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

20세기 미국 추상미술계 우상인 작가 프랭크 스텔라는 자기의 회화작품을 설명하면서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What you see is what you see)”라고 말했다. 이 명언은 한편으로 그의 회화가 ‘보여주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 즉 그의 회화가 제시하는 것은 화면의 바깥세계에 실재했던 혹은 실재하는 (관객이 직접 경험하고 있지 않은)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화면의 형식 자체가 투명하고 실제적인 (관객이 직접 경험하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매체가 곧 메시지’라는 설명이다. 다른 한편 그 명언은 ‘우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만 본다’라는 인식론적인 명제도 의미한다. 즉 화면의 현실 자체가 관객의 관점과 관심에 따라 특수하게 지각된다는 뜻이다. 이 지각의 한계는 곧 하나의 현실을 놓고 상반된 두개의 현실을 재구성할 수 있는 모순의 근원이다. 따라서 그 명언은 그 모순을 극복하고 두 현실의 공존과 화합의 장을 이룩해야 한다는 윤리적인 요청을 암시한다.
예술감독 선정 과정에서 물의를 빚었던 부산비엔날레가 8월 20일 드디어 개막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불공정하게 선정되었다고 구설에 오른 그 예술감독이 자국 프랑스 문화권 출신 작가들을 대거 선정하여 또 한 차례 물의를 빚고 있다. 엎지른 물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이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그렇다 치고, 앞으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이다. 감독 선정이야 행정적인 문제로 보고 그 선정절차와 규정을 재검토해 오해의 여지가 없게끔 말끔하게 정리하면 되겠지만, 감독의 작가 선정은 까다로운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표현의 자유와 전시기획자의 자율성 보장이라는 미술의 근본적인 대전제에 연루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비엔날레조직위원회에서 예술감독에게 각국의 작가 수를 고르게 맞추어 달라고 주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올해 부산비엔날레가 ‘프랑스판 비엔날레다’라는 지적은 정당하다. 그 지적은 부정적이지만 그 자체로 부산미술계의 건강한 상태를 시사한다. 그러나 그 지적이 부산미술계가 더 발전할 수 있는 자성의 계기가 되어야지 분열의 무기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선 프랑스 문화권에서 다수의 작품이 선정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조건들을 확인해야 한다. 우선 전시기획의 개념을 검토해봐야 하고, 또 그 외의 조건들을 검토해보아야 한다. 편중된 작가 선정 결과만 놓고, 프랑스 예술감독의 ‘정치적 발상’이라거나 부산비엔날레조직위원회의 ‘문화사대주의’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단편적이다. 더욱이 ‘비엔날레를 볼 필요가 없다’라든지 ‘비엔날레 자체를 없애야 한다’는 식의 ‘전부가 아니면 제로(all or nothing)’라는 극단적인 태도는 궁극적으로 우리 미술계 발전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미술은 스스로의 생성조건을 드러내고 그것을 생산한 사회와 시대를 반영한다. 미술작품도 그렇고 미술작품들을 발표하는 전시도 그렇다. 올해 부산비엔날레는 협소하게는 부산미술계, 광범위하게는 우리 미술계와 우리 사회, 나아가서 동시대미술의 편향적이고 승자독식적인 성향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동양 지역에 편중되거나 서구지향적인 부산비엔날레가 될 것이라는 예고는 이미 물의를 일으킨 ‘공동 감독론’에서 명백히 경고되었었다. 보도된 공동 감독론에서 ‘서구지향적’이란 용어가 ‘프랑스판’을 의미한다는 구체적인 지표는 없었다. 아무튼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그 경고의 긴박성은 충분하게 전달되지 않았고 부산지역 미술인들은 그 예고를 무시했다. 결국 그 예고는 현실로 다가왔고 현재 부산지역 작가들은 부산비엔날레 ‘파행’의 대안으로 새로운 트리엔날레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그 트리엔날레가 대결의 경쟁심리에서 나온 발상이라면 이 역시 승자독식적인 자세를 의미한다. 비생산적인 대결의 상황보다 생산적인 화합의 장을 구성하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지난 20여 년간 한국은 경제면에서 급속도로 발전했다. 이제 문화적으로 발전해야 할 단계이다. 이 과제는 한국의 작가들과 큐레이터들, 예술행정가들에게 성숙함을 요구하고 세계 동시대미술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승자독식이라는 동시대미술의 극단적이며 경쟁적인 대립 성향은 지난 20세기 냉전시대의 특수한 산물이다. 21세기 한국에서 그런 구태의연한 자세와 미학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런 동시대미술의 성향을 개선하는 일에 우리가 앞장서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 작가들이 세계 동시대미술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공헌들 중의 하나이다. 2014년 부산비엔날레는 신자유주의의 허점을 보완하고자 글로컬 개념으로 포장된 미학이 현재 부상하고 있음을 우리 눈앞에 엄연히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글로컬 미학 역시 과거 냉전미학의 사고방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냉전미학에 마침표를 찍고자 하는 우리는 그 미학을 직시하고 그 미학의 맹점을 간파해서 보완하는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미학을 탐색해야 한다. 즉 동시대 미술을 힘의 논리에 입각한 대립의 시각이 아닌 상생의 논리에 입각한 화합의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
냉전의 유산이자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그 대결논리를 몸소 체험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그 대결논리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세계시민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그 대결논리를 극복할 수 있는 잠재력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지금 그 잠재력을 개화시킬 수 있는 도상에 서 있음을 지각해야 할 것이다. 이견이 많은 2014년 부산비엔날레와 <무빙 트리엔날레>의 생성을 새로운 화합의 미학을 개척할 수 있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즉 우리는 갈등이 아니라 미래에 다가올 화합의 싹을 지금 여기서 적나라하게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부산비엔날레를 혁신할 동력을 부산미술계 내부에서 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한행길・뉴욕 코리아아트포럼 공동설립자 겸 디렉터, 독립 큐레이터

