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FACE 2016 황효덕

견고한 껍질을 깨다

“상상했던 것이 마침내 손으로 잡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머릿속으로 상상해본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얻게 되는 만큼 사라져 버리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황효덕의 작가노트를 읽으면 상상하는 바를 이룩하지 못한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나오는 것 같다. 적어도 그를 만나기 전에는 그런 아쉬움이 작가가 작업을 좀 더 정교하고 치밀하게 구상하고, 제작하게 하는 동력이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웬걸! 황 작가는 상상하던 바의 완벽하고 견고한 구축이 오히려 더한 구속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무언가를 만들 때, 이미 만들어진 것들은 대부분 견고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모양새로부터 도망칠 곳을 찾기 힘들었어요. 그래서 전 그 견고한 형상들로부터 도피처를 만드는 것 같아요. 잘게 나누거나 변형시키거나 우회한 방법들로요. 그리고 그 과정들을 발견하는 것이 제가 작업을 진행하는 에너지가 되는 것 같아요. 그것들은 또 서로 영향을 미치며 유기적인 연관성을 만드는 것 같아요. 그것이 흥미롭고요.” 그렇다면 작가에게 완전체로서의 견고한 작업 구축은 안락함에 안주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 보인다.
작가가 취하는 재료는 매우 저렴한 것들이며 심지어는 폐품이나 페기물에 가까운 것들이다. <Cave>(2013), <Sralasso>(2014), <흐르기 위한 수집> (2015) 등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이 작업이 전시된
장소에서 발견한 것으로 보이는 재료로 제작한 작업이다. 황 작가는 공간에 대해 어떤 오브제를 발견하는 곳이
아닌 그 자체로 재료라고 설명했다. “공간은 기본적으로 작업을 하면서 다루어야 할 대상이며 동시에 공간 자체로서 설치의 재료가 되기도 합니다. 그 장소에 있었던 물건이 그대로 공간에 사용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어요. 작업을 진행하면서 그 공간에 놓이게 될 것들과 서로 영향을 주지요.”
최근 황 작가는 영상을 매체로 활용하고 있다. 그의 작업의 생각과 개념은 어느 정도 작가의 설명을 요구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생각을 이야기 한다는 의미를 작업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그렇다면 그 부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설명은 필요하면 어디에서든 요구 받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설명이라는 것이 참 어려울 때가 많아요. 어떤 것은 설명 못하는 경우도 분명 존재해요. 영상매체를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대부분 기록의 편의성 때문이었습니다. 최근 작업들은 단발적 실험들을 통해 진행되고 있는데 대부분 신체 또는 행동이 동반된 경우가 많았고 그것을 도큐멘트할 수 있는 매체 중 가장 효율적인 것이 영상기록의 방식이었습니다.” 매체가 작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아주 국한적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황 작가는 지인들과 ‘초단발활동’이라는 명칭의 모임을 만들어 참여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최근 열린 <서울바벨전>에도 참여한 바로 그 모임이다. “참여작가들은 서로 작가임과 동시에 최소한의 소비자(관객)가 됩니다. 관심분야, 매체도 다르죠. 어떤 작가는 작업을 통해서 사회적인 이미지를 다루는 반면에 어떤 작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을 다루어요. 초단발활동은 팀은 아니에요. 오히려 스터디모임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종종 해요. 불특정 공간에서 만나 ‘무언가’를 진행합니다. 그리고 서로의 작업을 감상한 글과 함께 아카이빙을 하죠.”
작가는 학부 시절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단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실성이 있어야 할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황효덕 작가. 아마 그의 대답은 특정 작업을 통해 종결의 형태로 나오기 보다는 당분간 지속할 온도와 연관된 작업을 통해 의문형으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거 왜 하고 있는 걸까?”
황석권 수석기자

황효덕
1983년 태어났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수료했다. 2013년 <Pink a Day> 제하의 첫 개인전을 열었다. 또한 <Portfolio for Future>(갤러리 화이트블럭, 2014), <Paperback Writer, Paperback Artists>(테이크아웃드로잉 치읓, 2015), <서울바벨>(서울시립미술관, 2016) 등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참여했다. 현재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다.

 나무 PVC파이프 물 워터펌프 2015

< Pisces-Pieces > 나무 PVC파이프 물 워터펌프 2015

NEW FACE 2016 윤병주

거리 두고 다가가기

영화 ‘마션’은 주인공 마크 와트니가 화성 탐사 중 혼자 화성에 남아 고군분투하는 생존기를 담았다. 영화는 지구에서 가장 ‘화성스러운 곳’ 요르단 와디럼(Wadi Rum)사막에서 화성의 모습을 촬영해 스크린으로 옮겨와 관객의 눈을 속였다. 영화 ‘마션’이 화성(火星) 재현의 극대화를 실현하기 위해 화성과 유사한 분위기를 내는 지역을 선택했다면, 작가 윤병주는 경기도 화성(華城)을 가장 화성(火星)답게 덧입혔다. 〈화성 연작〉은 화성(火星)을 탐사하는 방식으로 기록한 경기도 화성(華城)의 모습을 담은 작업이다. 뒤늦은 나이에 미대에 진학한 작가는 대학 입학 후 4년간 다양한 변주를 통해 이 연작을 이어갔다. 작가에게 경기도 화성은 살인 사건으로 얼룩진 위험한 이미지, 도시개발로 파헤쳐진 공사 현장이 주는 삭막한 분위기로 짙은 어두움이 드리운 듯 느껴졌다. 그는 ‘화성’이라는 동음이의어로 언어·시각적 유희의 옷을 덧입혀 경기도 화성의 장소적 맥락을 잘라냈다. ‘쿨한’ 접근법으로 시작한 이 작업은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를 거듭했다. 헬리캠을 이용해 화성 공사 현장을 촬영한 〈The Face〉는 공사장을 일순간 화성(火星)의 표면으로 보이도록 했다. 실시간 영상 〈Mark on Hwaseong〉은 전시장 빈 벽에 화성을 탐사하는 작가를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실존의 공간을 가상의 공간으로 꾸미고, 허상으로 변환한다. 카메라의 눈을 통하면서 작가의 위치는 자신이 경험한 일상의 공간에서 점차 멀어지고 감정적 개입은 최소화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지역을 표현하면서도 일상의 면면은 다큐멘터리처럼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작업으로부터 거리 두기를 시도하는 작가의 태도는 〈우사단〉에서도 나타난다. 이태원은 이슬람사원을 중심으로 중동아시아 사람이 다수 거주하면서 자주 오가는 곳이다. 이국적인 인상의 사람들에게 사회는 낯섦으로부터 비롯한 선입관을 갖고 대한다. 그러나 해외 생활과 잦은 이주를 경험한 작가는 ‘다름’에 대한 내성이 있는듯하다. 사진에 콘트라스트를 강하게 주고, 암울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속에서 관객은 익숙한 사회적 감정을 극적으로 느끼게 된다. 작가는 “그러한 감정적 동요를 느끼는 순간 언론매체의 영향으로 어떠한 정보도 없는 사진 속 인물에 과도하게 동정어린 감정을 부여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묻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는 오히려 겉으로 드러내어 말하기를 터부시하면서도 만연한 사회적 편견을 몽타주로 극대화해서 자조적인 질문을 유도한다. 작가가 사진으로부터 거리를 둘수록 보는 이는 사진 속 인물과 거리를 좁힐지도 모른다.
작가는 지난 3월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화성과 이별을 고하고 새로운 작업을 향해 내딛는 첫발이다. 아르헨티나 역시 작가가 거주했던 곳이다. 그곳에서 어떤 작업을 펼칠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엔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현장에서 부딪치면서 그만의 ‘쿨함’으로 풀어낼 내용이 ‘핫’하게 기다려진다.
임승현 기자

