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REPORT Taipei Biennial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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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혜규 Female Natives 2010 Medicine Men 2010 Field of Teleportation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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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파비바라OPAVIVARÁ의 Fromosa Decelerator 16개의 해먹 다기 나무 220×1000×1000cm 2014

타이베이비엔날레 2014

<타이베이비엔날레2014>는 여타 비엔날레에 비해 매우 조용한 행보를 보인다. 그러나 그에서 비롯되는 공명은 결코 작지 않다. 9회째를 맞이한 <타이베이비엔날레 2014>가 2014년 9월 13일 개막해 새해 1월 4일까지 타이베이시립미술관에서 진행된다. 이번 비엔날레 주제는 ‘극렬가속도劇烈加速度, The Great Acceleration’이며 우리에겐 이른바 ‘관계의 미학’으로 저명한 니콜라 부리요Nicolas Bourriaud가 총감독을 맡았다.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인간에 의해 변화되는 지구에 대한 각각의 단상이 펼쳐졌다. 그 현장을 《월간미술》이 직접 찾았다.

확인하는 비엔날레? 살피는 비엔날레?
황석권 본지 수석기자

아시아 미술계에서 타이완臺灣이 갖는 의미는 의외로 미미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중국, 일본 등 인접한 국가에 비해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데는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향에 함몰돼 <타이베이비엔날레>를 간과한다면 이 비엔날레의 독특한 이면을 놓치는 일이 될 것이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타이베이비엔날레>는 주제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점을 그간의 전시를 통해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타이베이비엔날레 2014>는 어땠을까? 예술감독으로 니콜라 부리요Nicolas Bourriaud가 선임되었을 때부터 기대감은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 자신이 동시대미술에서 저명한 기획자이자 이론가로서 니콜라 부리요의 관계의 미학은 1990년대 이후 등장한 미술의 혼재성hybridity 등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이론으로 손꼽히고 있다. 따라서 이번 <타이베이비엔날레 2014>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총감독 니콜라 부리요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자신의 프레임이 견고한 총감독이 풀어내는 전시는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던 것일까? 본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관계의 미학의 이론적 내용과 사변적 실제론 사이의 대화”라고 이번 비엔날레를 정의한 그가 풀어낸 지금의 세상은 인간과 관련한 모든 것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지 않아도 드러난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런 점에서 아시아에서 처음 비엔날레 큐레이팅을 한 부리요가 주제로 제시한 ‘극렬가속도劇烈加速度, The Great Acceleration’가 그의 이론과 어떻게 맞물릴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극렬가속도’는 말 그대로 가속화된 인류의 문제, 즉 산업화, 글로벌화, 그리고 환경문제, 기술적 변화 등을 함축하는 매우 농도 짙은 다중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에서 인류가 새로운 지질학적 힘으로 작용한다는 비공식적 지질학적 용어에서 차용한 ‘인류세the Anthropocene’의 의미가 새삼 부각되는데 전시에서 이 용어의 개념을 어떻게 풀어낼지도 궁금했다.
<타이베이비엔날레 2014> 취재를 위해 지난 대회에 이어 타이베이시립미술관을 방문한 기자는 비정형 전시공간인 미술관 동선에 적응하느라 꽤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동선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듯하다가도 다시 겹쳐 그 구조를 한 번에 파악하기 어렵다. 그래서 자칫 길을 잃었다는 느낌을 준다.
입구에 들어서면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협업그룹 OPAVIVARÁ의 가 맨 처음 관객을 맞이한다. 관객이 자연스럽게 해먹에 누울 수 있게 한 이 작품은 이전 대회에서 한나 후르트치히의 가 관객을 맞이한 바로 그 장소다. 전시장 입구에 놓인 작품 외형이나 내용은 전시 성격을 가늠하게 하는 일종의 선입관을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정자亭子를 떠올리게 하는 목재 구조물과 그 내부의 해먹, 다기茶器 등이 구비된 이 작품은 대번 부리요가 말한 ‘관계’에 대한 직접적인 제시로 보인다. 흡사 부리요 《관계의 미학》 도입부에 등장하는 가브리엘 오로즈코Gabriel Orozco의 <모마의 해먹Hamoc en el MoMA>을 연상하게 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번 전시 도입부는 부리요가 제시한 이론의 확립을 위해 준비된 것이겠구나 하는 강한 선입견을 주입하는 공간이었다. 이런 작업을 접하면 이번 전시를 관람하는 나름의 가이드라인이 제시되는 법이다. 입구를 지나면 타이완 작가 황포친 Po-Chin Huang의 을 만날 수 있다. 타이완의 경제혁명 시기를 거친 작가의 가족사를 대비시킨 이 작품 옆에는 펑훙친Peng Hung-Chin의 가 3D프린터로 제작돼 있다. 이곳을 지나면 부리요가 “선사시대의 풍경”으로 지칭한 전시장이 연결된다. 산업화시대의 풍경과 인간이 자연의 단순한 일부였던 자연의 시대 풍경이 전시장 벽을 사이로 전개되는 것이다.
데쓰미 구도 Tetsumi Kudo, 스털링 루비Sterling Ruby, 카미유 앙로Camille Henrot 그리고 양혜규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이 전시장은 연대기 순으로 나열된 발굴 현장을 재현한 박물관을 보는 듯한 광경을 선보였다.