[Hot People] 큐레이터 JEAN-LOUIS FROMENT

달콤한 덫에 사로잡히다

<문화 샤넬전>을 진두지휘한 큐레이터, 장 루이 프로망이 한국을 찾았다.  그는 2007년 모스크바의 푸슈킨 미술관을 시작으로 2011년 상하이, 베이징 그리고 2013년 광저우와 파리를 거쳐  8월 20일부터 10월 5일까지 서울에서 열리는 <문화 샤넬전>을 기획한  인물이다.  올해로 6번째 전시를 기획하다 보니  그는 누구보다 샤넬을 깊이 연구하고 탐구한 명실공히 샤넬의 삶과 역사에 정통한 전문가다.   지금까지 이어진 <문화 샤넬전>은 가브리엘 샤넬이라는 인물을 보여주는 거대한 주제는 일맥상통하지만 그 소주제와 전시에서 보여주는 자료들은 전시가 열리는 도시마다 다르게 꾸며졌다. 동대문디자인 플라자(이하 DDP)에서 열리는 <문화 샤넬: 장소의 정신전>은 샤넬에게 의미가 깊은 장소 10곳을 선정해서 샤넬의 패션, 주얼리, 시계, 향수 등의 창작품들과 함께 500점 이상의 다양한 사진, 책, 예술작품 등을 선보이는 기존 전시의 확장판이라고 볼 수 있다.  인물보다 장소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샤넬을 중심으로 한 당시 미술가와 문학가들의 유럽 문화계 네트워크를 한눈에 살펴 볼 수 있다.  장소를 테마로 정한 것에 대해 장루이 프로망은 “샤넬 브랜드에서 생산하는 제품들은 아직까지 이 장소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그 장소성이 깃들어 있기때문”이라고 답했다. 장소성을 보여주는 전시이기에 전시장소 를 신경써서 선택했다.  DDP를 선정한 이유에 대해서 “자신만의 개성이 뚜렷한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건축한 DDP는 건축가의 선정부터 개관 이후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며 “비록 DDP가 다양한 시각으로 읽힐 수 있지만 경계를 무너뜨리고 혁신적인 시각문화를 창출한 건축가 자하 하디드는 샤넬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고 언급했다.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독특한 공간의 문을 열고 전시장에 입장하면 무척이나 어둡다. 그곳에는 노란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투명한 유리 쇼케이스들이 반듯이 정렬되어 있다. 서랍장 같은 쇼케이스에 놓인 그림 및 사진자료는 대부분 누워있다. 오브제와 관람객 간의 거리를 줄이려는 시도다. 그래서일까. 넓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전시는 은밀하게 펼쳐진다. 장 루이 프로망은“보물상자 속의 보물을 발견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자 했다. 또한 샤넬이 살던 공간의 내부 조명이 황도 빛이 나는 따뜻한 조명이이서 그 느낌을 살리고자했다”고 설명했다.
장 루이 프로망은 <문화 샤넬전> 외에도 <장 누벨의 건축전> <르 몽드 장 폴 고티에전> 등 패션과 건축을 다루는 매체 간 크로스오버를 시도하는 전시를 꾸준히 기획해왔다. 이에 대해 그는 “모든 예술가는 자기 안에 상반되는 생각들을 갖고 있다”며 “여러 형식을 연결시켜 관람객이 하나의 인물, 사물을 다층적으로 이해하고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나 함께하는 장르들에 정당성이 늘 확보돼야 한다”며 크로스오버 전시의 의미를 설명했다. 샤넬에 빠져 살면서 향후 프로젝트를 계획하기 힘들다는 그는 주변에서 “샤넬 전시를 진행하면 달콤한 덫에 빠질 것”이라던 말을 절실히 느끼고 즐기고 있다. 임승현 기자

장 루이 프로망은 보르도 현대미술관의 설립자로 관장을 지냈다. 다수의 국제 전시와 대학 강의 및 출판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 기획자다. 1990년과 1994년 베니스비엔날레 프랑스 파빌리온 큐레이터를 역임했다. 바르셀로나 카이사(CAÏXA) 컬렉션,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MACBA) 고문을 지냈다. 2000년대 이후에는 <르 몽드 장 폴 고티에전>, <패션의 열정 – 패션의 100년전>, <장 누벨의 건축전> 등 패션 또는 건축 관련 전시를 기획하고 있다. 2007년부터는 <문화샤넬전>으로 총 6회의 전시를 기획했다.