윤병주
1984년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 사진과를 졸업했고 서울과학기술대 조형예술대학 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2014년 스페이스 윌링앤딜링과 송은아트큐브에서 개인전을 열고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2013년 박건희 문화재단 미래작가상을 수상했고, 2014년 제26회 중앙미술대전, 송은아트큐브 전시지원 작가에 선정됐다.

〈 Mark on Hwaseong _Live Broadcast 〉 싱글채널 비디오 36분 45초 2014

〈 Mark on Hwaseong _Live Broadcast 〉 싱글채널 비디오 36분 45초 2014

 

NEW FACE 2016 채온

“저는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캔버스 위를 지나간 붓놀림에서 무심한 듯 무심하지 않은 섬세함이 느껴지고 한편으론 어린아이의 장난 같은 천진난만함이 묻어난다. 그렇다고 마냥 가벼워 보이는 그림은 아니다. 그건 아마도 작가 채온의 작업이 오랜 시간 품어온 막연한 두려움을 용기로 맞바꾼 결과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노트에 여러 번 등장하는 ‘두려움’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으나 “그림을 그리고 나면 내면에 쌓아 두었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해소”된다고 말한다. 그리는 행위가 그에게는 두려움을 극복해가는 과정인 것이다.
요즘 젊은 작가들이 영상, 미디어, 설치작업으로 기우는 경향이 뚜렷한 가운데 그는 회화를 본인에게 가장 적합한 매체로 꼽는다. 이는 자신의 내면 풍경을 표현하는 그의 작업 태도와 일맥상통한 점이기도 하다. “확장이란 개념이 반드시 매체를 통해 이뤄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회화 안에서도 그것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고 봅니다”라는 그의 말에서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고집이 느껴졌다.
투박한 붓 터치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화면은 작가가 얼마나 재빠르게 형상을 그렸는지 짐작게 한다. 그는 그림에 손을 대면 댈수록 맨 처음 느낀 감정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러한 즉흥성은 그가 작업의 소재를 선택할 때에도 발휘되며 작품의 주제도 공론화된 사회, 정치 얘기가 아닌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에서 찾는다. 예를 들어 인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하면 그를 스쳐간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캔버스에 옮긴다. 〈강한 사람〉, 〈두 얼굴〉, 〈보통 여자〉 등 제목은 완성된 형상을 보고 떠오른 것으로 정한다. 때로는 오랜 투병 생활 끝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내가 그린 꽃1〉이 그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이 부분이 오히려 누군가와 깊이 교감하는 접점이 된다. 따라서 그에게 제목은 작품을 마주한 찰나의 순간을 기록한 일기인 셈이다.
하지만 특정한 대상 없이 형상을 그리고, 세상일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 그를 ‘현실에 무관심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다소 성급한 판단일 듯싶다. 오히려 기자가 만난 작가는 주변 환경과 사람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되새기게 하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고 많은 영감을 받았다는 언급에서 그의 그림이 채도가 낮은 색상으로 그려졌음에도 왠지 모를 따스한 느낌을 주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작품을 보고 난 후 주변의 호응이 작업을 하게 되는 원동력이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전해졌다.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긍정적인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전시 제목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말을 듣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떠올랐다.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라는. 마음을 다듬는 자기 훈련과정을 거친 뒤 그가 어떤 작업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곽세원 기자

채온
1985년 태어났다. 한남대학교 조형예술대를 졸업했다. 2013년 산토리니 서울에서 열린 〈프로젝트 스페이스전〉을 포함해 5차례 개인전을 열었으며 대구미술광장 창작스튜디오, 가창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로 활동했다. 2015년 서울예술재단 포트폴리오 박람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표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Endeavorer전〉 전시광경

