날에는 배려라는 것을 버스 안에서 배웠다. 노인이 차에 오르면 어떤 자리든 일어서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문제는 노인인지 아닌지 구분이 애매한 경우다. 그런 경우에도 고민하지 말고 일어서는 게 제일 좋다. 그러면 자기는 그렇게 늙은이가 아니라며 양보 받는 걸 거부하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버스의 어떤 자리에도 요즘처럼 임산부석, 노약자석, 장애인석이라고 쓰여 있지 않았다. 즉 모든 자리가 양보와 배려의 대상인 것이다.
언젠가부터 지하철에서는 열차의 맨 앞뒤 자리가 배려석으로 ‘지정’되었고, 버스에서도 그런 ‘지정석’이 생겼다. 지정석이 생겼다는 건 노약자는 그런 자리에만 앉으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배려가 선택적으로, 또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약 그런 지정된 배려석이 아닌 곳에서는 눈앞에 보이는 노약자에게 양보하지 않고 철면피로 앉아 있어도 비난을 면제 받을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이번에 생긴 임산부석은 디자인적 대비가 지나쳐 그 자리에 앉는 게 왠지 엎드려 절받기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물론 그렇게라도 해서 임산부들이 겪는 출퇴근과 이동의 고통을 덜어준다면 그까짓 디자인이 문제인가! 문제는 그렇게 오버 디자인을 했는데도 여전히 그 주목 받는 자리에 얼굴에 두꺼운 철판을 깔고 당당하게 앉는 일반인이 있다는 현실이다.
아마도 그런 삭막한 현실이 과잉 디자인을 낳은 이유일 게다. 그 과잉 디자인조차 배려와 양보가 사라진 시대를 이기지 못하고 단지 반영만 할 뿐이다. ‘눈에 확 띄는’ 핑크색 임산부석의 존재는 배려가 관습이 아닌, 즉 자발성이 아닌 강제성의 대상이 되었음을 말한다. 극도의 경쟁심과 개인주의가 낳은 현대적 증후라고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최근 광복절을 전후해서 나타난 태극기 게양 열풍도 임산부 배려석과 비슷한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시도 자치단체에서 큰 건물에 대형 태극기를 걸도록 공문을 보내고, 광복절을 맞이해 집집마다 태극기를 나눠주며 태극기 게양을 독려했다. 어떤 아파트에서는 광복절에 모든 가구가 빠짐없이 태극기를 걸면 아파트값이 올라간다며 참여를 유도했다고 한다. “여러분의 단합 속에 아파트 가치를 높이자!” 이건 무슨 새마을운동 시대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제작비가 적게는 수백만 원에서 많게는 수천만 원이 드는 대형 태극기를 햇빛과 바람을 막아가며 건물에 부착한 기업들은 불이익을 당할까 고민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참여한 것이다. 태극기 달기는 자발적 애국의 표현이다. 그런데 집값을 올리려고 태극기를 다는 건 애국과는 전혀 무관한 개인주의, 더 나쁘게 말하면 탐욕의 소산이다. 기업들의 태극기 달기 역시 애국적인 척 코스프레한 것에 불과하다. 광복절 전후로 나타난 태극의 물결은 결국 애국과는 정반대로 해석할 수 있다. 애국이 사라진 시대, 오직 개인과 기업의 살길만을 돌보는 시대의 처절한 반영이다. 그 태극기 열풍을 기획한 정부조차 나라보다 정권 창출이 먼저이지 않은가? 진짜 애국이 아니라 애국적 분위기가 필요했던 거지. 배려든 애국이든 이제 배려하고 애국하라는 강제성을 띤 지시의 기호는 그것의 상실을 보여줄 뿐이다. ●

위 강영민 <내셔널 플래그> 캔버스에 아크릴 66×91cm(각)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