 

Culture CHANEL_Exhibition_12-2

DDP 전시장 전경(사진제공 CHANEL)

 

 

[Sight & Issue] 2014 강정대구현대미술제

대구현대미술의 발판을 넘어

<강정대구현대미술제>가 어느덧 3회를 맞았다. 2012년 물문화관 디아크(The Arc)와 시민공원이 강정고령보 근처에 자리 잡으면서 강정 대구현대미술제가 첫발을 내디뎠다. 거대한 활 모양의 디아크가 위용을 뽐내는 문화공원 일대는 첩첩이 둘러싼 산을 배경으로 낙동강과 금호강이 만나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이루고 있다. 올해 <강정대구현대미술제>는 지난 8월 하순 ‘강정에서 물·빛’이란 타이틀로 개막해, 9월 21일까지 성황을 이루며 거의 한 달간 진행되었다.
미술계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1970년대 바로 이곳, 강정의 낙동강가에서 펼쳐진 <대구현대미술제>를 기억할 것이다. 1970년대 이강소, 이건용, 김구림, 박현기, 최병소 등 주로 대구 출신 젊은 작가들이 국제미술계의 선진적 경향을 수용하여 한국미술에 ‘아방가르드’의 작위를 부여했다. 미술관 밖에서 벌이는 퍼포먼스나 이벤트, 설치미술, 개념미술은 1970년대 뉴욕에서는 이미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한국에서는 새로운 충격이었고 예술적 반란이었다.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그것도 타블로나 오브제 위주의 전통미술 방식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존재했다가 사라져갈 개념예술 형식으로 선보였다는 것은 지금도 대구미술인들의 예술적 자긍심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강정에서 물·빛’에 출품된 20여 점의 작품은 디아크를 중심으로 형성된 공원 곳곳에 위치하면서 나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강정이라는 장소가 지닌 역사성과 공간성의 무게도 만만치 않거니와, 디아크 문화공원에 장소특정적으로 설치된다는 조건 때문에 참여 작가 대부분은 전시 주제만큼이나 장소의 역사성을 의식한 것 같다. 출품작 중 다수는 경제적, 문화적으로 급성장하던 시절을 오늘에 비추어 되돌아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기술문명의 상징인 디아크와 지금은 섬처럼 떠있는 옛 토지 사이의 공간에 사직단을 쌓아 현대적 제식 행위를 한 김광우, 농경지대였던 강정이 산업화시대를 거치면서 변화한 모습을 반추하며 강정자리라는 별자리를 설치한 차현욱, 팝송가사를 차용하여 아방가르드 선배들에 대한 존경심과 더불어, 변화한 강정 강변의 모습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 김승현, 디아크의 초현실주의적 형태와 대조적인 원초적 형태의 알을 세 가지 다른 재료로 제작하여 산업시대 ‘백일몽’의 표상인 디아크를 배경으로 설치한 황성준 등은 시간의 간격만큼 변모해온 강정과 한국사회의 모습을 반성적으로 돌아본다.
그런가 하면 과거보다는 현재에 방점을 두고 지금 여기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 고찰하는 작업들도 꽤 있다. 산업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타인의 피를 섭취하며 생존하는 일군의 모기들로 추상화한 강대영이나, 대지의 기운을 흡수함으로써 거대하게 자라난 말의 역동적인 형상을 통해 욕망을 에너지원으로 삼아 질주하는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황우철은 다소 직설적으로 동시대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드러낸다. 이에 비해 간접적인 표현방식을 택한 나현은 디아크 뒤편에 네 개의 환기장치를 설치했는데, 인공적 아름다움을 지닌 시민공원 뒤편에 감춰진 자본주의적 욕망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술회한다. 거짓으로 점철된 현대인의 모습을 5미터 상공의 나룻배에 앉은 피노키오의 모습으로 표현한 김봉수와, 일견 꽃처럼 보이는 화분들을 채우고 있는 현대적 건축재료 콘크리트의 양면성에 주목한 최두수도 우회적인 방식을 취해 동시대 한국사회의 단면들을 꼬집는다.
2012년의 ‘강정랩소디’와 2013년의 ‘강정가다’에 이은 ‘강정에서 물·빛’은 강정 대구현대미술제의 진일보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기존의 행사들이 단기간의 이벤트적 성격을 띠었다면, 이번에는 주제의식을 지닌 꽤 안정된 전시행사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동식물을 막론한 모든 유기체는 물과 빛이 없다면 탄생할 수도 생존할 수도 없다. 참여 작가들은 모두 제 나름의 방식으로 ‘물과 빛’의 화두를 장소성과 어우러지게 구체화하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가령 조숙진은 생명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담은 강렬한 영상을 장소특정적 설치를 통해 보여주었고, 김성수는 마치 풍향계처럼 강바람을 따라 회전하는 채색 나무조각들을 통해 삶과 죽음, 그리고 상처와 치유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한국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대구현대미술제>가 부활하고, 성공적인 전시행사로 진행된 것은 기쁜 일이다. 그러나 반가움과 함께 아쉬움도 없지 않다. 비록 달성문화재단이 지원하는 공공 문화행사일지언정,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러 우리는 아방가르드의 선구자들과 전혀 다른 시공간에 살고 있다 할지라도, 역사적 의의가 큰 이 미술행사가 과거 선배들의 실험성, 도전성, 급진성을 계승할 방법이 없을까? 1977년 <대구현대미술제>에 국내외 200여명의 작가가 참여하여 창조의 열정을 불살랐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지금의 <강정대구현대미술제>는 다소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이제까지 개최된 <강정대구현대미술제>의 진화 단계를 돌아보며 이런 아쉬움을 잠시 유보하고, 앞으로 미술계에 던져줄 신선한 충격을 기대해 보고자 한다. 강미정·서울대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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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철 <세속적이거나 철학적이거나 욕망은 진화한다> 2008