이론과 실재의 만남?
그러나 2층으로 올라가자 1층 전시장과 다른 양상의 작품이 전개되었다. 1층 전시작 피터 뷔게노Peter Buggenhout의 나 나타니엘 멜로즈Nathaniel Mellors의 유의 작업이 인류의 등장과 그 이후의 단상을 제시하듯 보여줬다면, 2층은 부리요의 의도보다 적극적인 제스처로 전체 전시의 주제를 구현하려는 작가 각각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만난 수라시 쿠솔웡 Surasi Kusolwong 은 단연 눈길을 끌었다. 작가는 5톤에 육박하는 실타래를 전시장에 가득 채우고 그 안에 12개의 금목걸이를 숨겨 놓았다. 물론 목걸이를 찾아낸 관람객은 그것을 가져갈 수 있다. 뭐랄까, 가장 아날로그적인 인터랙티브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디지털 신호로 변환시켜주는 센서가 설치된 인터랙티브 작업을 만났던 관람객은 자신의 욕망과 작품이 조우하는 공간에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궁금했다.
같은 층에 있는 시마부쿠 Shimabuku의 설치작업 는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야만 하는, 그것이 숙명이라고 믿는 우리에게 ‘멈춤’과 ‘되돌아감’을 제시하는 작업이다. 또한 은 비슷한 크기의 석기와 최신 태블릿PC를 함께 제시하는데 ‘기억’을 상징하는 석기는 손에 들면 마치 전화기처럼 통화를 하거나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충동을 일으킨다.
요나 프리먼과 저스틴 로Jonah Freeman&Justin Lowe의 도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모형 건축물이 놓인 정식 전시장으로 인식되는 장소 옆문으로 들어서면 이곳이 과연 전시장인지, 아니면 스태프의 휴게공간 같은 미술관의 숨은 공간인지 착각을 불러일으켜 마치 공사 중인 미술관의 자투리 공간을 발견하는 인상을 주었다.
3층에서 만난 올라 페슨 Ola Pehrson의 (1999)는 의식적이지 않은 식물을 통해 인간 부재의 시대에 대해 생각해보는 작업이다. 사무직 노동자가 관상용으로 쉽게 마련하는 난초과 식물인 유카를 컴퓨터에 연결, 주식투자의 패턴을 학습시킨다는 내용. 유카에게 가는 물과 태양의 양이 주식시황에 맞게 조절된다.
린궈웨이Lin Kuo-Wei의 는 마치 지구본을 맞대놓은 듯한 형태의 작업이다. 자전축을 중심으로 전동장치에 의해 서로 반대방향으로 회전하는 구체球體는 갈리는 소리와 함께 서로의 외부에 흔적을 남기게 된다.
부리요는 이번 <타이베이비엔날레 2014>를 통해 적어도 이론과 실재의 관계를 드러내려는 의도는 이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점이 현지 작가나 기획자가 이번 비엔날레를 비판적으로 보는 빌미를 제공한 것도 같다. 1990년대 말부터 부리요가 이론과 일련의 전시를 통해 보여준, 어떻게 보면 동어반복을 한 듯한 인상을 받았다는 비판을 들었기 때문이다. 타이완의 한 기획자는 “어떤 비엔날레도 그러한 비판을 받겠지만 이른바 현지화, 즉 타이베이에서 유럽의 기획자가 보여준 것은 유럽의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며, “적어도 타이베이는 이 전시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고 말했다.
이는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미술 이벤트에서 해당 국가와 주변 국가의 담론들을 적극 수용하는 ‘변별력 있는 비엔날레가 되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적어도 ‘타이완의 현실이나 타이완이 속한 아시아의 문제’가 제대로 거론되지 못한 점은 분명한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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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카 이Anicka Yi Le Pain Symbiotique 2014

 

NEW FACE 2015 고재욱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

사랑의 상처는 많은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 한다. 사랑의 아픔을 주체하지 못한 개인이 저지른 행동이 나비효과로 사회적 사건, 사고에 영향을 끼친 사례도 많다. 작가 고재욱의 작업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이해하고 느끼는 ‘사랑’이란 감정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진중한 언어로 작업을 풀어나가기보다는 자신의 일상 속 이해의 폭 내에서 재치있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업은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면서 솔직하다. 모든 작가가 이해하기도, 다가가기도 힘든 거시적인 문제에 집중해 이러쿵저러쿵 무겁게 풀어나갈 필요는 없다. 작가 고재욱의 개인적 고민은 진정성을 갖고 관객은 이에 자연스럽게 다가간다. 그는 주변부를 건드려 세대의 목소리, 사회의 문제들이 은연중 작품에 드러나는 것을 즐긴다.
고재욱은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인터랙티브 작업을 주로 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그것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차치하고서 일단 관객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작가가 미리 선곡해둔 이별노래의 반주가 흘러나오는 반투명 유리 노래방 작업인 이 그 중 하나다. 작가는 살짝 문이 열린 노래방에 들어가 열창하고 관객은 그를 바라본다. 이 작업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원하면서 한편으로 이를 숨기려는 젊은 세대들의 모습을 풍자했다. 는 헤어진 연인의 물건을 3개월간 보관하는 프로젝트였다. 2013년 당시 60여 명의 신청자가 몰려 카메라 가방부터 헝겊조각까지 다양한 물품이 수집되었다. 작가는 개인적인 역사가 담긴 오브제를 병치해 그들이 가진 저마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2009년부터 진행했던 는 관객과 작가의 상호관계가 더욱 강한 작품이다. 작가는 자신의 사진을 물리적으로 가기 힘든 지역으로 보냈다. 이 사진을 받은 이는 작가의 자신들을 함께 찍은 사진을 작가에게 되돌려주게 한 프로젝트였다. 허구의 이미지가 세계를 이동하며 실존하는 인물들 간의 묘한 관계를 형성했다. 이미지가 부유하는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이는 지극히 일상적인 발상이었다. 그리고 이 사진들을 모아 전시장 한 벽면을 채운 방식은 마치 SNS에서 테그에 걸린 여러 사진을 펼쳐놓은 듯한 인상을 주었다.
2014년, 그의 관심은 유휴공간을 이용한 대안주거에 쏠렸다. 서울 시내에도 주위를 둘러보면 곳곳에 공터가 있다. 그러나 막상 점유할 수 있는 ‘나만의’ 주거공간을 구하기란 어렵다. 최근 빈집, 빈고 등 대안적 공동거주 형태들이 생겨나는 상황에서 그는 이동할 수 있는 <렌터블 룸> 프로젝트를 생각했다. 이 프로젝트는 2014년 11월 11일 공간해방을 시작으로 오렌지 연필(2014.11.27~2014.12.3), 반지하(2014.12.4~7), 가우스(2014.12.10~17) 그리고 서교예술실험센터(2014.12.22~27)로 옮겨갔다. 설치된 방을 연인에게 대실하는 프로젝트다. 본래는 미술과 무관한 서울시내 유휴공간에 설치할 계획이었으나 임차공간을 구하지 못해 아쉽지만 문화관련 공간 일부를 빌려 진행했다. 이용객은 미술작품이라는 인식 없이 온 경우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미술과 숙박업의 경계가 모호한 상황이다. 일종의 ‘대실’ 프로젝트이다보니 한 숙박업체 사이트에 이벤트 형식으로 공고되어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하고, 숙박업체를 공유하는 사이트에 올라온 사용자후기를 보고 예약문의를 하는 등 웃지못한 에피도드도 있었다. 덕분에 프로젝트 기간 내내 룸은 만실이었다. 작가는 찾아온 이들에게 작업의도를 설명하고, 자신이 꿈꾸는 집의 구조를 그려달라고 주문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프롤로그 역할을 하는 짧은 소설을 읽도록 했다. 누군가는 작업이 가볍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는 말한다. “이론적으로 보면 참여미술로 분류할 수도 있겠고, 거주형태에 대안을 제시하는 사회 참여적 메시지를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을 해석하고 분석하는 겹겹의 층을 제거하더라도 1차적인 레이어는 단순하다. 결국 ‘방’이다. 이해를 떠나 관객이 즐길 수 있는 작업을 바란다.”
임승현 기자