표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Endeavorer전〉 전시광경

CRITIC 김정헌 생각의 그림·그림의 생각: 불편한, 불온한, 불후의, 불륜의, … 그냥 명작전

아트스페이스 풀 3.17~4.10

홍지석 단국대 한국문화기술연구소 연구교수

한 작가의 작업을 회고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통시적 축에서 그 작가 작업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살피는 것이다. 초기-중기-후기의 형식/양식 변화의 관점에서 작가를 다루는 방법 말이다. 다른 하나는 공시적 축에서 작가의 작업 양상을 분류하는 것이다. 해당 작가의 전체 작업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몇 가지 양상을 범주화하는 접근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김정헌의 작업을 역사적으로 정리한 연구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미완의 상태로 미술사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상태다. 마침 이번 전시와 더불어 화가 자신이 그간의 작업을 화집, 문집 형태로 정리해 출판했으니 향후 김정헌의 작업에 접근하는 미술사가나 비평가들에게 유용한 자료가 될 것 같다. 하지만 정작 그 화집을 일별해보건대 김정헌의 전체 작업을 시간의 흐름에 따른 형식이나 양식 변천이라는 수준에서 접근하기는 역시 수월치 않아 보인다. 그간 이 작가는 산동네, 도시, 농촌(또는 흙), 한국 현대사 등 여러 주제를 다뤄왔지만 그 진행 과정에서 작품의 형식, 양식의 결정적 변화를 포착하기가 매우 어렵다. 김정헌의 작업에서 역사의 변화는 형식이나 양식보다는 내용, 곧 그림에 포함시킨 당대의 사회상에서 좀 더 잘 드러난다. 특히 작품 안에 포함된 단어나 문장들, 이를테면 ‘럭키 모노륨’ ‘그 해 5월 광주의 푸르름’ ‘백조의 아몰랑 꿈’ 등 해당 작업의 역사적 위치를 지정해주는 지표들이다.
하지만 공시적 축에서 김정헌 작업의 특징적인 양상을 범주화하는 작업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지금까지 김정헌의 작업을 다룬 논자들은 대부분 김정헌이 자신의 화폭에 포함시킨 이질적인 요소들, 곧 글자(문자 텍스트)와 그림(이미지), 추상과 구상,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들이 작품 안에서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럭키 모노륨… 풍요한 생활을 창조하는…>(1981)을 전후로 한 시기에 그의 작품에 등장하여 이후 그의 화면에 가시적으로 부각된 문자/글자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이에 대해서는 먼저 작가의 개입으로 작품 안에 공존하게 된 이질적인 것들이 적대적인 방식으로 상호 작용하는 양상에 주목하는 논의들이 있다. 이를테면 <럭키 모노륨…풍요한 생활을 창조하는…>에서 “풍요한 생활을 창조하는”이라는 문장은 그림의 다른 이미지들(가령 허리를 숙인 농부의 뒷모습)과 격하게 충돌하며 이 충돌은 문장의 메시지를 산산조각내는 결과를 빚었다. 김정헌 자신도 이렇게 한 공간에 결합된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를 갉아먹거나 오염시킬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과거 어떤 자리에서 “경박스러운 회화성, 스티커나 반짝이는 큐빅으로 무거운 주제를 전복할 수 있지 않을까”(1997)라고 물었다. 과거에 박모(박이소)는 김정헌 작업에서 내러티브가 파괴되고 분열된 단어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양상에 주목해 그의 전체 작업을 “마치 산낙지의 잘린 다리, 몸체 등이 각자 꿈틀대는 형상”(1997)에 비유한 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박찬경(1997)은 데리다를 참조하여 김정헌이 의미의 유보, 또는 지연을 도모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질적인 것의 결합에 더해 김정헌 특유의 “대충 그리거나 못 그리거나 그리다 말거나 하는 방식”은 우리에게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유보를 체험하게 한다는 것이 당시 박찬경의 판단이다.
하지만 이와는 다른 방향의 논의들이 있다. 여기서 김정헌의 작업에 개입된 이질적인 것들은 적대적으로 상호 작용하기보다는 즐겁게 화합하여 어떤 긍정적인 메시지들을 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예를 들어 2004년에 발표한 <김정헌論>에서 심광현은 김정헌 작업에 개입된 글자들(문장들)이 “침묵하고 있는 그림을 작동하게 하는 ‘의미론적 끈’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친숙한 어조로 말을 거는 제목들” 때문에 “관객은 벽면에 걸린 그림과 대화를 시작하며” 그 결과 다양한 의미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같은 해에 백지숙도 글과 그림이 결합된 김정헌의 작업을 상호텍스트성의 사례로, 즉 일종의 이야기 그림(narrative painting)으로 다룬 글을 발표했다. 여기서 롤랑 바르트가 말한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의 ‘정박’과 ‘중계’라는 개념은 김정헌 그림에 개입된 단어/ 문장들의 기능을 설명하는 적절한 개념으로 부각되었다. 심광현과 백지숙의 논의에서 김정헌의 작업은 조선시대의 ‘시서화 삼절’ 또는 ‘문인화’처럼 글(書)과 그림(畵)이 평화롭게 상호 작용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백지숙의 주장대로라면-만약 21세기에도 문인화가 가능하다면-김정헌은 “동시대적 문인화를 그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양자 사이에서 김정헌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내가 보기에 김정헌은 일종의 취사선택의 방식으로 두 방향을 모두 취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부정하는, 또는 적대하는 것을 다룰 때 그림에 개입된 이질적인 것들의 적대적 공존이 두드러진다. 반면에 그가 긍정하는 것, 옹호하고자 하는 것을 다룰 때 그림에 개입된 이질적인 것들은 서로 화합한다. 2016년 전시 작품 가운데 <이상한 풍경> (1999)은 전자에 속한다. 분단된 양자의 한쪽에 이리저리 흩어진 ‘쭉쭉’ ‘흑흑’ ‘낄낄낄’ ‘꿀꺽꿀꺽’ 같은 단어들은 그려진 이미지들과 적대적으로 기능하여 전체적으로 음산하고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반면에 <희망도 슬프다>(2015)에서 그림에 포함된 ‘희망도 슬프다’는 문장은 어두운 바다, 푸른 하늘 흰 구름, 노랗게 빛나는 창문과 더불어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의미 창출에 기여한다. 하지만 그림에 개입된 이질적인 것들이 언제나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기능하거나 작동하지는 않는다. 부정에는 언제나 긍정이, 긍정에는 언제나 부정이 깃들어 있다. 파괴가 있다면 건설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2016년 전시는 어쩌면 이런 자신의 애매한 위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려는 시도일지 모르겠다. 작가는 이 전시에 “생각의 그림?그림의 생각”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그 제목이 아우르는 양방향이 나로서는 야릇하게 느껴진다. 그 양방향을 포괄하는 것이야말로 “이 작가가 정치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는 전략이 아니었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친 까닭이다.