[Hot Art Space]

 

8월 25일부터 10월 19일까지 토탈미술관에서 열리는 <문타다스: 아시안 프로토콜전>은 안토니 문타다스의 첫 번째 한국 개인전이다. 이 전시에서는 한국, 중국 그리고 일본의 큐레이터, 건축가 등과 벌인 프로젝트를 선보인다. 50여 개의 키워드를 각국의 문화, 사회, 정치 등의 상황과 관련지어 재조합한 사료와 공/사적 공간비교 등을 펼쳐낸다. 1942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문타다스는 다양한 환경 요소와 관련해 그 안에서의 소통과 관계, 공간의 문제 등을 주제로 작업하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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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인환 (2)

<사각지대 찾기>를 타이틀로 한 오인환의 개인전이 9월 4일부터 24일까지 스페이스 윌링앤딜링(왼쪽)과 갤러리 팩토리에서 열렸다.
권력의 감시망하에 놓인 개인이 그 권력으로부터 피하려는 몸짓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작가는 이 전시에서 군대에서의 경험, 유니폼이라는 획일화된 규정에 놓인 이들의 행동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상호감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CCTV가 각각의 전시장을 실시간으로 중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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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손 (2)

회화에서 출발해 사진, 설치, 출판 등 장르를 넘나들며 새로운 시도를 선보여온 작가 이태량의 개인전 <EXISTENCE and THOUGHT 2014>(9.10~23)가 갤러리 그림손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전동기의 힘으로 기계 장치가 움직이는 버전과 영상 버전으로 ‘언어를 대신하는 시각적 장치’를 새롭게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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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선재 (1)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 중인 김성환의 개인전 <늘 거울 생활>이 8월 30일부터 11월 30일까지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다. 작가의 비디오, 드로잉, 설치 등이 출품된 이번 전시에는 작품이 공간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내용을 담았다. 9월 1, 2일에는 신작 퍼포먼스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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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두 (1)

이청준의 소설과 김선두의 그림이 ‘고향’을 매개로 만났다. 이청준·김선두의 2인전 <고향읽기>가 9월 3일부터 28일까지 서울 소공동 롯데갤러리에서 열렸다. 전남 장흥이 고향인 두 작가의 깊은 우정이 문학과 미술의 콜라보레이션 전시로 승화 한 것이다. 친필 원고를 비롯한 이청준의 유품과 사진기록물이 소개되었고 그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김선두의 작품 40여 점이 선보였다. 특히 이청준의 소설 《눈길》의 내용을  장지에 그려 만든 병풍엔 두 예술가의 고향에 대한 향수가 스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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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트

故 이동엽의 회화와 이수종의 달항아리가 만나 일으키는 잔잔한 파동을 담은 전시 <백색숨결전>이 8월 21일부터 9월 19일까지 송아트갤러리에서 열렸다.
모든 물성을 걷어낸 백색을 공통분모로 하는 이 전시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두 작가의 작품을 통해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많은 것을 말하는 백색의 깊은 의미를 반추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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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상 (2)

권오상의 개인전 <Structure>가 9월 12일부터 11월 8일까지 페리지갤러리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신작<Masspatterns>와  <New Structure> 연작을 선보였는데 발견하기 힘든 실제의 오브제가 섞여 있다. 즉흥적으로 이뤄진 이 과정을 통해 ‘나’로서 구축되는 세계의 모습을 담아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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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준호 (2)

8월 29일부터 9월 28일까지 갤러리 현대에서 열린 전준호의 전시 타이틀은 <그의 거처>였다. 나무로 제작된 기도하는 해골상, 오브제 작업 <코는 왜 입 위에 있을까>, 영상작업 <묘향산관> 등이 출품되었다. 특히 <묘향산관>은 제5회 후쿠오카트리엔날레에서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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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리오 (1)