고재욱 인물 (2)고재욱 Koh Jaewook
1983년 태어났다.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독일 코에스펠트에서 열린 을 시작으로 4차례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2013년 첫 개인전을, 2014년에는 으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NEW FACE 2015 김윤희

자연과 인간이 유쾌하게 공존하는 세상

오늘날 동양화가들은 심리적 부담감이 크다. 동양화의 전통적 요소와 동시대적 변화를 어떻게 풀어낼지에 대해 고민이 많기 때문이다. 풍경을 그리는 작가 김윤희 역시 마찬가지다. 작가는 최근 만삭의 몸으로 5번째 개인전 <기묘한 설레임>(2014.12.6~12)을 인천 갤러리 지오에서 열었다. 그녀는 자신의 작업이 “산수나 풍경으로 정형화되기보다는 이미지 그 자체로 인식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김윤희는 강원도, 서울 일대의 풍경을 스케치하기 위해 답사를 다니고 동네의 특성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데 집중했다. 예를 들어 서울 한남동이 강변북로로 둘러싸인 모습을 마치 왕관처럼 캐릭터화했다.
요즈음 작가는 장소에 대한 해석을 개인적인 감수성으로 환원하기보다 그림을 보는 이가 풍경을 이미지 자체로 대면하고 그림에서 독특한 감각을 느낄 수 있도록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풍경의 패턴화된 형태, 도트, 색면 처리 등도 인간과 자연이 맺고 있는 유기적 관계 속에서 새로운 공간 개념을 제시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에 해당한다.
김윤희가 그리는 풍경은 이상향도 아니고 그렇다고 삭막하지도 않다. 인간의 거주 공간은 마치 아이들의 장난감 블록처럼 자유롭게 구성되지만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조화로운 공간으로 표현돼 있다. 여기에서 자연 풍경은 회색톤의 먹으로, 동네 풍경은 컬러풀한 아크릴 채색으로 대비를 이루는 것이 특징적이다. 자연과 인간의 공존은 대결구도가 아니라 그림 안에서 색다른 어울림을 이루는 것이다.
김윤희는 동양화의 특성이 한계처럼 느껴지더라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떠안는 방식을 취한다. 때로는 동양화의 전통을 뛰어넘어 마음껏 변주를 시도한다. 일반적으로 동양화가들은 먹을 통해 붓자국을 강조하지만 그녀는 먹을 하나의 색으로 사용한다. 자연이라서 먹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색으로서 먹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아크릴의 검은색은 먹만큼 풍부한 색의 깊이를 표현하지 못하단다.
그녀에게 동양화는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기 위한 풍부한 토양이자 원천이다.
김윤희의 근작들은 이번 전시 제목처럼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면서 느낄 수 있는 하나의 감수성으로 ‘기묘한 설레임’을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과거 동양화에 자연을 이상향으로 바라보는 전통적인 관점이 배어있다면 작가는 지금의 현실이 반영된 자연관이란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연을 통해 아름다움과 휴식을 느끼고자 했다. 작가는 직접적으로 주장하진 않지만 이런 감수성이 오히려 인간이 자기 중심적으로 자연의 리듬을 파괴하고 현대문명을 성립해온 근원은 아닌지 반성한다. “자연과 사람이 만들어낸 공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꾸 변화하는 과정이라 생각해요. 이 공간 속에서 기묘한 느낌, 그리고 이전에 알지 못했던 설레임을 찾고 싶어요. 서로 다른 두 감성이 만나서, 실제로 존재하지만 사람들이 포착하지 못하고 잃어버리는 공간감을 드러내는 것이죠.” 하지만 그녀의 작업은 인간의 삶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공간의 유쾌함을 드러내기 위해 제목을 지을 때도 나름대로 고민하는 편이다.
김윤희의 작업은 여전히 어떤 변화를 위한 출발점에 서있다. 지금의 시도가 차곡차곡 축적되도록 작업량을 늘리고 앞으로는 대형 작업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리고 작업도 좀 더 단순한 형태로, 평면적으로 변모시킬 계획이다. 그러다보면 지금까지 화면에 보여주었던 전통적인 필선이 없어질 수도 있다. 그러면서 작가는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지점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 고민이라고 밝혔다.
이슬비 기자

art141212_02김윤희 Kim Yoonhee
1984년 출생했다. 덕성여대 동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홍익대학교 대학원 동양화과 박사과정 중이다. 2008년 관훈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을 시작으로 5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CRITIC 청춘과 잉여