위 김정헌 <국가를 향해 쏴라>(맨 왼쪽) 캔버스에 아크릴 2015

CRITIC 문성식 얄궂은 세계

두산갤러리 3.9~4.2

정신영 서울대학교 미술관 책임학예연구사

전시장에서 4m가 넘는 구상 회화를 보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문성식이 이번 전시에서 제시한 <숲의 내부>(2015~2016), <밤>(2015~2016)과 같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는 획들로 나뭇가지, 나뭇잎을 묘사하여 숲의 파노라마를 펼쳐가는 대형 세밀화 양식은 무엇보다 그 노동집약성에 감복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스마트폰의 작은 세로형 인터페이스를 일일 평균 3시간 이상 쳐다본다는 우리의 시각 활동을 생각할 때 이 대형 화면은 쉽게 일망(一望)되지 않는다. 숲 속에 그려진 동물이나 사냥꾼을 발견하면 스마트폰으로 찍기에 바쁜 관객들의 반응처럼 모처럼의 넓은 화면은 환경이나 공간으로서 관객을 에워싸기보다는 파편화된 정보로 접수된다.
몽환적 사건들이 우거진 숲 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고전 <한여름 밤의 꿈> 처럼, 위의 두 작품에서도 숲을 배경으로 짐승들의 약육강식의 사투와 먹이사슬의 맨 위를 차지하는 인간의 온갖 ‘얄궂은’ 행위들이 자행된다. 숲 속 나무 사이사이에 서로를 뜯어먹는 짐승들의 무리나 멀리서 그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사냥꾼의 모습, 캔버스 상단에는 <폴리베르제르의 바>의 공중 무용수처럼 나무에 목매단 자살자의 다리가 걸쳐 있다. 이러한 장치들은 마치 부활절 달걀 찾기처럼 있을 법한 곳에 기대했던 것이 숨어 있는 기시감이 있어 다소의 진부하다. 모두 우리에게 익숙한 ‘얄궂음’의 기호들이다.
작가의 인간 삶에 대한 관심은 대담한 흑백 드로잉 시리즈에서 보다 명확히 드러난다. 남녀가 사랑하고 싸우고 늙어 죽어가는 일장 드라마가 마치 현대판 십계를 보는 것처럼 미묘한 불편함을 주는 것은 표현의 지나친 솔직함 때문만은 아니고, 마치 우리가 이들의 슬픔과 늙음, 욕정과 분노를 이해함과 동시에 그 윤리적 책임마저 떠안고 설교당하는 듯한 동질감에 말미암은 것 같다. <늙은 아들과 더 늙은 엄마>(2013)는 목각인형처럼 작고 경직된 어머니와 그녀를 무릎에 얹은 노년의 아들과의 역-피에타이다.
한 획, 한 획 붓으로 짜 엮은 듯이 흑백의 농담 차이만으로 그린 이 작품은 시간의 공포와 다가오는 죽음, 그리고 생의 기원인 어머니에 대한 감정을 담아 그 어느 누구도 편하게 쳐다볼 수 없는 이미지이다. 전시된 작품 중에는 유난히 눈물을 흘리는 어른들의 모습이 많이 있다.
그중 <사람. 눈물. 파리.>(2015~2016)로 불리는 4명의 초상화 연작에서는 눈을 감고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는 중년이나 얼굴을 손으로 에워싼 여인, 눈감고 누운 노인의 눈초리에서 눈물이 막 떨어지는 모습 등 표준적 일상에서는 익숙지 않은 장면들이 담겨있다. 이 어른들의 표현 역시 세밀화적으로, 구슬처럼 흐르는 눈물은 물론 피부의 질감이나 주름, 기미나 실핏줄까지 비춰, 그 앞에서 몸둘바를 모르게 되는 대형작품보다도 화면을 쳐다보는 재미가 있다. 극사실적인 표면처리에 비해, 인물의 이목구비나 골격의 표현에는 위의 드로잉과 같은 캐리커처적 왜곡이나 형상의 추상화가 약하게 남아있어 실존하는 인물의 모습이기보다는 캐릭터화된 존재인 듯한 느낌을 받는다. 각각의 초상에는 파리가 한 마리씩 붙어 있는데, 정물화에 그려 넣어진 파리라면 꽃이나 과일들의 유혹하는 달콤한 향을 떠올리거나 죽음으로 향하는 부패가 진행됨을 상징할 법한데, 인물에 얹혀진 파리들은 다시 한 번 이들이 회화적 존재이며, 이들의 슬픔도 수사(修辭)적 차원임을 상기시킨다. 대형회화에서부터 흑백 드로잉, 그리고 갤러리 밖에 걸린 굵은 먹선의 누드 크로키들까지 작가의 매체에 대한 감수성과 순발력, 동시에 다양한 회화적 방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느끼게 한다.

위 문성식 <사람. 눈물. 파리.> 캔버스에 아크릴 2015~2016

CRITIC 박혜수 Now Here Is Nowhere

송은아트스페이스 2.23~4.9

이수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박혜수의 개인전 <지금 여기는 어디에도 없다>는 작가가 2년 가까이 네덜란드와 영국 두 군데의 레지던시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서 오랜만에 연 전시다. 기나긴 시간의 흐름을 자연물(나무 둥치)에 남기는 초기작을 선보인 <시간의 깊이전>이나 <깊이에의 시간전>을 통해 우리가 삶 속에서 체험하기 어려운 시간을 자연을 소재로 하여 표현한 작가는 각종 전시, 레지던시, 공모전 등을 겪어가면서 작업 영역을 확장해왔다. 그는 경쟁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의 조건을 파고들면서 연구와 실험을 병행한다. <Meet the Lost>나 <잃어버린 꿈> 등은 경쟁적인 현대 사회에서 고유의 꿈이나 희망을 버리거나 포기당한 상태에서 사회에 무난히 적응하여 살아가는 우리의 우울한 자화상을 대면하도록 권유하고 자각을 일깨우는 작품이었다. 소중한 것들을 다 잃어버린 채, 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리 바쁘게 살아가는 거냐고 묻는 목소리가 기저에 깔려 있었다.
이번 전시 역시 우리가 모두 집착하듯 매달리는 ‘보통’의 삶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주제적으로는 이전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남들처럼 살기 위해서’라지만, 사실상은 나 자신이나 내 가족이 ‘남보다 낫게’ 살기를 바라며, 한편으로 ‘남보다 못하게’ 살게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우리의 복합적인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한국과 영국 신문에서 보도된 우울한 기사에 펀칭을 하여 소리가 나도록 만든 오르골 <Gloomy Monday>에 위험한 사건사고에 휘말리지 않고 제발 ‘평범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반영돼 있다면, 기러기 아빠의 수집품에는 자녀만큼은 제발 남들보다 낫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 남보다 못한 삶을 선택하는 쓸쓸한 모습이 담겨 있다.
메차닌 공간의 대형 설치작품 <World’s Best>에는 무조건 달성해야 할 목표처럼 세계 최고를 추구하는 방향 없는 욕망이 그려져 있다.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최고, 일등이 되기를 요구하고, ‘세계 최고’라는 사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불필요한 목표가 절대적인 목표로 제시되는 우리 사회의 기형적인 모습이 풍자되어 있다. 맨 아래칸의 사람은 위의 풍경이 보이지 않고, 맨 위칸에서는 아래가 보이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소외되고 단절되어 있다. 전시실에는 책으로 걸려 있지만 이번 전시의 중요한 배경은 작가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보통’의 의미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시인 겸 미술가인 태이 요헤가 쓴 시집 <통섬> 이다. ‘평균’과 달리 ‘보통’은 중간치라는 의미 외에도 ‘정상’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에 사실상 정의 내리기가 어려운 단어이다. 작가는 언제나처럼 ‘보통의 삶’이라는 게 대체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관객을 맞이하지만, 질문을 던지는 태도는 과거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작가가 생각하는 정답 혹은 모범 답안이 있음직했지만,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그러한 선-판단을 제시하지 않는 것 같다. 이는 ‘보통’이라는 단어가 가진 복합성도 원인이 되겠지만, 여러 가지 이야기를 서로 다른 층위에서 던지고 있다는 데서도 그렇다. 하나의 명징한 내러티브로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불가지론에 가까워진 셈이랄까. 그 변화의 이유가 무엇일지는 다음 행보를 통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작가가 질문을 하는 태도는 여전히 치열하지만, 명쾌히 이해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다양한 삶의 양상을 더 많이 보고 지금 여기, 여러모로 피로한 한국 사회로 귀환한 작가는 쉽게 정리할 수 없는 삶의 조건들을 글로, 사진으로, 오브제로 보여준다.