인도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수보드 굽타의 개인전이 8월 29일부터 10월 26일까지 새로 개관하는 아라리오갤러리 상하이에서, 9월 1일부터 10월 5일까지는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열린다. 상하이 전시에는 <이것은 분수가 아니다> 등이, 서울 전시에는 30여 점의 음식 페인팅 등이 출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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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현미서 (2)

9월 2일부터 내년 1월 1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초자연전>은 일견 미술이 과학을 만나는 양상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리경(사진) 조이수 박재영 김윤철 백정기가 참여한 이번 전시는 작가들이 현장에서 설치한 작업으로 구성돼 있다. 자연에 반하는 기계 장치를 이용해 상상 속에서 가능했던 시각적 경험을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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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1)

<70’s Renaissance 조각전>은 조각계 원로 초대전이다. 9월 1일부터 10월 5일까지 이브갤러리에서 열리는 이 전시에는 김경옥 김혜원 김효숙 민복진 백현옥 심정수 이정자 전뢰진이 출품했다. 구상조각에 초점을 맞춘 이 전시를 통해 우리 조각의 다른 단면을 살펴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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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아트 (1)

<평균적 고통>으로 명명된 이동욱의 개인전이 8월 23일부터 9월 12일까지 코너아트스페이스에서 열렸다. 작가는 폴리머클레이를 소재로 작은 인체를 구현한 작업을 꾸준히 해왔던 바, 이번 전시에서는 인터넷을 통해 구입한 동물인형에 붙어있던 가격표를 다른 오브제에 붙인 신작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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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생트

김하영의 개인전 <캐릭터 없는 캐릭터들>이 9월 3일부터 24일까지 갤러리 압생트에서 열렸다. 영국과 한국을 오가며 작업하는 작가는 개성을 상실한 현대인을 관찰하고 유머와 아이러니를 섞은 작업을 선보였다. 이로써 몰개성적인 우리의 모습이 투명한 폴리에스터캔버스에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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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유슬 (2)

라유슬의 개인전 <레가토(Legato)> (LIG 아트스페이스, 9.3~10.2)는 음과 음 사이를 이어서 연주하라는 음악용어에서 따왔다. 이는 유년기 음악과 친근했던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한 것으로 캔버스는 끊어지지 않는 선과 면의 연속과 중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로써 새로운 차원을 넘나드는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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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류뱌다 (2)

다양한 매체를 넘나드는 작가 조현아의 개인전 <Effaced>(8.22~9.21)가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에서 열렸다. 작가는 영상, 설치, 사운드 작업을 통해 자신이 2년 전 출간한 소설에서 문자 ‘O’를 제외한 모두를 지워내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면서 수많은 이름이자 동시에 이름 없는 ‘O’의 유령들을 호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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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비 (2)

고양이의 날(9월 9일)을 아는가? 1년 중 하루라도 길에서 태어나고 죽은 고양이의 생명을 생각해보자는 취지로 2009년부터 시작된 기념일이다. 갤러리 가비에서 이날을 기념해 <고양이, 섬을 걷다전>(9.5~14)이 열렸다. 고경원 김대영 박용준은 한국과 일본의 섬을 다니면서 촬영한 고양이 사진 40여 점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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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이프 (1)

이형구의 개인전 <Measure>(갤러리 스케이프, 9.2~10.19)의 전시장을 들어서는 순간 말(horse) 조련 도구와 같은 오브제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들은 걷기나 일상에서 벌어지는 수행적 행위가 갖는 무의식성과 의식적인 훈련 사이의 아이러니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다. 이러한 장치들은 그러나 익숙해지면 자연스러운 행위를 하게끔 하는데 이는 존재의 방식을 바꾸는 의미로 치환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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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 (2)

스페이스 캔의 오래된 집 재생 프로젝트로 열리는 조소희의 개인전이다. 8월 27일부터 9월 30일까지 열린 이 전시에서 작가는 실이나 양초 등 유약한 재료를 이용한 작품을 선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재료가 만들어내는 것은 오래된 집이라는 공간의 대기와 함께 빛과 그림자 등과 어우러져 또 다른 형태를 구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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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저우 (9)

한국 현대미술의 전세대를 아우르는 주요 작가들의 전시 <한국현대미술: 우리가 경탄하는 순간들>(8.29~9.28)이 중국 항저우 소재 삼상당대미술관(三尚当代美術館)에서 열렸다. 항저우는 남송(南宋)의 수도로 중국 전통미술의 중심지이자 베이징의 중앙미술학원과 함께 양대 미술대학으로 평가받는 중국미술학원이 있는 곳이다. 차이궈창, 황융핑 등 대표적인 중국 현대미술가도 이곳 출신이다. 전시가 열린 삼상당대미술관은 중국미술학원 미술관과 함께 항저우 미술계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현지의 뜨거운 주목을 받은 이 전시에 한국 현대미술의 두 거장 백남준, 이우환을 비롯해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김아타 유근택 홍경택 이세현 이용백 오윤석 권순관 김기라 박지혜 장종완이 참여했다. 전시 기획을 맡은 윤재갑 상하이 하오미술관 관장은 “항저우는 현대미술보다 전통미술의 벽이 워낙 견고하기 때문에 현대미술 작가 층이 두텁지 못하다. 이곳에서 한국 현대미술을 선보인 것은 이번 전시가 처음이다. 오랫동안 다양한 실험이 축적된 한국 현대미술 작품들이 중국 미술계에 큰 자극을 줄 것”이라며 이번 전시의 중요성을 밝혔다. 항저우=이슬비 기자