커먼센터 2014.11.20~2014.12.31

얼마 전까지 힙스터가 해야 할 일 중에 하나가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인터스텔라>를 보면서 ‘허니버터칩’을 먹는 거란 말이 있었다는데, 굼뜬 일상인지라 하나도 이룬 게 없었는데 얼마전 허니버터칩을 맛볼 기회가 있었다. 기존 감자칩과 다른 새로운 시도로 짭짤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허니버터칩에 대한 소문과 기사 때문인지 신문물을 앞에 두고 조금의 기대와 긴장을 하고 먹었는데. 내 맛도 니 맛도 아님을 알고 난 후 과자 하나를 앞에 두고 여러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청춘과 잉여전>은 젊은 기획자 듀오 ‘유능사(안대웅, 최정윤)’의 입봉 전시이기에 작가 박찬경의 말처럼 어설픈 지도 그리기도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시도 자체로 보기에 <청춘과 잉여>는 지나치게 야심 찬 기획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이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그리고 2010년대를 관통하는 한국 사회의 주제로 아시아, 이야기, 유토피아, 매체 그리고 어떤 주체(?)의 5개를 제시했다. 계보와 위치 짓기를 시도하는 기획에서 그 기준의 근거가 적확하지 않다면 기획의 의도나 의미를 공감하기 어려운데, 아무리 꿰어 보아도 왜 5개의 주제인가, 각각의 주제가 어떤 관계인가 알기 어려웠다. 송상희-이자혜 작가를 묶는 주제는 정리되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청춘’과 ‘잉여’ 의 대표 주자처럼 짝을 이룬 작가들은 (박찬경-이완, 안규철-김영글, 정연두-백정기, 박미나-이상훈, 송상희-이자혜) 이미 작업 맥락이 뚜렷한, 제도적으로 연착륙한 작가들이라 전시의 재료로써 작업은 보장된다. 그렇다면, 전시의 관건은 젊은 기획자로서 미술계에 이러한 이슈를 제기하고 주제에 맞게 작업들을 어떠한 맥락에 놓는가에 달려있다 할 것이다. 기획자는 장소 특정적 성격이 강한 전시에 공간 자체의 아우라보단 작품이 드러나도록 노력했다고 이야기했지만, 공간 배치에서 특정 소주제와 몇몇 작가에 집중해 최소한의 균형이 부족했고, 1층부터 4층까지 22개의 작업을 보는 과정은 분절적이고 부자연스러웠다.
한국사회에서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그리고 2010년대 초반은 20여 년에 불과하지만,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급진적이고 다층적 맥락을 지닌다. 그렇기에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전시 배경과 내용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준 기획자의 현학적 수사에 비해 주제 정리와 배치 과정에 대한 느슨함이 더욱 아쉽다. 차라리 역사화에 대한 힘을 빼고 분명하지 않고 중첩된 5개의 주제와 <댄싱 위드 더 스타>와 같은 작가 짝짓기 형식을 조금 줄여 집중했다면 잘 꿰어진 보배가 되지 않았을까.
<청춘과 잉여전>은 최근 20여 년의 한국 사회와 미술의 궤적에 대한 짭짤하고 달콤함을 뒤섞은 위치 짓기의 시도였다. 어쩌면 전시 자체의 의도나 기획의 역량은 거기까지였을 수도 있는데, 미술계의 과대 혹은 과소 비평과 감상이 있을 뿐이다. 첫 전시가 좋든 나쁘든 오르내렸으니 더할 나위 없는 성과이자 앞으로 행보가 주목받게 된 것도 힘이 될 것이다.
2010년부터 제도권에 등장한 젊은 기획자들의 자기조직화 방법 중에 동시대미술에 대한 계보학적 위치 짓기, 감각적 네이밍와 출판은 나름의 전략일 수 있고 대체로 효과를 발휘했다. 젊은 기획자의 야심 찬 기획과 전략의 방법론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1:8의 세상에서 예술의 가능성은 작아지지만 책임은 무거워지는 상황에서 기획자의 정신승리를 위한 시도에만 기대는 것은 조금 단순하고 순진한 마무리일 수 있다. 공공영역의 실험적이고 대안적인 활동이 축소되는 상황에서 젊은 기획자들이 귀한 자산이 되어야 하기에 조금 느리더라도 깊이 성찰하고 정진해주길 바란다면 요즘 실정 모르는 기성세대라고 할까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하고 부탁하고 싶다.
채은영 우민아트센터 학예실장