위 박혜수 <가변적 평균대> 금속 구조물, 레이저 수평계 2016

CRITIC 이정배 이미-항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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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형무소역사관 2015.6.25~6.25

김최은영 미학

연약한 식물이다. 간신히 유리창에 매달린 씨앗은 뿌리가 깊지 않다. 그러나 생명이다. “볼품없는”(신현진, <볼품 없음에 대하여…> 이정배 개인전 서문) 그것에서도 싹이 텄고, 잎이 달렸다. 이젠 제법 풍성한 인공의 식물은 여전히 생존 중이다. 자유와 평화, 평등과 박애가 아직 죽지 않았단 뜻이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사무동 유리벽에 이정배의 <이미-항상>은 비역사적 단어를 선택 후 역사적 공간에서 다루어 과거, 역사 속 연약한 정의들이라는 교집합을 도출한다. 동시에 온전히 치유되지 못한 채 시간에 매몰되었던 그 시절 명제에 자라는 식물을 통해 현재와 진행이라는 시간성을 부여한다. 이렇듯 자유, 평화, 평등, 박애가 작가가 상정한 역사성과 시간성 속에 다뤄지면 일상의 용어에서 벗어나 미래(“고통의 씨앗이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상징의 언어”(이정배의 작업 노트))를 지닌 서사적 구조를 띠게 된다. 때문에 씨앗을 단어 모양으로 배열하는 인위적 행위는 단순한 가독을 통해 노골적 이해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마찬가지로 자라는 식물을 연출하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추가로 잎을 붙여 나가는 행위를 진행한다. 시트지로 만들어낸 인공의 식물은 작가의 작위가 선행되어야만 싹이 트고, 자라나는 순환의 생명력을 획득할 수 있다. 행위, 즉 실천을 통해야만 얻어지는 가치에 대한 작가의 의도다. 씨앗프로젝트가 1년이라는 시간과 한 달에 한 번이라는 작가적 행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유기적 관계성과 진행성이라는 명분이기도 하다.
작업은 여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목격한 여러 관람객과의 소통 여부가 본 설치작업에서 제안된 또 하나의 프로세스다. 아직 현재의 시간성은 여백의 가능성으로 남아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유리벽에 자라는 풀들은 보는 사람들의 지금일 뿐이다. 이정배는 그 지점을 예민하게 직감했다. 내가 목격하지 못한 과거에 대한 막연한 오늘, 그리고 의식 없는 나의 행위로 비롯될 미래의 가치 변화에 대한 물음을 자라나는 식물로 대변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에 따른 시각적 결과물은 식물의 진위 여부와 공간성, 시간성에 지배되지 않고 작가의 의도를 수행하는 도구로 읽히며 충분한 역할을 수행한다.
유리벽에 꽂힌 듯 서있는 풀들은 마치 의도된 하나의 구조물 같다. 깊게 뿌리내릴 수 없는 차가운 속성과 투명하지만 분리를 위한 막음이 분명한 벽의 속성은 잘 버티고 있는 긴장감처럼 보인다. 식물의 뿌리가 조금 더 자라면 견고한 유리벽은 깨어질 것이다. 유리벽이 깨진 후 식물이 무성하게 영역을 확장하면 굳이 자유와 평화, 평등과 박애를 목격하고 인식해야 할 만한 의식행위가 필요 없을 지도 모를 일이다. 더 이상 연약한 식물이 아니다.
“씨앗 프로젝트는 국가의 과거사 중 고통의 기억을 씨앗으로 비유한다. 이 고통의 씨앗이 현재와 다가올 미래에 희망으로 작동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고통의 씨앗이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상징의 언어로 표현되고, 그 씨앗으로 형성된 언어에서 싹이 트고 잎이 나고 무성한 여름을 맞이한다. 열매를 맺으며 겨울을 맞이해도 씨앗은 사라지지 않는다. 또 다른 씨앗이 자라나 미래를 희망의 것으로 바꾸어 놓기 때문이다.” – 이정배
예술이 사회에 개입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소란한 웅변과 적나라한 고발도 쉽게 목격된다. 오늘 이정배 작가의 <이미-항상> 프로젝트는 어쩌면 지금 막 불붙은 뜨거운 감자는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쉽게 잊기엔 너무도 중요한 문제다. 광복70주년 기념 씨앗프로젝트. 광복이 낡은 감상이 되지 않길 바라는, 역사와 그 역사 속 자유와 평화가 철지난 의식으로 치부되지 않길 바라는 작가의 제의가 조용히 담겨 있다. 날카롭지 않지만 예리하고, 유연하지만 견고하다.