[Special Feature] 광주비엔날레 2014 – 터전을 불태우라

터전을 불태우라

베일에 가려졌던 <제10회 광주비엔날레>(9.5~11.9)의 진면목이 드디어 공개됐다. 총감독 제시카 모건이 제시한 이번 광주비엔날레의 화두는 파괴와 생성. 그녀는 창조적인 생성을 위해선 기존의 제도와 관념, 체제, 규범을 과감히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관습화된 모든 가치와 낡은 이념을 활활 불태워 없애버려야만 과거와 완전히 결별할 수 있다.
이런 의도에 걸맞게 출품작 90% 이상이 광주비엔날레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들의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물량공세를 통한 이미지의 과잉과 무미건조한 스펙터클이 범람했던 과거 비엔날레와 확연히 구분되는 대목이다. 또한 이번 광주비엔날레는 ‘미학적 정치학’이라는 측면에서 현대미술의 담론을 제시해야 한다는 막연한 의무감과 사명감에서 한발 비켜 나 있는 듯하다. 대신 관람객의 순수한 감정에 호소하며 진지한 시각으로 작품 읽기를 유도한다.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하는 이번 비엔날레가 전시 주제처럼 원점으로 돌아가 미술계에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대안을 내놓았는지 그 여부는 단언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기존 제도에 저항하는 현대미술의 다양한 실험적인 장으로 그 기능과 역할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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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골드스타인 <불타는 창문> 혼합재료 1977

어두운 방 안 창문 속 붉은빛은 집이 불타거나 창밖으로 불길이 번지는 인상을 준다. 이는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면서 보는 경험의 진실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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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마 물지<분실물 취급소> 섬유유리 버팔로 가죽 방적사 2012

작가는 박제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인간 형상에 가까운 몸을 만들어냈다. 정권의 억압 하에 실종되었다가 훗날 사체로 발견된 사람들을 은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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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넬리아 파커 <어둠의 심장> 숯, 철사 2004

삼림 관리를 위한 불 놓기가 오히려 산불로 번져 숲을 태운 미국 플로리다의 사건 현장에서 가져온 나무 잔해로 설치작업을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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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알렉산더 <심포지엄> 설치 2014

기존의 개별 작품 56점이 모여 연출된 거대한 장면은 다양한 권력구조에 의해 국가통제 시스템이 붕괴 위험에 처한 풍경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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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렌다 파하르도 <교차로>(오른쪽) 캔버스에 아크릴 2003

미국과 필리핀의 관계를 반추한 작품으로 미국이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타협하지 않은 필리핀의 대안적 역사를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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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도 바수알도 <섬>(내부 모습) 혼합재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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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두아르도 바수알도 <섬>(외부모습) 혼합재료 2009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역사적 지역인 산 텔모에서 불탄 한 건물의 잔해물을 추려서 작은 규모로 구축한 집이다.
집 안에는 작가가 발견하거나 만든 오브제들로 채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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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키엔홀츠 & 낸시 레딘 키엔홀츠 <오지만디아스 퍼레이드> 혼합재료 1985

국가권력에 관한 알레고리로서 이 작품은 공포와 선동의 잠식 효과를 역설하며 거꾸로 뒤집힌 혼돈의 세계를 묘사한다.