CRITIC 이광호 그림 풍경

국제갤러리 2014.12.16~1.25

환한 빛이 가득한 1층 두 방에서, 그리고 어둠으로 차 있는 2층에서 곶자왈을 만났다. 지나간 시간들이 말라비틀어진 덩굴식물의 줄기와 나뭇가지들이 덤불 속에서 폐부를 찌르듯 쏟아져 나왔다. 눈앞의 잡목 뒤에 어떤 세계가 펼쳐져 있을지 가늠할 수 없었던 그때의 낯섦은 무한한 원시림을 상상하게 했는데, 세월이 지나 갑작스레 화면 속에서 마주한 곶자왈에서도 그 너머의 산길은 가늠할 수 없었다. 기시감을 넘어선 실재의 공간, 곶자왈은 꿈속에서 만난 풍경이자 잠시 머물렀던 지나간 시간이며 무한히 펼쳐내는 환상적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곶자왈은 내게는 아르카디아이나 작가 이광호에게는 매료된 특정 장소이자 자연을 사색하는 공간이다. 남자 차장이 버스 몸통을 두드리며 외친다. “곶자왈! 곶자왈 내립서.” 외지인인 나의 뇌리에는 제주도의 소리 “곶자왈”이 각인돼 있다. 창밖 어둠 속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그곳을 다시 지나던 낮에, 여전히 버스 몸통을 탕탕 두드리는 남자 차장의 비음과 함께 차는 출발하고 창밖으로 엄청나게 큰 고사리잎으로 뒤덮인 산길 입구가 열려 있었다. 5.16도로에 감사하며 버스 운행시간에 맞추어 제주도의 남쪽과 북쪽을 오간 이들에게 ‘곶자왈’은 그렇게 사전적 의미로 설명되지 않는 어떤 장소이고 어디서나 만나는 동네 숲길이다.
이광호의 화면 속에 존재하는 곶자왈은 눈이 덮여 있을 때조차 봄으로 보인다. 연중 상온을 유지하는 제주에서 눈은 그저 차가운 수분일 뿐이다. 눈 아래 놓인 푸르름과 달리 덤불은 눈을 넘어 공간으로 뻗어 오른다. 그 날카롭고 뻣뻣한 나뭇가지 혹은 메마른 줄기들은 바늘의 예리함으로 화면을 뚫고 나와 속살을 드러낸다. 푸르름이 가득한 봄 풍경과 물기가 말라들어 바삭해진 가을 풍경 모두 발려진 물감층을 뚫고 비집고 나온 풀이나 잡목처럼 그렇게 생명력을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예리한 바늘의 리듬감 있는 그리기, 결국 표면의 상처를 통해 형상화된 빈 공간이다.
화면 속 곶자왈의 밤은 깊고 무겁다. 부드럽고 가늠할 수 없는 깊이로 인해 상상력의 골이 무한히 깊어지는 공간을 체험케 한다. 그림의 표면은 균질하고 싱싱하다. 밤을 울리는 벌레 소리와 잎이 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부드러운 생명의 현장이 흔들거림 혹은 진동하는 에너지의 축처럼, 가는 떨림이 가득한 평면에 다름 아님을 알게 될 때, 이 작가의 놀라운 테크닉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탄력 있는 고무붓의 경쾌한 리듬과 탄성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진동하는 에너지의 형상화를 보게 되는 것이다. 숲에 이르러 보지 못하게 되는 숲이 아니라, 가까이 들여다보아 사라지는 나무가 아니라 생명성 자체를 경험하는 일, 그림 속 곶자왈을 만나는 것은 각인된 시간의 여행, 원시적 생명성에의 경외를 경험하는 일이다.
조은정 미술비평

CRITIC 자연 대 자연 송창&유근영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2014.10.17~2014.12.14