위 이정배 <이미-항상> 아크릴, 시트지, 벽화 2015~2016

CRITIC 나를 바라보는 너를 바라본다

아마도예술공간 3.1~25

조선령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 교수

독일의 매체이론가 빌렘 플루서는 1974년에 쓴 <텔레비전의 현상학을 위하여>라는 글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세 가지 모델을 구분한다. 첫째는 메시지를 주관적으로 전달하는 태도모델, 즉 광고와 같은 방식이고, 둘째는 메시지를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인식모델, 즉 뉴스와 같은 방식, 셋째는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전달하는 체험모델, 즉 영화와 같은 방식이다. 플루서에 따르면 태도모델은 명령법, 인식모델은 직설법, 그리고 체험모델은 함축적이다. 그런데 곧이어 플루서는 이렇게 말한다. “텔레비전 분석에서 나온 결과는 송신된 메시지의 모든 인식모델과 체험모델의 뒤에는 항상 태도모델이 숨어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프로그램은 본질적으로 광고이다. 광고가 흔히 수용자에게 숨어 있다는 사실은 그 효과를 강화시킨다. 광고는 ‘잠재의식’ 에 작용한다. 세계는 수용자에게 텔레비전을 통해 그에게는 부분적으로 숨겨진 명령법으로서 나타난다.”(빌렘 플루서, 김성재 옮김, 《피상성 예찬》, 커뮤니케이션북스, p.195)
플루서의 이 글은 텔레비전의 인식적/체험적 외양에 숨어있는 명령적 속성을 인지할 것을 촉구하면서 텔레비전의 새로운 가능성을 진단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플루서가 구분한 세 가지 모델의 경계선이 오늘날에는 그다지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영상은 합성의 가능성으로 인해 항상 그 진위를 의심받으며, 감시 카메라는 현상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포획할 타깃을 찾는 도구이다. 웹캠은 자기를 표현하는 수단인 동시에 세계를 바라보는 창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플루서가 말한 태도모델의 ‘잠재성 혹은 무의식성’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그의 태도모델 개념은 결국 모든 장치가 단지 기록이나 조작의 매체가 아니라 어떤 프레임, 틀, 세계 자체를 만들어내는 명령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세계를 만들어내는’ 명령의 기능은 숨겨져 있다. ‘미디어아트’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영역이 끊임없이 문제 제기해야 할 지점 중 하나는 그것의 가시화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작가 5명과 프랑스 작가(팀) 11명이 참여한 아마도예술공간의 전시 <나를 바라보는 너를 바라본다>(유진상, 에릭 마이어 기획)는 우리 일상 매체에 숨은 명령어들을 가시화하는 작품을 다수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웹캠, 스트리트 비디오, 감시 카메라, 스카이프, 내시경, 구글링, 음향감지장치, 비디오 게임 등 미술이 잘 수용하지 못했던 것들까지 망라한 동시대적 매체/장치들이 골고루 등장한다.
몇몇 작품은 온라인과 전시장에 동시에 존재한다. (어쩌면 그러한 작품들이 전시의 주제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1999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발전해온 제롬 조이의 웹 프로젝트인 <nocinema.org>는 전 세계 곳곳에 설치된 웹캠이 보여주는 실시간 영상들과 영상에 랜덤으로 덧입혀지는 음향/음악으로 구성된 일종의 ‘영화’이다. 순전히 무작위적이고 서로 연관성도 없는 이 영상/음향의 복합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의 내러티브를 구성하게끔 유도하면서 ‘다른 세계’가 새롭게 생성되는 순간들을 보여준다. 또한 세계 각국의 도시를 촬영하고 그 장면을 ‘스캐닝’하여 화면에 ‘데이터화’해서 보여주는 얀 부가레와 아르노 미르망의 <somethingismissing.tv>(2016)는 컴퓨터 게임과 감시 카메라를 합친 듯한 인터페이스를 보여주며 이미지를 객관적으로 정보화하는 듯하지만, 화면에서 볼 수 있는 정보는 사실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지표가 기묘하게 혼합되어 있다(danger, memory의 비율과 CPU, GPU의 비율 등이 동시에 등장한다). ‘동시대’를 구성하는 명령어는 여기서도 또 다른 방식으로 가시화된다.

위 플뢰리퐁텐느(FleuryFontaine) <Lose or draw>(오른쪽) 영상 설치 2015

REVIEW

홍승혜 개인전
윌링앤딜링 3.18~4.7

‘나의 개러지 밴드’로 명명된 개인전에 작가는 영상과 사운드, 그리고 설치작업을 선보였다. 음악이 재생됐을 때 박자와 함께 화성 및 음색의 변주를 작가의 기본 작업의 형식인 픽셀로 시각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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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림 (1)

최봉림 개인전
갤러리 룩스 3.10~27

T.S. 엘리엇(Eliot)의 시 <The Waste Land>(1922)에서 주제 전개를 따왔다는 작가의 이번 개인전은 ‘아름다운 미망인의 봄’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삶의 추동력을 잃고 나락으로 빠진 심적 상황을 이야기하듯, 실망스러운 삶의 반복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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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서영 (3)

배서영 개인전
영은미술관 3.5~4.17

지난해 서울 문래동에서 71/2과 함께 진행한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새로운 작업을 선보인다. ‘문래동 철공소’의 지역적 특수성을 드러내는 철판을 사용해 사회적 관념에 부딪히며 재구성되는 작가의 정체성과 자존감의 문제를 새롭게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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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뼘

윤희수 개인전
길담서원 한뼘미술관 3.3~4.2

‘사그라지는 사물에 대한 애도’를 표현한 작가의 개인전. 버려진 나무의자에 새 생명을 불어넣은 <나무의자, 다시 나다>를 포함해 세월호를 생각하면서 그린 <날개 접힌 고요 속의 새> 등 사물과 사람에 대한 애도를 그만의 방식으로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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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

잉고 바움가르텐 개인전
아뜰리에 아키 3.4~4.9

현재 홍익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작가는 자신이 살던 곳 주변의 광경을 특정하여 작업한다. 이번 개인전 타이틀은 ‘Perception’. 특히 건축물의 일부를 주제로 자신이 머물던 곳의 인류학적 고찰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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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선

장인선 개인전
서울시청 하늘광장 갤러리 3.9~5.8

갤러리가 주관한 작품 공모에 선정된 작가는 이번 전시에 재개발을 소재로 다양한 욕망의 층위를 담아내려 했다. ‘서울의 바람’으로 명명된 이번 전시는 옛 서울의 모습을 수묵화로, 그리고 현재의 서울 모습을 노랑색 선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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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앤제이

처음보는 공원
원앤제이갤러리 2.25~3.25

김혜나 박민하 이정민 3인의 작가가 참여한 그룹전. 낯선 공간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예측할 수 없기에 긴장감을 높이는데 이러한 감정을 시각화해 각각의 작업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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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범,신선주_리나 (6)

There
리나갤러리 3.8~4.19

신선주 하태범의 2인전으로 두 작가는 실재하는 풍경을 심리적 감성으로 재구성해 비현실적 공간을 창조했다. 블랙과 화이트로 대비되는 이들의 작업세계는 보는 이에게 간접적인 공감대를 형성해 주고 상상의 장을 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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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랑 (2)