[Special Feature] 광주비엔날레 2014 – 냉정과 열정 사이, 차갑고도 뜨거운

정현  미술비평

한 해 걸러 비엔날레가 다가올 때마다 나는 처음으로 광주비엔날레를 방문했던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기억에 취했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비엔날레를 떠올리면 마음이 심란해지기 일쑤다. 생각해보면 1990년대 비엔날레를 관람한다는 것이 특권처럼 느껴진 적이 있었고 한국에서 세계적 작가들의 작업을 보는 쾌감도 남달랐다. 세계화를 표방한 문화 정책에 의해 설립된 광주비엔날레는 한국을 넘어 다른 세계, 문화, 이야기를 경험할 수 있는 통로였기 때문이다. 1990년대가 문화 제도화의 밑그림을 그리던 시기였다면 2000년 이후 미술계는 본격적인 세계화의 좌표를 추적하기 시작했고 양적으로 팽창한 미술계는 금융자본 붕괴 이후 정체기를 맞이했다. 21세기 이후 아시아를 비롯한 비서구권 국가들이 경쟁하듯 비엔날레를 창설한 이후부터 비엔날레는 세계 문화지형도를 움직이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고 이른바 ‘미학적 정치학’이 전개되는 거점이 되었다. 이 같은 국제적인 행사가 주는 긍정적인 긴장감은 나를 여전히 흥분시키지만, 언제부턴가 비엔날레를 통해 ‘미술’을 감상한다는 건 시대착오적인 생각이 되어버렸다. 2014년 가을, 또다시 비엔날레의 계절이 돌아왔다. 비엔날레 현장을 방문하기 전부터 호기심만큼이나 피로함도 함께 찾아왔다. 비평가는 늘 현장에 있지만 제대로 즐기기는 어려운 직업이다. 이해하고 분석하고 판단하는 과정은 언제나 어렵고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예술감독 제시카 모건의 말을 빌리자면,   <터전을 불태우라>는 1980년대 초 미국 팝그룹 토킹 헤즈의 노래 제목으로 미국 중산층의 불안을 담은 송가처럼 불렸다고 한다. 여기서   ‘불태우다’의 의미를 활활 타오르는 환희와 사회적 이슈에 대한 적극적 참여를 은유한다고 설명한다. 막상 전시의 문을 열자 의견이 엇갈린다. 전시 주제를 일차원적으로 재현했다는 의견과 역대 최고의 비엔날레였다는 평가가 오갔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에게 <터전을 불태우라>는 오랜만에 비평가의 입장이 아닌 전시를 즐기는 한 명의 관객 입장에서 포만감을 느낀 전시였다. 무엇보다 이번 비엔날레는 이해하기가 쉽다. 이해의 용이함이 깊이의 부족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동시대를 사는 다수가 이미 전제된 전시의 의미 혹은 개념에 의지하지 않고 작품들을 경험하면서 자연스레 의미의 맥락을 발견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는 것은 사유의 특별함보다 공통점에 무게를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올해 비엔날레는 웅장한 스펙터클을 선사하지도 않고 미술제도나 사회문제를 개념적으로 비틀지도 않는다.
전시는 장편 소설을 공간 안에 옮겨놓은 듯 사건을 목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개막 식전 행사에 선보인 임민욱의 퍼포먼스는 전시의 프롤로그가 되어 잊힌 역사적 사건을 현재로 이동시켜 기억의 반대편으로 우리의 의식을 이동시킨다. 전시장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불타오르는 빨간 창(잭 골드스타인, <불타는 창문>(1977)이 놓여 있고, 곧바로 이불의 초기 퍼포먼스 영상과 오브제 작업이 관객을 기다린다. 혹자는 전시 주제를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재현한다고 비판하지만, 올해 광주비엔날레는 전문인과 대중 사이를 가로막는 지식이나 경험의 장벽이 어느 정도 허물어진 상태다. ‘빨간 창’이 주제에 대한 직접적 재현일 수 있으나, 입구에서 맞닥뜨린 강렬한 이미지의 충격은 관객을 사건의 목격자로 만들기도 하고 폭력에 의한 사회적 불안을 은유하기도 한다.
<터전을 불태우라>라는 이야기의 시작은 이처럼 불이 타오르고 있는 사건이 벌어진 시점에서 출발하지만 도입부를 지나면 사건 이후의 외상, 폭력의 전조, 터전을 잃어버린 이후의 잔해가 놓인 공간을 가로질러야만 한다. 이상이 1부(제1, 2전시실)의 이야기라면 2부(제 3, 4전시실)는 마치 초현실주의 소설처럼 실재와 환상, 재현된 현실과 개념적으로 설정된 예술작업이 기이하게 조우한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서는 모든 게 소진된 곳에서 음악이 흐르고 폐허 속에서도 희미하게나마 희망의 윤곽을 그린다(도미니크 곤잘레스 포에스터, <M.2062(피츠카랄도)>(2014)) 희망을 향한 기대는 미약하게 나타나지만 그 공명은 깊다. 우리가 소설을 읽을 때 오직 한 방향으로만 페이지를 넘기듯 <터전을 불태우라>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의 동선이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 다원성을 지향하는 최근의 전시 공간 디자인 경향과 달리 복고적으로 볼 수 있는데, 이 같은 방식이 되레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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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지날리니 무케르지 <수목생성> 대마 금속 프레임 1991~1992 작가는 인도의 전통 조각에 뿌리를 두고 금속 프레임에 대마 섬유를 공들여 엮으면서도 인도 안팍에서 논의되고 있는 예술, 공예, 모더니즘의 적용 방식을 해체한다.