송창과 유근영의 <자연 대 자연>은 철학자들이(혹은 인류가) 자연을 인식하고 사유해 온 두 개의 신화적 사건을 배치한 것으로 읽힌다. 신화의 탄생지에서 신의 실체는 대체로 무수한 대자연의 사건과 인간의 사건들 사이에서 빛을 발한다. 엄청난 스펙터클의 자연적 사건들은(축복보다는 재앙의 경우가 더 많다) 나약한 인간으로부터 신의 절대성을 상승시키고, 반면 전쟁과 사냥에서 벌어진 인간적 사건들은 영웅을 탄생시켰다. 신의 절대성과 영웅이 혼합되고 묶이면서 ‘신화(神話)’라는 초현실적 서사는 민족지학의 방대한 뿌리가 되었다. 뿌리가 되면서 스펙터클의 자연적 사건들과 인간적 사건들은 둘로 구분할 수 없는 상태로 뒤섞였고, 자연이라는 ‘존재’가 인간의 사건을 초래하거나 인간이 스스로 자연의 사건을 생각하며 자연과 인간의 신화를 엮어내기도 했다. 아마도 바로 그즈음에서 인류는 ‘퓌지스(Physis)’라는 철학적 대상으로서 자연을 갖게 되었는지 모른다. 자연으로부터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사유’를 묻게 된 것이다. 자연철학은 그렇게 탄생했다.
송창이 그리는 자연은 무수한 인간의 역사적 서사를 함축하는 자연이다. 그의 자연은 오래전부터 우리 눈앞에 스스럼없이 현존해 온 본래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심지어 생래적이고 본래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그의 화면에서는 미학적 의문을 제기한다. 저렇듯 아름답고 생기에 찬 자연이야말로 ‘스스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그리고 더 은유적으로는 저렇듯 아름다운 자연은 자연이 아니라 어떤 것들의 어두운 그림자일 수 있다는. 그렇다면 그 의문의 실체는 무엇일까? 우리는 우선 그가 그리는 풍경의 대상지가 한반도의 허리를 자르고 있는 비무장지대 접경지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소나무 숲이고 들녘이며 하늘이 아니라 한 국가의 분단을 ‘실체적으로’ 인식시키는 장소들에서 맞닥뜨리는 숲이고 들녘이며 하늘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그의 숲들은 해방 이후 그어진 38선과 6・25전쟁이라는 냉전의 제노사이드가 남긴 유령들일 수 있다. 그러니까 그는 한반도의 냉전 사건으로부터 자연과 인간의 존재사유를 묻는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1982년에 창립한 ‘임술년’ 멤버로 참여하면서 탄생시킨 자연은 단 한 번도 그러한 냉전신화의 자연으로부터 한 발짝 비켜선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냉전신화의 상징이라는 역사성을 더 구체화하는 쪽으로 작업의 방향을 옮겨왔다. 다시 말해 그가 최근에 그리는 자연들은 접경지의 풍경이라는 구체성을 더 좁혀서 실제적 사건들의 장소들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연철학이 궁극적으로 밝히고자 하는 존재론의 문제를 푸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유근영의 자연은 무엇일까? 그의 자연은 송창이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쪽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연철학자들이 사유했던 것처럼 자연을 자연으로서 본다. 이때 ‘자연으로서’라는 표현은 그가 ‘인간으로서’ 자연을 보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자연의 내부에서, 자연의 바깥에서 그는 한 존재자의 시각으로 자연을 톺아보는 순수의지를 발현시킨다. 즉 그가 마주하는 자연은 스펙터클한 자연적 사건은 아니지만, 자연이 스스로 현존하는 것에 대한 사건을 보여줌으로써 자연이 가진 미학적 숨결들을 화면에 배치하고자 한다. 그런데 유근영의 작품들이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은 작품 속 자연이 구체적인 현실 속 자연의 안팎이 아니라 유근영이라는 한 작가의 내면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자연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평생 자신의 내부에 회화적 자연이라는 정원을 가꾸어왔다. 물론 그것들은 우리 눈앞에 현존해 온 자연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 앞에 섰을 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이질성이 아니라 이국적인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유근영의 내부에서 화면으로 옮겨 온 그것들은 분명히 어딘가에 현존하는 자연으로 읽히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미학적 실체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자연 신화는 실재계가 아니라 상상계와 상징계를 혼합한 신화라는 것을. 송창이 실재계와 상상계를 혼합해서 상징계라는 미학적 화면을 구성했다면, 유근영은 상상계와 상징계를 혼합해서 오직 그만의 실재계를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실재계는 어쩌면 인류가 시나브로 상실했거나 파괴해 온 퓌지스의 존재사유일지 모른다.
자연철학자 김진에 따르면 퓌지스는 물질적인 존재들을 존재하게 하는 존재의 근거와 원인들에 관여하기도 한다. 자연은 우리의 존재사유를 밝히는 가장 근원적인 철학적 명제이지 않은가! 송창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인간 존재를 묻는 자연을 그리고 있다면, 유근영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자연 존재를 묻는 심연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 둘 모두 서로 다르면서 동일하게 이어지는 지점은 자연철학이 던지는 존재사유의 질문이다.
김종길 미술비평

CRITIC 이동기 무중력

갤러리 현대 2014.11.20~2014.12.28

이동기 하면 생각나는 것은 ‘비주관적 작품’이다. 그리고 대중문화와 팝아트. 지금까지 그가 경계하고 저항했던 것을 필자가 억지로 말을 만든다면 ‘개념미술적 작가중심주의’가 아닐까 한다. 먼저 이동기는 서구 개념미술에 반기를 든 제프 월(Jeff Wall)을 이야기한다. 개념미술에서 출발한 월은 그 한계를 절감하고 대중문화(광고판)와 작품의 물리적 크기에 주목했다. 즉 공허한 개념을 떠나 실제 작품을 보고 느끼라는 것. 사실 개념과 논리가 득세하는 최근 한국 미술계를 보면 월의 태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음은 작가중심주의. 이동기는 일전에 “작가는 작품의 창조자이고 마치 신과 같이 작품의 의미를 100% 규정해왔다. 작품의 관람자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야만 했다”라고 지적하며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작품읽기가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했었다. 일찍이 사이 톰블리(Cy Twombly)는 위계질서가 없는 낙서 같은 그림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감소시키고 익명성을 부각시켰다.
이번 전시에서 톰블리와 관련해 눈에 띄는 작업은 이다. ‘Doodling’은 지루한 수업이나 회의에서 딴 생각하며 낙서하는 행위를 지칭한다. 이 작품에는 이동기가 무심코 그린 낙서가 포함되어 있다. 더불어 화면 전체엔 다양한 색의 작은 사각형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이 사각형의 정체는 색종이라고 한다. 크리스마스 때 색종이가 흩날리는 장면을 찍어 보도한 사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색종이가 날리는 모양은 사람의 통제를 벗어나 우연적으로 만들어진다. 이동기는 이 작품을 ‘절충주의’라고 부르는데, 절충주의의 대표작은 규모가 상당히 큰 과 이다. 에는 전단지의 글귀, 명랑만화, 광고 이미지, 작가의 낙서, 북한 포스터, 보도사진, 추상적인 그림, 패턴과 문양 등 실로 다채로운 이미지들이 무작위로 혼재되어 있다. 그는 완성된 형태를 정해놓고 그림을 시작하지 않기 때문에 중간에 형태가 변형되는 것은 다반사이다. 그리고 소위 ‘추상’ 작업이 2층에 3점, 1층에 4점, 지하 1층에 2점 등 전시장 곳곳에 걸려있다. 이는 어떤 논리와 개념에 기반을 두지 않은 채 무의식, 우연, 즉흥으로 빗어낸 물감 덩어리이다.
이처럼 이동기의 작품에 나타나는 무의식적인 낙서, 화려한 색채, 자유로운 형상 배치, 강렬한 북한 포스터, 상상력이 기발한 만화, 광고 이미지, 거대한 화면, 장식적인 패턴 등은 모두 개념주의적 작가중심주의에 의문을 제기하고 회화가 가진 본연의 힘을 복권시키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물론 그의 작품에 개념적인 요소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개념만 보여주고 끝나는 작품이 아니라 개념 이외에도 다양한 요소가 있다는 것을 제안하는 그림이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때론 복잡하고 혼란스럽지만, 그의 그림은 요즘 그가 관심을 갖는 ‘무중력’과 통하는 듯하다.
류한승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위 이동기 <파워 세일> 캔버스에 아크릴 360×840cm 2014