이정지 개인전
선화랑 3.16~4.5

50여 년 동안 화업을 이어온 이정지 화백의 개인전. 작가는 롤러를 이용해 캔버스에 채색한 후, 나이프로 긁어 동그라미의 흔적을 구현해낸다. 이를 통해 작가의 의식이 시간과 행위의 흔적으로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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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울

별별수저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생활미술관 3.15~5.15

2013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을 지낸 박남희 씨가 초청큐레이터로 참여한 전시다. 30여 명의 작가가 참여해 ‘수저’에 대한 ‘별의별’ 관심사를 작품에 펼쳐내며 인식의 확장을 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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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마

김기성 개인전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3.17~27

지식 변화의 거대한 층위를 사유하는 전시다. 그간 작가는 아날로그적 사유와 디지털 사이의 틈을 은유적으로 이미지화한 작업을 선보인 바, 백과사전으로 상징되는 지식이 디지털화된 시대에 단순한 오브제(장식품)화하는 과정을 펼쳐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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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연

김호연 개인전
갤러리 라우 3.1~31

동국대 미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작가의 개인전. 한국 무속 신화와 자연을 주제로 작업하는 작가는 최근 그를 엄습한 병마와 싸워가며 이번 개인전을 준비했다. 근본적인 재료, 즉 진흙과 물 등을 이용하여 가장 순수한 형태를 구축하려 했다.

REGIONAL NEWS

전시2

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진행 중인 퍼포먼스 모습 아래 서울 이포갤러리에서 열린 〈동방으로부터〉 전시전경

전주

통일의 염원을 싣고 철의 실크로드로 달리다
‘동방으로부터’ 여정단 리포트 전 열려

지난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10인의 예술가가 모여 문화 교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문화교류 프로젝트 철의 실크로드 ‘동방으로부터’〉(이하 ‘동방으로부터’)(단장 심홍재)를 진행했다. 그간의 과정을 정리하는 전시가 서울 이포갤러리(3.25~31)와 전주 남부시장 청년몰 청년회관(4.5~13)에서 연이어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동방으로부터’ 여정단의 활동을 담은 영상과 각국 현지인들이 적은 평화통일 염원 메시지를 소개했다.
‘동방으로부터’ 여정단은 세계에서 가장 긴 유라시아철도를 이용해 국제 사회에 통일 염원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목적으로 전주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퍼포먼스 작가 심재홍을 중심으로 한 10인의 국·내외 예술인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지난해 9월 23일 전주 치명자산 천주교 성지에서 발대식을 갖고 11월 20일 부산을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토크 이르쿠츠크,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바르샤바, 프라하, 베를린, 암스테르담, 브뤼셀, 런던을 거쳐 스페인 마드리드와 포르투갈의 리스본까지 순회했다. 지난 1월 18일 서울역에서의 행사를 끝으로 48일간의 여정을 마무리지었다.
이들은 사전 제작한 통일 만장과 현수막을 설치해 세계 각국의 현지인이 한국의 분단 상황을 인식하도록 하고 바닥에 깔린 한지에 메시지를 적게 했다. 염원을 담은 한지를 태우는가 하면, 현지인들의 메시지를 담은 죽부인을 치켜세우는 플래시몹 등을 진행하였다.
행위예술가 심홍재 단장을 비롯해, 오광해(한국화가), 김석환(행위미술가, 화가), 김서연(사진가), 심인(스크립터), 김방진(루게릭 퍼커션)이 한국에서 출발했고 유지환(행위미술가, 화가), 조성백(행위미술가, 조각가), 전영지(무용가), 링천(행위미술가, 화가)이 파리에서 합류했다. 현재 ‘동방으로부터’ 여정단은 2017년 리스본에서 시작해 유럽을 거쳐 인도와 중국을 잇는 2차 여정을 기획하고있다.
최정환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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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광주_rois Clarins
프랑스 화가의 ‘한국방문기’
한불 수교 130주년〈클로드 게나르가 그리는 한국이야기전〉열려

한불 수교 130주년을 맞아 전국에서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가운데 광주 프랑스문화원(원장 최승은)도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특히 올해는 광주 홀리데이인 호텔과 연계해 넓은 장소에서 행사를 진행해 화제를 모았다.
3월 1일부터 31일까지 한 달간 광주 프랑스문화원에서 열린 〈클로드 게나르가 그리는 한국이야기: 한국의 어제와 오늘을 알아보다전〉은 외국인 눈을 통해 우리 모습을 되돌아본 기회였다. 프랑스문화원 내부 벽에 내걸린 A4용지 크기 작품 50여 점은 프랑스 출신 화가 클로드 게나르(Claude Guenard)가 2014년과 2015년 두 차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부산, 광주 등을 돌며 만난 사람들을 그린 작품이다. 유니폼을 입은 회사 여직원, 미니스커트를 입은 젊은 여인, 시장 상인 등 작품을 살펴보면 그가 어디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지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는 프랑스 화가의 ‘한국 방문기’인 셈이다. 재미있는 건 작품 소재가 모두 잡지이거나 광고용지라는 점이다. 지면 전체를 잉크로 덮지 않고 사인펜으로 쓱쓱 그리듯 가벼운 표현 기법을 사용한 게 특징이다. 그런 효과 덕분에 광고의 내용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대충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한복 주름, 얼굴 표정 등 디테일이 살아있다. 마치 캐리커처를 보는 듯 부담 없이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클로드 게나르는 화가이자 모험가로 불린다. 젊을 땐 링 위에서 복서로 활동하기도 했고 국립학교 교사로 재직했으며 아프리카에서 20여 년간 미술을 가르친 경력이 있다.
박진현 《광주일보》 기자