사건을 목격하는 관객
남겨진 주검의 잔해들로 채워진 컨테이너 박스 두 개가 비엔날레 광장 앞에 놓여 있다. 그것은 말이 없다. 임민욱의 <내비게이션 ID>   (2014)는 한국전의 비극이 만들어낸 악몽 같은 현실의 일부를 꺼낸 작업이다. 사건은 발단은 다음과 같다. 한국전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원, 형무소 재소사 등 인민군 부역혐의를 받은 민간인을 학살하는데, 그중 진주와 경산에 거주하는 민간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유해와 유골은 오늘까지 컨테이너 박스에 보관돼 있고, 학살된 사람들의 가족은 죽음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현실이라 믿기엔 너무도 초현실적인 현장이 우리의 일상 안에 버젓이 버티고 서 있지만 사건과 무관한 사람들은 그저 강 건너 불 구경꾼과 다르지 않다. 작가는 주검을 보관한 컨테이너 박스를 광주로 옮기는 과정을 헬리콥터에서 촬영해 생방송으로 전송하고 희생자 가족들은 비엔날레 광장에서 그들을 맞이하는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내비게이션 ID>는 폭력의 희생자들을 현재형 시점으로 호출해 비극적 오디세이의 상황을 제시하는데, 이는 과거를 현재로 전환하는 통과의례가 된다. ‘터전을 불태우라’라는 선동적 표제가 지시하듯 전시는 희망이 소진된 보이지 않는 사회적 외상을 건드린다. 비엔날레 전시관 내외부에 설치된 스털링 루비의 <난로>(2014)에서 나오는 연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폭력, 학살, 억압이 자행되고 있다는 상징이 된다. 제1, 2전시장은 국가, 자본, 산업화, 물질주의 등에 의해 발생하는 폭력의 현장을 재연하는 대신 일상 속에 은밀하게 배어있는 폭력을 시사하고 있다.
어쩌면 폭력이 자행되는 장면보다 증상, 징후, 잔해같이 보이지 않는 폭력이 일상 안에 숨어 있다는 사실이 더욱 큰 공포로 다가온다. 파키스탄 작가 후마 물지의 조각 <분실물 취급소>(2012)는 국가 폭력에 의해 실종된 사람을 연상시키고 데쓰야 이시다는 기계나 부속품들로 결합된 인간의 형상을 통해 폭력에 의한 외상의 징후를 시각화한다. 회화 속 인물들은 영화 <모던타임즈>의 채플린과 다르지 않다. 터키 작가 바누 제네토글루는 한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증류주인 소주의 인류학적 궤적을 추적한 후 그가 직접 모은 다양한 소주를 시음할 수 있는 바를 제공한다. 이른바 한국 소주 지도를 그린 셈인데 바슐라르가 언급한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성질을 갖고 있는 술을 통해 초국가적 사유를 펼친다. 브라질 작가 레나타 루카스의 <불편한 이방인이 될 때까지>
(2014)는 비엔날레 전시관 벽을 부숴 건너편 아파트를 향한 새로운 창문을 만들어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비엔날레 제도 안에 개입한다. 전시장 초입의 <불타는 창문>과 대칭을 이루는 작업이다.
스위스 작가 우르스 피셔는 자신의 뉴욕 아파트 내부를 1:1 사진으로 재현한 공간 내부에 피에르 위그, 조지 콘도, 도모코 요네다 등의 작업을 개입시켰다. 이러한 개입의 방식은 이중적으로 표출된다. 우선 재현된 피셔의 아파트 내부, 다시 재현된 아파트 내부에 걸려 있는 예술작품, 실재를 재현한 공간 안을 점유하고 있는 타인의 작업들은 삶, 일상, 진짜와 가짜 등이 혼재한다. 이처럼 제3전시장은 피셔의 아파트 공간 내부와 외부로 분리되는데, 외부는 사회적 비평을 내포한 작업들로, 내부는 팝적인 요소로 가득 찬 유쾌하고도 괴상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4전시장은 현실과 허구, 실재와 환영이 교차하고 성정체성의 질서를 묻는 다소 원론적인 젠더 이슈와 게이 운동에 관한 작업들로 채워져 있다. 특히 벨기에 작가 카르슈텐 휠러의 <미닫이 문>(2003)은 미래주의 영화에 등장할 것같은 자동 거울 문으로 만들어진 공간을 제시한다. 복도이자 방인 정체성이 모호한 이 공간은 브루스 나우만의 복도 작업과 댄 그레이엄의 거울 작업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모호한 정체성에 대한 물음은 곳곳에 포진해 있다. 김성환의 <게이조의 여름-1937의 기록>(2007), 올라퍼 엘리아슨의     <밤 없는 여름, 낮 없는 겨울>(1994), 특히 므리날리니 무케르지의 <수목생성>(1991~1992)은 금속 프레임에 대마 섬유를 엮어 만든 공예적 조각으로 남녀 생식기를 연상시키는 식물을 형상화한다. 젠더 정치학의 시선은 이데올로기의 견고함을 부수기 위한 큐레이팅의 묘수로 보인다. 전시의 끝부분이 되자 타오르던 불꽃도 소진된다. 전시장 전체를 횡단하던 엘 울티모 그리토의 벽지 <미장센>(2014) 속 불꽃과 연기 패턴도 사라진다. 곤잘레스 포에스터는 축음기를 들고 있는 홀로그램 환영이 되어 어둠 속에 서있다. 이미지는 죽음을 대신하는데, 이미지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엘레지처럼 들린다. <터전을 불태우라>는 극단적인 작업들과 냉정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지만 말할 수 없는 ‘무엇’을 대하는 따스함이 전시를 관통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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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스털링 루비 <난로> 청동 주물 2014 파괴와 부활에 대해 개념적으로 다가가는 이 작품은 ‘터전을 불태우라’는 비엔날레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4개의 대형 난로가 전시장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