CRITIC 김효숙 꿈의 도시, 적당한 거리

관훈갤러리 2014.11.26~2014.12.16

허물어지고 해체되어 무중력 상태의 파편들처럼 뒤죽박죽 섞이는가 하면 회오리가 지나간 듯 부유하는 난장 속 건축 현장, 그 속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정체불명의 잿빛 사람들이 주춤거리며 배회하듯 서성인다. 김효숙의 회화에서 자주 목격되는 이러한 상황에는 일말의 따뜻한 기운이나 위로, 유머조차 담겨있지 않으며 그렇다고 노골적인 냉소도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산산이 흩어진 잔해더미를 통해 존재의 파괴와 상실을 증거하고 어딘가에 남아있을 그 흔적들과 의미들을 가차 없이 지우고 또 거두어가는 듯하다. 이러한 분열적인 상황은 어린 시절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수도권 신도시 주변으로 빈번히 이사를 다니면서 목도한 도시개발 현장의 냉혹하고도 폭력적인 풍경을 되뇌고, 어디에서도 쉬이 정착하거나 적응하기 어려웠던 자신의 심리적 괴리감과 소외감을 고백하는 행위로 이어졌다. 인간의 생존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일방적인 자연 파괴 행위를 버젓이 합리화해온 도시개발정책, 그리고 그러한 강압적인 정책 논리에 따라 자신들의 삶의 구조를 결정해야 하는 현대인의 비극적인 현실. 그는 자신이 겪은 삶의 형태가 도시를 중심으로 자행되어온 인간 중심의 이기적인 행보에 의한 것이었고, 다시 그 구조 속에 강제적으로 함몰되어 살아야했던 무기력한 상황 속에서 형성되었음을 자각하고 그것을 부단히 폭로해왔던 것이다.
이번 전시 <꿈의 도시-적당한 거리>는 그러한 사적인 차원의 ‘은폐의 고발’에서 나아가 오랜 시간 도시 위에 축적된 인간의 꿈과 욕망, 상실과 절망, 기만과 망각의 표정을 보다 넓게 추적하고 있다. <꿈의 도시 Ⅰ>은 지인의 죽음을 통해 산 자와 망자가 도시 위에 경계 없이 혼재하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인식하고, 도시와 함께 꿈꾸며 삶을 영위했던 존재들과 그들의 꿈을 품고 있는 도시의 관계를 환기한다. 결국 인간은 도시와 불화하면서도 적당히 고슴도치의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연민의 감정이 서려있는 듯하다. <꿈의 도시 Ⅱ>는 6・25전쟁 당시 1만4000명의 피난민을 구조하기 위해 원칙을 무시하고 생사를 넘나드는 위험을 무릅쓴 미군함정 ‘메러더스 빅토리호’의 미담을 다루었다. 작가는 인간만의 논리로 이룬 도시의 삭막하고 무자비한 현실이 결국 인간 스스로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인간 존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투신했던 ‘메러더스 빅토리호’와 같은 흔적들을 찾아 도시와 인간의 관계망을 보다 유연하게 확장하고 있다.
작가는 그동안 서울, 인천, 베이징, 프랑크푸르트, 시드니, 오클랜드 등 많은 도시를 여행하고 경험했다. <서해 5도>, <숲-푸른산> 등을 비롯한 다양한 드로잉은 그 도시들이 간직해온 독특한 분위기와 표정을 살피고, 그 속에서 희로애락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구조와 실존의 의미를 찾고 있는 듯하다. 어린 시절 무기력한 상태로 이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던 도시 속의 불편한 경험은 이제 자신의 능동적인 의지에 의해 선택하는 도시 속의 온전한 생활로 전환되었고, 또한 오래전부터 누적되어온 자신의 상처에 대한 기억은 인간 자존의 의미를 추적하는 이번 전시의 행보를 통해 부지불식간에 회복되고 있는 듯하다.
최정주 OCI미술관 수석큐레이터