광복 이후 한국 조각의 영향력
〈故 김영중 조각가 특별전〉열려

광주_평화행진곡전남 장성 출신 고(故) 김영중 조각가(1926~2005)의 삶과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특별전이 3월 5일 시작해 5월 1일까지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진행된다. ‘우호(又湖) 김영중-평화행진곡’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전시는 그의 대표작 70여 점과 설계도를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뜻깊은 자리다.
우선 전시실을 방문하면 높이 2m의 막대 모양 작품(작품명 미상·1985)이 관람객들을 맞는다. 추상적 요소가 강한 이 작품은 그가 추구했던 이상향을 보여준다. 마치 연기가 땅에서 하늘로 피어오르는 형상이다. 전시장은 ‘구상 인체조각’, ‘용접조각과 생명’, ‘가족과 공동체’, ‘비상’ 총 4가지 주제로 구성됐다. 초창기 작품이 주로 전시된 ‘구상 인체조각’에서는 전시 주제이기도 한 〈평화행진곡〉(사진)을 볼 수 있다. 나팔을 부는 여인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조각 특유의 딱딱함보다는 부드러운 조형미가 돋보인다. ‘용접조각과 생명’ 에 전시된 ‘기계주의와 인도주의’(1962)는 삭막해 보이는 작품을 새싹과 씨앗 모양의 조각으로 덧입혀 희망적인 메시지를 구현했다. 전시 동선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김영중의 작품세계가 ‘가족과 공동체’로 넘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전시장 한쪽 벽면을 따라 일렬로 나열한 높이 약 50cm 크기의 조각은 모자(母子) 또는 가족을 입체적으로 단순화한 형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김영중 예술세계의 종착점은 ‘비상’ 섹션이다. 작가는 사람들이 현실의 고통을 넘어 희망을 잃지 않기를 꿈꿨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불굴의 조각상〉(높이 1m)과 광주문예회관에 설치된 〈예술+행위+도약〉은 이런 그의 염원이 잘 드러나 있다.
전시를 기획한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사 홍윤리는 “김영중 선생은 광주비엔날레 창설 주역이라는 점에서 광주와 매우 인연이 깊다”며 “광복 이후 한국 조각예술을 대표한 한국 미술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말했다. 한편 김영중은 1948년 서울대 미술학부에 입학했으나 6·25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했으며 전후 홍익대에 편입해 김환기(회화), 윤효중(조각)을 사사했다.
박진현 《광주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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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임호  50.5×38cm 캔버스에 유채 1952

임호 <흑선> 50.5×38cm 캔버스에 유채 1952

부산 토박이 작가들의 ‘향토적 서정성’
〈부산 토박이. 토벽동인의 재발견전〉열려

부산시립미술관(관장 김영순) 소장품 기획전시 〈부산 토박이. 토벽동인의 재발견전〉이 1월 28일부터 4월 24일까지 계속된다. 이번 전시는 1953년 부산토박이들로 구성된 ‘토벽동인(土壁同人)’의 예술의식과 그들의 작품을 재조명하는 자리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토벽동인회의 작품 40여 점과 함께 작품을 설명하는 영상미디어로 구성됐다.
6·25전쟁 시기 임시수도였던 부산은 아이러니하게도 어느 시대에도 볼 수 없던 예술 활동의 부흥기를 맞았다. 전국에서 모여든 예술가들로 부산은 포화상태였으며, 참담한 피란생활 중에도 예술가들의 활발한 소통과 교유가 이뤄졌다. 이 시기 부산 토박이인 김경, 김종식, 김영교, 김윤민, 서성찬, 임호로 구성된 ‘토벽동인’이 결성된 것이다. 이들 대부분은 일본에서 유학하며 서구미술을 흡수함으로써 그들만의 미의식을 정립했다.
‘토벽동인’은 전쟁 발발로 타지에서 피란은 예술가들이 대거 유입되자 부산미술계가 위축됨을 느꼈다. 그리하여 이들은 현실 중심의 지역 풍토를 확실하게 인식하려는 목적으로 모임을 만들었다. 토벽이라는 이름도 ‘토박이’라는 의성어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토벽동인’ 소속 작가들의 작품이 공통된 방향성을 뚜렷이 드러내지는 않지만 대체로 현대적이면서도 토속적인 서정성과 순박함을 띤다. ‘토벽동인’의 활동은 이른바 ‘향토적 서정성’을 지향하며 서구에서 전래된 서양화를 한국적 풍토에 맞게 토착하려한 지역 최초의 시도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동안 이들의 활동과 예술의식을 지역에 한정 지어서만 평가한 점은 아쉽다. 이번 전시는 1950년대 ‘토벽동인’이 지역미술의 한계를 넘어 민족미술의 원형을 추구하는 큰 지향점을 두고 결성 및 활동했다는 점을 부각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김은경 독립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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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대구 (2)

〈 dreaming book-바다 〉 종이 590×620×525cm 2016

읽을 수 없는 책, 사회를 담은 책
10회 맞은〈유리상자-아트스타전〉

대구 중구에 위치한 봉산문화회관(관장 김순희)은 자치 행정단위에서 설립하고 운영하는 수많은 시설 중 하나다. 하지만 이곳은 다른 지역 공공 아트센터와 비교할 때 공간과 프로그램에서 특별한 색깔을 유지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사방이 투명한 유리로 지어진 전시실은 유리상자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이 장소에서 벌어지는 기획전시는 매번 관심이 집중되었다. 〈유리상자-아트스타전〉으로 명명된 이 프로젝트는 1년에 한 번씩 공개 모집을 통해 전시 작가를 선정해왔다.
2007년에 시작해 올해로 10년을 맞았다. 10주년을 자축하는 동기에서 올해는 공모가 아닌 초대전을 선보이고 있다. 지난 2월 19일에 시작하여 4월 17일까지 이어지는 특별전시는 현대미술가 이지현의 〈dreaming book-바다〉다. 책이나 옷과 같은 기성품을 보풀과 구멍을 내고 해체하여 작품으로 만드는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이력에 특별히 기록될 만한 대규모 작업을 벌였다. 그는 자신이 임시로 거주하는 제주도 바닷가 작업실에서 수천 페이지 분량의 책을 한 장씩 뜯어서 패널과 비슷한 쓰임새로 이어 붙여 책 형태와는 전혀 다른 입체 조각을 완성했다. 그것은 실제 크기의 배가 되어서 천장에 매달렸다. 전시 공간 바닥은 섬과 섬 사이에 파도가 넘실대듯 높낮이를 달리한 설치물이 펼쳐졌다. 전시 표제가 그대로 가리키듯, 종이책으로 만들어진 몽환적인 바다가 유리상자를 채웠다.
책은 사람들이 그 속에 담긴 정보를 읽고 보관하는 기능을 가진다. 그러나 이지현의 책은 읽을 수 없게끔 변형을 가하여 책과 종이 그 자체의 물질성을 더 강조한다. 원래 효용이 상실된 부분을 미적인 의미로 보충하는 이 과정은 어떤 책을 원 재료로 사용했는지에 따라서 다양한 해석을 낳는다. 하나의 텍스트로서의 책이 사회 현실과 예술의 역사에 비친 콘텍스트를 이끌어내는 셈이다. 그러나 이 설치작은 알 듯 말 듯한 암호로 가득 찬 개념미술이라기보다 정보의 바다를 헤치고 다니는 우리의 모습을 상징하는 볼거리란 점에서 공공 미술관의 기획으로 합당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
윤규홍 예술사회학