CRITIC 이샛별 인터페이스 풍경

자하미술관 2014.12.5~1.4

이샛별의 작품에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많은 도상이 등장한다. 도상들을 한 화면에 접어 넣는 방식은 다양하다. 2층의 작은 작품들에서는 가지 많은 나무 뒤에 신원미상의 인물들을 얽어놓았고, 1층의 큰 작품들에서는 병풍처럼 펼쳐진 면들에 여러 기원을 가진 불연속적 이미지가 병렬된 유화가 있으며, 아크릴로 그린 작품은 위아래로 긴 풍경 형식을 취하면서 군데군데 여러 도상을 삽입한다. 계통수처럼 가지를 뻗어나가며 때로는 뿌리줄기 같은 방식으로 어지럽게 자라나는 식물적 구도가 있으며, 창인지 거울인지 그림인지 알 수 없는 프레임을 줄줄이 연결해 공간 저편으로 나아가는 방식도 보인다.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야생의 숲 속 큰 나무들의 세로축을 따라 미술관의 최고 높이까지 뻗어 오른다. 모두 한 화면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작품이 크든 작든 사방팔방으로 열린 구조를 가진다. 그러한 복잡한 구조 사이에 삽입된 도상들 또한 수수께끼이다. 수수께끼의 정점에 있는 것은 두건과 망토를 둘러쓴 무리이다. 그것은 계몽의 시대는 가고 다시 맹목의 시대가 왔음을 알리는 전령사일까. 빽빽하고 어두우며 아래로부터 무너져 내리는 숲은 ‘그렇다’고 대답하는 듯하다. 소음이 무의미를 야기하듯, 공간공포증적으로 채워진 것들은 허무를 말한다. ‘인터페이스 풍경’이라는 전시부제는 필연과 우연이 한데 얽혀있는 상호연결망의 세계에서 왔음을 알려준다. 풍경이라는 단어에는 어지러운 병렬에 내재된 모순을 굳이 해결하지 않은 채 거리를 두고 관망하겠다는 심미적 태도가 깔려 있다. 이샛별의 작품은 비의적이지만, 우리를 둘러싼 크고 작은 인터페이스에서 늘 경험하는 일상의 원리와 비슷하다. 친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을 정지된 큰 화면에서 음미하게 함으로써 낯선 면을 증폭시킬 뿐이다. 아크릴로 그린 드로잉 작품은 색이라는 차원을 감축한다. 창백한 검푸른 색은 이질적인 병치를 하나의 분위기로 감싸 안는다. 그렇다고 장면 또는 풍경 사이의 균열이 감춰지지는 않는다. 괴리감과 불협화음 한편에 마술 같은 도약과 비약이 횡행한다. 문장으로 친다면 플롯, 시점, 화자, 시제 등이 온통 뒤죽박죽인 부조리한 이야기에 해당된다. 이 전시에서 풍경은 근래에 다녀왔던 제주와 호주의 풍경이 섞여있는데, 작가는 두 장소에서 아름다운 풍경의 이면을 주목했다. 제주의 풍경 뒤에는 무고한 양민이 대량 학살되었던 역사적 사건이 깔려있고, 호주의 경우에도 원주민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경험에서 감추어진 폭력을 보았다. 투시경 같은 시점에 의해 은폐된 층위들이 되살아나 유령같이 떠돌면서 풍경은 더 복잡하게 꼬이고, 피상적 아름다움은 괴기스러워진다. 이샛별의 이전 작품은 괴상한 인물이 주인공이었지만, 작가의 분신들은 이 전시에서 풍경으로 전이된다. 현실의 나, 상상의 나, 그리고 사회가 규정한 나라는 삼각구도 사이의 모순 속에 기이하게 비틀린 인물은 풍경화가 된다. 수족관, 어항, 식물원 등으로 나타나는 아름다운 자연의 컬렉션에는 선택과 배제라는 폭력적 원리가 관철되지만, 제어되지 않는 야생의 자연은 그리기라는 야생적 행위에 힘입어 억압된 것으로 회귀한다.
이선영 미술비평

위 이샛별 <인터페이스 풍경>(맨 왼쪽) 종이에 아크릴 409.4×282cm 2014

CRITIC 김성수 얼굴없는 장소들

갤러리 스케이프 2014.11.5~2014.12.19

세상을 살아나가는 것은 삶의 조각을 묶어나가는 것이다. 조각글들을 묶어 한 권의 책을 만들고, 조각 이미지들을 묶어 하나의 전시를 만드는 것처럼. 살아가며, 어느 정도까지는 묶는 행위가 어렵지 않다. 그러다 삶의 조각을 맞춰나가는 일이 점점 힘들어진다. 그리고 알게 된다. 세상이 우리를 허락할 때만 조각을 끼우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림을 그리는 것도 조각을 묶어나가는 것이다. 삶의 조각을 묶어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고, 그 이미지를 묶어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것처럼. 그려나가며, 어느 정도까지는 묶는 행위가 수월하다. 그러다 삶의 조각을 그려나가는 일이 점점 버거워진다. 그리고 깨닫는다. 세상이 그리는 자를 허락할 때 조각을 끼우는 일도 가능하다는 것을.
결국 미술은 삶이요, 삶은 미술이다. 그 진부함이 미술을 견디게 한다. 미술이 없는 세상을 나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미술이란 그리는 것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지우개가 없는 글쓰기를 생각할 수 없듯이(김훈), 지움으로써 그리는 그림의 경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도시 풍경의 폐허, 그 ‘얼굴 없는 장소들(non-lieu)’을 그리는 김성수의 그림 덕분이다.
김성수가 그려낸 풍경은 양가적이다. 디지털 방식과 아날로그적 집착이 한데 고여 있고(사진과 포토샵으로 가공한 이미지를 OHP 필름으로 출력해 캔버스에 투사해 옮긴다), 세파를 견디지 못한 폐허의 풍경은 도리 없이 숭고하다. 그의 그림은 어쩔 수 없이 슬프다. 세상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 속에서 움직이는 것들 때문이다. 그것들이 빚어내는 세계는 추악하면서도 아름답다. 그 움직임이 더 이상 허락되지 않을 때 우리는 슬픔으로 떠나보낸다. 그런데 김성수의 그림은 그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는다. 세상에 흔적을 남기려는 것이 화가의 열망일 텐데, 그는 재현의 대상을 사라지게 함으로써 그 당연함에 저항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본래의 풍경이 지워져가는 흔적 속에서 우리는 풍경의 본연을 눈으로 만지게 되고, 뒤로 숨는 풍경에서 실루엣을 어루만진다. 그렇게 처연히 사라져가는 것들을 회상하며 존재의 무게를 측량한다.
회화가 한줌의 이미지로 소비되는 지금, 미술의 노정이 무거워 보여 마음이 편치 않다. 그래서 더더욱 김성수가 옳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겠다는 태도와 그리는 것과 지워지는 것 사이에 동요치 않는 단단함에서 위안을 얻는다. 우리는 세상 모든 것에 능통할 필요가 없다. 세상살이에 무능한, 그래서 그릴 수밖에 없는 자라면 더더욱 서툴러야 한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자의 인생이 아름답고, 그림의 한계를 아는 그림이 세상을 제대로 감각한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윤동희 북노마드 대표

위 김성수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 130×162cm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